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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rco Mar 31. 2024

제주에서 한방 먹었다

강력한 레드카드 한 장 받았습니다

 봄을 만나러 가서  갑자기 나타난  겨울에게 일격을 당했다. 굴에 한방을 날리고  회심의 미소를 지은 체 겨울은 유유히 사라졌다.  이미 떠난 줄 알았던 겨울과의 예상치 못한 만남은 가혹했다.


 요일 밤 9시경,

눈을 떠보니 서귀포 의료원 응급실.

뭐야, 내가 왜 여기 있는 거지?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온몸에 통증이 느껴졌다.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차라리, 꿈이길 바랐는데. 사고가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당시, 난 자전거를 타고 제주도를 일주하고 있었다. 바람의 훼방에 휘청거리기도 하고

비도 맞으면서 2박 3일 동안 서귀포시까지 지났는데. 서불공원 오르막 길을 올라 쇠소깍 방향으로 내려가던  순간  기억이 사라졌다.


  지난 목요일 휴가를 내고 3박 4일

여정으로 제주도에 왔었다.  제주 조천에서 일년살이를 하고 있는 선배앞에 짠하고

나타나  떠나는 날 점심이나 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응급실이라니. 뇌진탕 증세는 있었지만 머리 CT 촬영 결과 머리 골절이나 혈종은 없다는 말을 듣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것만 해도 어디인가.


 하지만,  얼굴 상처와 골절로 당분간 치료는 불가피했다, 부랴부랴 비행기 탑승시간을 변경해서 다음날 아침 일찍 제주를 떠났다. 근거지인 서울에 가서 치료받는 게 맞으니까.

        

 3박 4일이면 자전거로 제주도를 한 바퀴 도는데 충분한 시간이다. 10여 년 전 오로지 정해진 시간 내 완주하겠다는 일념으로 죽어라 페달을 밟아 2박 3일 만에 완주했던 경험도 있었으니까.


 3,4일 차에 비가 온다는 예보가 신경 쓰였을 뿐. 떠나기 전, 제주공항 근처에 있는 자전거 렌털샵에 전화해 알아보았더니 태풍철이 아니므로 해안 쪽은 날씨변화가 심해 비가 오락가락하는 수준일 거란 답이었다.  제주에 도착해 렌털샵에서 자전거를 대여하고 오후 한 시경 하이킹을 시작했다. 처음 멈춘 곳은 서쪽해안 용연과 용두암 근처. 바다를 보니 가슴이 탁 트였다.  


 쾌청한 날씨, 코발트색 바다, 인증찍기에

여념 없는 관광객들. 역시, 제주야. 3박 4일

내내 바다를 보며 해변을 따라 섬을 돌

생각을 하니 가슴이 설레었다.

쉽지는 않겠지만 각오는  단단히 하고

왔으니 완주를 못할  이유가 없었다.     

 첫째 날은 자주 멈췄다. 시간여유가 충분하다고 생각해서 여정을 즐기겠다는 마음으로 시작했으므로. 애월과 한림의 바다. 가까이 보이는 비양도. 풍차거인들이 바다 위에 서서 위세를 자랑하는 바다목장, 인어가 살고 있을 듯한 한림의 인어카페. 어찌 이런 곳을 그냥 지나칠 수 있을까.


 첫째 날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머리 위를 지나가는 비행기였다. 공항 근처인 서쪽 해안은 비행기가 지나가는 항로라서 한 대가 지나가면 4-5분도 안돼서 또 다른 비행기가 소리를 내며 육중한 몸을 드러냈다. 그때마다 시선은 하늘을 향했다.


 어마어마한 동체가 하늘에 떠서 앞으로 나가는 게 신기하기만 했다.  멈추는 순간이 잦을수록 속도는 더뎠다. 대정까지 가야 하는데 고산은커녕 해가 지고 나서 한림항에 도착했다. 한림항에서 30분 정도 달려 중산간 쪽에 있는 게스트하우스 에서 1박을 했다.     


 다음날, 출발하려 짐을 정리하다 보니

호주머니에 넣어둔 선글라스가 없었다.

고작 한번 사용했는데. 급히 달리다가 길에서 떨어진 게 분명했다. 아까워서 한번

찾아보자는 심정으로 지나온 길을 복기했다.

누가 그걸 발견했다고 해도 챙기지는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인어카페 앞까지 바닥을 훏고 갔지만 보이지 않았다. 그냥 잊는 게 정신건강에 좋을 거 같아 다시 여정을 시작했다.


 오후부터 바람이 앞을 가로막기 시작했다. 속도가 좀처럼 나지 않았다. 비가 온다더니 바람이 비를 몰고 오는구나 짐작했다. 페달 밟기가 점점 힘들어졌다. 한경면 입구 이정표에 “바람의 고장” 이란 문구가 마음을 주눅 들게 했다. 지금까지는 연습이었고. 앞으로 본게임이니 준비 단단히 하라는 말로 들렸다,      


  바람의 고장답게 바람은 자전거 주위를 떠나지 않았다. 쓰러뜨리겠고 작정이라도 한 듯. 고산지역과 수월봉 근처를 어찌 지나왔는지. 비까지 가세했다. 도로상에 있던 카페에 가서 쉬고 갈까 했지만 게스트하우스가 몰려있는 대정까지는 가야 안심이 될 것 같았다. 김대건 성당을 지나 저녁 6시쯤 대정에 도착했다.


 2일 차의 주인공은 단연 바람이었다. 일 년에 맞을 바람을 다 맞았다. 부디, 다음날은 바람만 멈추어다오 하고 빌기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셋째 날은 평소 제주에 가면 머무르는

공천포 게스트하우스까지 목표를 잡았다.

그리해야 마지막날 성산을 지나 수월하게 제주공항까지 갈 수 있을 테니까.


 다행히 바람도 잠잠하고 하이킹하기엔 좋은 날씨였다. 송악산 인증센터를 지나 사계리의 동네 책방, 산방산이 통째로 보이는 카페 포비에서 멈춤의 시간도 가졌다. 이번에는 오르막과 내리막이 반복되는 환상적인 난코스가 계속되었다. 난코스를 통과하고 어두워질 무렵 서귀포 시내에서 저녁식사까지 챙기고 쇠소깍으로 향했는데. 결국, 사고로 여정을 마무리하게 된 것이다.     

 모든 순간을 즐겼다. 사고가 나기 전까지는.


고개를 돌리면 언제든 눈에 들어오는

제주의  푸른 바다. 하루에 동네책방 한 군데는 들러보겠다는 생각으로 방문한

한경면의 “책은 선물”과 사계리의 “어떤 바람”. 가끔씩 자전거에 내려서 끌고 가게 만든 바람의 짓궂은 장난. 생선구이에 열 가지 반찬이 착한 가격으로 나오는 대정의 할밥상. 카페포비에 앉아서 산방산을 가슴에 담았던 휴식의 시간까지.      


  고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악몽이지만,

사고 나기 전 좋은 기억까지 도매금으로 사고의 기억 속에 가둬놓고 싶지는 않다. 좋았던 건 맞으니까. 사고의 원인이 무엇이든 지나간 좋은 순간과는 상관없으니까.


  완주 성공담을 쓰고 싶었는데 실패담을

쓰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실패담이라도 글을 쓰고 있다는 사실에

감사할 뿐이다. 머리를 다쳤다면  이런 순간조차 다시 오지 않았을테니까.


 지금은 치료가 잘 마무리돼서 예전대로 회복되기만을 소망. 다만, 이번 사고가

내게 주려는 경고의 메시지는 한 귀로 듣고 흘려버리면 안 될 듯 싶다.  


의 속도를  좀 더 늦추라고”  

한방에 가고싶지 않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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