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써니 Jan 15. 2024

이사를 앞둔 엄마

결혼 전 내가 살던 집은 2층 양옥집으로

사업으로 돈을 번 아버지의 자신감 같은 파란 기와가 인상적인 집이었다.


이웃들은 우리 집을 청기와 집

회장님 댁으로 부르며

그 당시만 해도 없었던 2층 양옥집, 이쁜 집으로 통했다.

우리나라사람들에게 집이 가지는 의미가 어떤가.

자신의 자부심이 가진 무게만큼 우리 집 지붕은 화려하고 남다르게 지어졌었다.


피난민촌이었던 동네가 싫다는 언니의 바람에도 불구하고

아파트 한채 값을 들여 집을 공들여 새로 짓고

화단이 이뻤던 우리 집은 화단을 없앤 대신 옹기종기 화분을 들여놓았다.

통유리로 창을 만들어 하루종일 해가 들어오는 따스한 분위기를 내고 반질반질한 마루와 벽은 향나무 향기로 집안을 향기롭게 해 주었다.

자신이 일군 이 터에서 자신이 만든 부로 일군 이 집은

아버지에겐 집 이상의 의미였다.

아버지는 그곳을  벗어나길 원하지 않으셨다.


순종적인 엄마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그 선택을 따랐고

집을 짓는 3달을 우리는 이모집에서 지내며 새로운 집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전까지 우리 집은 연탄보일러로 난방을 해왔다.

겨울이 되면 연탄 창고 가득   새카만 연탄을 날아왔는데

그 수고로움이 우리들 겨울을 책임져 주는 따뜻함이었다.


어느 해  함께 잠을 자다 연탄가스에 중독된 일도 있었다.

속이 매스껍고 몸이 말을 안 들어 일어설 힘이 없었던 우리에게 엄마는  

시원한 동치미 국물을 한 사발씩 주었었다. 

그 당시 연탄가스 중독으로 죽은 이들이 많았음을 감안하면 우리 셋을 모두 잃을 뻔했던 아찔함이었다.


새로 지은 집은 기름보일러로 난방이 되는 집이라 더 이상 연탄을 갈지 않아도 ,

연탄가스에 중독될 일도 없었다.

단지 비싼 등유로 한겨울 내내 따뜻한 집을 유지하기는 쉽지 않아 몇 시간을 돌려도 

크게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 집에서 해마다 겨울을 나야 했다.

그때는 그게 당연한 줄 알았고 불평도 안 했다.


한 겨울  두꺼운 이불을 들추고 들어갔을때의 그 차가운 감촉은 아직도 생생하다.

서걱이는 얼음부숭이같이 차가운 이불은 우리들 체온으로 따뜻해질 때까지 오돌오돌 떨기를 감내해야했다.

자고 일어나면 항상 코 끝이 시렸던 것도 빠질 수 없는 겨울 풍경이다.


시험 기간에 책상 앞에 앉아 시험공부를 할 땐 어김없이 다리와 어깨가 시려

두꺼운 옷에 무릎담요는 필수였다.


그게 당연했고

비싼 기름을 태워하는 난방엔 인내심이 필요하다 여겼다.


그 집터에서 부모님은 집짓기 전과 후 통틀어 50년 가까운 세월을 지내셨다.


아버지의 흥한 모습도 , 안 좋은 기억도,

딸들 셋이 모두 함을 받는 것도  

그 집에서 이뤄졌다.


부서지거나 고칠 곳이 있으면 아버지의 손으로 다듬어져 새로운 모습으로 바뀌고

손주들의 출생즈음엔 새롭게 도배를 하며 집을 깨끗하게 꾸미기도 하셨다.

새 생명 맞이엔 돈을 아끼지 않으신 거다.


새 집이었던 느낌은 점점자취를 감추어갔지만

아이들의 웃음과  성장을 통해 그 집은 즐거움이라는 덧께를 하나 더 안게 되었다.


아파트 왕국인 한국에서 아파트를 마다하는 아버지의 성정으로

엄마는 말도 꺼내지 못한 채

여름엔 더 덥고

겨울엔 더 추운 주택에서 부모님은 그렇게 긴 세월을 지내오셨다.


노인 두 분이 사는 곳, 돈푼께나 만졌던 분

어찌 알고 엄마가 은행에서 돈을 찾아와 장롱 깊숙이 넣어두고

시장에 잠시 다녀온 날


온 집안은 숙대밭이 되어 있었다.


따로 사는 딸에게 말도 못 하고

그저 무섭고 떨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언제나 당신의 안식처였던 집은 자식들의 부재를 느끼게 하고

낡음을 인정하게 했다.


우리가 지내던 2층은 비워둔 채 창문에 신경을 덜 썼던 게 화근이었다.

몇 십년을 지내오며 누군가가 집에 침입하는 건 불가능하다 여겼다.

내가 한평생 지내던 곳이라서 안심했던 게 일을 내고 말았다.


아버지는 집 안 곳곳을 감옥 창살처럼 닫아걸고

통유리로 되어 있던 현관 입구도 커다란 쇠문으로 교체하셨다.



궁을 개방해 인간의 발길이 끊이지 않게 해야하며

꾸준한 보수작업이 이뤄지지 않는다면  망가지고 말거라는 말을 자주 들어왔다.

지금 내가 보는 궁의 단정한 모습은 관리자들의 피땀으로 보존되고 있는 터일 것이다.


집이란 것이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으면 어느샌가 쇠락의 길로 접어들어

못쓰게 되어 버리고 마는데.


하지만 언젠가부터 아버지는 더 이상 집에 정성을 들이시지 않았다.

나이가 들면  당신한테는 돈을 들이기 싫어하는 마음일 수도 있고

다른 불편함이 없으니 그냥 이렇게 지내다 가지 뭐,,,라는 마음인지도 모르겠다.


해마다 명절이 되어 들른 집은 부모님의 모습을 닮아 가고 있었다.


주변 100미터 내에선 없었던 이쁜 우리 집은

새로 지어진 신축건물들에 둘러싸여 빛을 바라고

곳곳이 낡고 지저분해 부모님 건강이 염려될 지경이었다.


딸들의 성화에도 불구 아버지는 이사를 원하지 않으셨고

집을 사드릴 형편도 안 되는 딸들은 안타까운 시간만 보내고 있었다.



선택의 다른 이름은 포기



아버지는 자신의 고집스러움이 아내를 힘들게 하고 평생을 후회하게 할 것을 짐작이나 했을까!


부모님은 당신이 다치는 일이 생겨도 딸걱정에 얘기하기를 꺼리신다.


엄마가 쓰러져서 병원에 다녀오셨다고 했다.

넘어지면서 머리를 다쳐서 멍이 좀 들었는데

엄마가 입원을 마다해서 약만 처방받고

집에서 요양 중이시라고 했다.


전화를 통한 목소리가 떨리고 약간 어눌하다는 느낌은 나만 그랬을까.


괜찮다 하시니 그런 줄 알았고 병원 외래 진료는 꼭 다녀오시라는 당부만 할 뿐이었다.


엄마는 하나쯤은 항상 주머니에 감추며 말하는 버릇이 있다.


이해할 생각도 없고 딸에 대한 배려라기보다 가끔은 염려되는 습관이다.

아플 때는 아프다고 말하고

안 좋은 일이 있으면 제때 알려주셔야 하는데

엄마는 항상 일이 일어나고 정리가 되어야만

그때 그랬어.. 지금은 괜찮아,라고 안심시켜 주신다.

모든 걸 인내하고

나만 좀 참으면 만사가 편하다는 세월의 가르침을 항상 실천하시는 분이라서 그런가 했다.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다.


몇 년 전 화상을 입어  온몸에 수포가 올라와도

난 괜찮아. 희한하게 안 아프네.

를 연발하던 엄마. 그런 엄마에게 달려갈 수 없으니 짜증 섞인 말만 하며 병원 가라는 말만 연거푸 해댔었다.


그렇게 참고 견디던 엄마는 뇌출혈을 오롯이 당신의 극기(?)로 맞서고 있었다.


괜찮지 않았고

괜찮지 않다고 말해야 했고

당신이 안 좋다는 걸 딸들이 알게 했어야 했다.


구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향한 엄마가 어느 정도 안정을 찾으신 후

언니가 전화를 해주었다.


아버지가 우시더라고 했다.

그 듬직하던 아버지가 전화에 대고 엄마가 쓰러진 것을 미안해하며 우시더라고 했다.

나보다 먼저 가면 안 되는데 라며 우시더리고 했다.


겨울이면 추운 집은 방 한 칸에서만 동선이 허락되었다.

가스난방으로 바꾼 뒤에도 썰렁하게 큰 집은 ,

난방비가 아까운 엄마는,

전기장판 위에서 거의 하루 일과를 다 하셨다.

웅크리고 껴입고 지낸 겨울 동안

우리 딸들은 난방이 너무 잘되는 아파트에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를 때까지

보일러를 틀어댔었다.



부모님은 새로 집을 사는 걸 망설이고 계셨다.

살던 곳을 떠나길 원하지 않으셨다.


우리가 살던 동네 근처의 신축 아파트를 보고 온 날 엄마는 아이처럼 즐거운 표정이셨다 한다.

어르신들은 낮은 층을 선호한다고 알고 있었는데 오히려 엄마는 높은 층이 더 좋다고 하셨다 한다.


상기된  얼굴로

 `싱크대에 인덕션은 불편해.들어내고 싹 다 고쳐야지.`

`화장실 ,남이 쓰던 건 안할래.다시 수리하는 게 좋겠어`

저렇게 흥분된 얼굴을 보이시는 게 정말 오랜만이라고 언니가 전해준다.

원래 한 깔끔하던 엄마는 아버지의 고집 아닌 고집으로 

그동안 깊이 감춰뒀던 속내를 맘껏 드러내고 계셨다.

그런 모습이 하나쯤  숨겨두는 엄마보다 훨씬 고맙다.


그렇게 언니의 주도로 2월이면 아파트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그 동안 언니는 사업이 잘되어 제법 큰 돈을 모으게 되었다.감사한 일이다.)

멀리 있는 내가 해 드릴 일은 약간의 지원뿐이지만

모든 일은 언니의 일임으로 진행되었다.

맏아들 같은 든든한 지원에 고마울 따름이다.

아들도 못 해 드릴 일을 언니의 힘으로 하고 있다.


이제 더는 한 겨울 추운 날씨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얇은 티셔츠를 입고 덧신을 신지 않아도 부모님은 따뜻한 겨울을 보내실 수 있다.

웅크리고 종종거리다 더 이상 넘어질 일도 

화상을 입어 긴 시간 고통을 견디지 않아도 되게 되었다.


마다하던 아버지의 고집을 꺾은 건 엄마의 잦은 다침 사고였지만

이젠 정들었던 집을 뒤로하고

아버지도 엄마도 따뜻한 곳으로 이사를 준비하고 계신다.


부디 , 새 집에서 건강하게 오래 사시길 기도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