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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득 Oct 07. 2024

물건들이 말을 걸었다.

물건들이 자꾸 말을 거는데 어떻게 버리라구.

나는 아무래도 물건 친화적인 인간인 것 같다.

집에 있으면 자꾸 물건들이 내게 말을 걸어온다.


오늘은 아이가 내민 백원짜리 동전이 말을 걸었다.


"이봐. 내가 저 안에 3년이나 갇혀 있었다고. 얼마나 답답했는지 알아? 그동안 물가는 또 얼마나 올랐겠냐고. 내 가치가 그만큼 떨어졌을 거 아냐. 참 어떻게 그렇게 무심한 건지 너무 한 거 아니냐고. 도대체 3년 동안 뭘 했던 거야? "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았던 아이들의 장난감 블록을 꺼냈다. 3년. 그래. 3년 동안 뭘 한 건지? 아이들이 이 장난감에게 소홀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바쁘다는 핑계로 내버려 두었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한 번씩 이 장난감 블록이 보일 때마다 여러 가지 마음이 지나갔을 테다. 그러다가 이제야 이 장난감과의 정을 끊어버리겠다고 큰 마음을 먹은 것이다. 버리자니 아깝고 누군가를 주려면 씻어야겠다는 생각에 장난감통을 거꾸로 뒤집어 쏟아놓았는데, 그중 네모난 박스 모양으로 만들어진 블록 안에서 짤그랑 거리는 소리가 났다.


아이에게 뭐가 들어있는 것 같다며 열어보라니, 동전이 나왔다. 3년 전 어느 날에 일곱 살 아이는 블록으로 네모난 저금통을 만들어 백원짜리 동전을 넣어두었던 모양이다. 아이가 건네준 3년 만에 만난 뿌연 회색빛 백원은 1982년생이었다.


1982년생 백원짜리 동전을 보자마자 내 어린 시절이 눈앞에 펼쳐졌다.

1980년생 내 남동생은 엄마만 보면 손바닥을 들이밀고, "엄마, 백 원만!"을 외쳤다. 그러면 엄마는 "없어!"라고 매몰차게 이야기하곤 했다. 백 원으로 오락실에 가거나 새우깡을 사 먹을 게 뻔했다. 300원어치 콩나물 살 돈도 아까웠던 노랑이구두쇠 엄마는 어디에 쓸 건지 묻지도 않고 대번에 거절하며 남동생을 흘겨보았다.


백원으로 할 수 있는 것이 너무 많았다. 백원만 있으면 오락실에서 오락도 할 수 있었고, 신호등 사탕 하나와 말캉한 사과맛 젤리를 사 먹을 수 있었다. 태권 V 판박이가 들어있는 다디단 풍선껌을 사서 씹을 수도 있었다. 떡볶이가게에선 백원을 가져가면 떡볶이떡 10개를 주셨다. 백원을 가지고 동네 문방구나 마트에 가면 살 수 있는 것들이 널려 우리는 눈이 반짝반짝, 부러울 것이 없었다. 아마도 그 시절 부모님께 제일 많이 했던 말은 "엄마, 백원만"이 아닐까. 오죽했으면 빡꾸가 개그 프로그램에 나와 "백원만"을 외쳐대며 인기를 얻었을까 말이다. 모두 백원만을 외치던 그 시절을 기억하기에 공감을 얻었을 것이다. 용케 백원을 손에 얻은 동네 아이 하나가 새우깡을 손에 들고 으스대며 하나씩 입에 넣다가 떨어뜨리기라도 하면 얼른 주워 툭툭 털어 눈치 보며 입에 넣던 내 동생, '아 진짜 내가 먼저 봤어야 하는데..' 하고 아쉬워하던 다른 아이들, 그 새우깡 하나에도 우린 행복했다.


그나저나, 이 백원은 어디를 그리고 누구를 거쳐왔을까. 참 많이 사랑받던 시기에 태어나 바쁘게 이손 저손을 옮겨 다녔겠지. 아마도 어린 꼬마들의 손에 많이 다녀가지 않았을까.

"너를 애타게 찾던 어린 꼬마들은 어느새 중년의 어른들이 되어 있단다. 세상이 참 많이 바뀌어서 이제 너 같은 동전은 많이 사용하지도 않는단다. 꿈에서도 "백원만"을 외치던 내 동생은 그렇게 돈을 좋아하더니 어느덧 남들에게 사장이라 불리게 되었어. 너를 기억이나 할까. 너랑 같은 또래라 그런지 이상하게 정이 많이 가는구나. 오랜만이다 이 느낌. 백원을 손에 쥐어 본 지 참 오래되었어. 오늘은 그 옛날 언젠가처럼 너를 꼭 손에 쥐고 잠에 들어볼까. 밤새도록 어린 시절 잊었던 기억을 좀 되찾아줄래? 그땐.. 가진 건 많이 없었지만, 참 좋았었거든."


내가 1982년 생 백원을 만나 달콤한 상념에 빠져있을 때 천원짜리 지폐를 좋아하는 나의 아이는 자신이 넣어놓은 백원은 본체만체 오랜만에 만난 블록에 관심을 가졌다. 칼과 방패, 투구와 갑옷을 만들어 몸에 걸치고 뽐을 냈다. 미숙하던 예전의 블록 만들기 기술은 세월과 함께 어느새 능숙해졌다. 손가락 힘이 없던 아이들이 관심 갖지 않아 한 곳에 밀쳐놓았던 블록이 이제야 빛을 발하는 것 같았다. 다 가지고 놀았으면 블록박스에 넣자고, 다른 사람에게 줘야겠다고 말한 것도 잠시 아이는 자신이 완성한 투구와, 칼, 방패를 자신만 볼 수 있는 은밀한 곳에 숨겨놓았다.


"거봐. 나는 지금 떠날 때가 아니라구. 아직도 이렇게 사랑받는다구" 

은신처에서 편안히 숨어있던 블록이 나에게 들키자 삐죽한다. 


그래, 아직은 너도 떠날 때가 아닌가 보다.

미련이 한가득인 나는 오늘도 물건과의 이별을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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