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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선뜻 나의 삶에 낙이 되어 준다면

by 호현글방

한 사람이 가지는 존재의 가치는 '내가 선택한 적 없는 세상에, 시기에, 시간에, 이 모습으로 태어난 것만으로 충분하다'라고 생각한다. 태어났으니 무엇이라도 해야지-라던가 삶에서의 의미를 발견해야지 하는 생각은 태어난 것 자체로 그 값을 다 한 인간의 오만함이라고 생각한다. 이 세상에 내 의지 없이 내던져지듯 태어났으니 그것으로 존재의 의미와 가치는 이미 다 한 것이다.


그런데 삶의 낙은 전혀 다른 층위의 것이다. 그것만은 삶에 있어주어야 하는, 삶이 '살아있는 동안'이라는 일정한 기간의 시간을 뜻할 때의 필요충분조건이다. 낙이 없다는 것은 삶을 이어갈 의지와 마음, 열정과 이유가 없다는 것과 동일한 말이고 낙의 유무는 주체적인 삶과 삶의 형태를 결정하는 데에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이다. 즉 내가 태어난 이유나 내 존재의 가치, 의미 같은 것은 인간이 '살아있는 동안의 시간'을 소화하는 데에 아무런 영향이 없지만 삶의 낙은 그 시간의 길이를 극단적으로 짧게 만들 수 있는 중요한 결정 요소이다.


내가 그것을 온몸으로 느꼈던 건 28살 초봄이었다. 긴 겨울이 채가시기 전의 봄, 기억나지 않는 곳을 가기 위해 도로를 천천히 걷던 나는 문득 길 끝에 선 커다란 벚나무가 찬 바람에 벚꽃 잎을 힘껏 날리는 걸 보며 이대로 내가 물거품이 되어 저 꽃잎들처럼 세상에서 사라지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고 그 생각을 쉽게 떨칠 수 없어 한참을 우두커니 서 그 기다란 벚나무를 바라보았다. 살아야 한다는 근사한 이유를 생각해 보았으나 손뼉을 칠 만한 이유는 좀체 떠오르지 않았*다던 어느 시인처럼. (*살아야 한다는 근사한 이유, 여림.)


태어난 것으로 값을 다 하였으니 무얼 더 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회의에 발끝이 퉁퉁 불도록 잠겨 있던 나는 치료를 시작했고 약은 많은 걸 괜찮게 했지만 존재 깊이 연결된 회의감의 뿌리를 해결해주지는 못했다. 육체가 갑갑했고 답답했다. 막연한 자유가 아닌 지금을 알 수 없기에 지금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었다. 수면의 파도가 잔잔해도 그 안의 바다는 쉼 없이 움직이고 섞이는 것처럼, 의식의 외면은 그럴싸해졌지만 내면은 여전히 내 몸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는 욕망과 매분 매초를 싸우고 있었다.


내면에서 일어나는 전쟁은 창밖의 소음이 이따금씩 들리는 고양이 울음소리 말고는 어둠의 침묵만이 유일한 늦은 밤이 되면 늘 고비를 맞았다. 파란색 란셋을 잡고 커다란 창으로 밤하늘이 가득 들어찬 방에서 몸을 긁었다. 잠들어 있는 많은 사람을 깨우지 않기 위해 입을 꽉 다물고 최선을 다 해 울며 긋지 않고 긁기 위해 애썼다. 그렇게 한참을 울다 문득 정신이 맑아져 이제 자야지, 하고 베개에 얼굴을 묻으면 전쟁의 포상처럼 내일은 다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이 머릿속을 천천히 채웠다.


만약 타인과의 전쟁이 타인을 내 인생에서 단절시킴으로써 해결할 수 있다면, 내 자신과의 전쟁은 단절이야말로 모든 항복의 끝이며 종전이 아닌 새로운 전쟁과 끝이 나지 않는 고통의 시작이다. 그렇기에 매일 나는 매일 밤 일어나는 전쟁을 막지는 못해도 끝내 지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알 수 없음과 그래도 나를 살게 할 뭔가가 있겠지 하는 얕은 기대 사이를 오가며 분투했다.


내 인생을 오랫동안 지배하며 지독하게 나를 괴롭힐 것 같던 그 분투를 끝낼 수 있는 해결점은 예상치 못한 곳에 있었다. 그쯔음 과외를 위해 일주일에 3번은 오가던 2호선으로 강북-강남을 건널 때면 보이는 끝이 아득한 한강의 물줄기, 그 위로 쏟아지는 햇볕과 종종 그 주변을 뛰는 사람들의 모습. 하늘에 가득 찬 구름과 한적하게 흘러가는 시간들. 세상 어떤 곳보다 풍요로운 풍경이었다. 어느덧 나는 그 구간을 지나는 것을 기다리게 되었고, 나중에는 그 구간을 지나며 작은 소원을 빌기 시작했다. 아프지 않게 해 주세요. 현명하게 해 주세요. 비가 쏟아지는 궂은날에도, 어두운 구름이 낀 날에도 풍요로운 풍경에 대한 기억은 늘 선명했다. 그렇게 '아 그래도 이걸 보려면 살아야지'하는 마음이 무거운 추처럼 떠올랐다. 세상 어느 것도 줄 수 없는 이 풍요와 아름다움을 자연이 주는데, 내가 죽으면 이걸 보지 못하는구나.


그러고 나니 내가 굳이 죽어 보지 못하기에는 소중한 것들이 조금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하얀 아빠 강아지와 갈색 엄마 강아지 사이에 태어나 어릴 때는 구구크러스트처럼 온몸이 라떼색인데 배와 턱은 하얀 털이 가득 자라 있고 이마에는 해리포터의 흉터처럼 하얀 털 자국이 있는 우리집 강아지 나루 라든가. 겨울에 내린 하얀 눈이 가득 채운 한강의 모습이라던가. 작고 조용한 텃밭에 가득 들어차 생명을 나누고 있는 봄의 볕이라던가. 다 보고 나면 꼭 눈물이 주룩 흐르는 로마의 휴일이라던가.


그렇게 차근차근 하나씩 죽어 못 보면 아까운 것들을 발견하다 보니 세상에는 제법 아름답고 쓸모없는 것들이 많았다. 사실 쓸모 있지만 아름다운 것들이었는데, 내 눈에는 무용하고 아름다워 정감이 가는 것들이었다. 그래, 내가 저것을 보려 살지. 그 생각을 하니 내 존재의 이유나 가치가 무엇이든 저걸 보려 하루 더 사는 건 괜찮은 것 같았고 제법 좋은 하루인 것 같았다. 그렇게 삶의 낙이라 부를 것들을 하나둘 채워갔다.


그러다 어느 사이 그 낙에 사람들도 들어오기 시작했다. 때 되면 꼭 나를 보려 하는 사람, 때 되면 꼭 편지를 부쳐주는 사람, 때 되면 밥을 먹이는 사람, 눈을 보면 내가 얼마나 사랑받고 있는지 알게 하는 사람, 지치고 피곤한 하루 끝에서 그 모든 걸 눈 녹이듯 사라지게 하는 사람, 내가 아프면 나보다 더 괴로워하는 사람.


각기 다른 사람들의 조각이, 마음이 하나씩 모여 삶의 모양을 만들자 나는 4년 만에 우울증 고위험군에서 내려올 수 있었다.


사람마다 삶에 낙이라 부를 것은 다르다. 그게 무엇이든 어떤 것이든 중요하지 않다. 그게 있다는 사실만이 인간에게 필요로 한 것이고, 삶을 지탱할 힘을 가졌다는 것을 증명한다. 누군가는 사랑하는 자식이, 연인이, 친구가 삶의 낙일지도 모르겠다. 인간이 다른 사람을 구원할 수 있다는 믿음을 나는 절반 밖에 믿지 않지만, 당신이 선뜻 나의 삶에 낙이 되어준다면 그것은 당신이 이토록 아름답고 죽어 다시 보지 못하기에 아까운 것이라는 뜻일 것이다.


우리는 어찌저찌 살아갈 것이다. 엉망진창이어도, 완벽하게 실패해도, 어영부영이라도 살아갈 것이다.

당신이 기꺼이 내 삶의 낙이 되어준다면.

내가 내 삶의 낙으로 기꺼이 사랑할 것을 찾을 수만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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