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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언젠가 나를 위해 꽃다발을 전해주던 그 소녀

by 호현글방

평생 단발머리는 하지 않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아니, 평생 단발머리는 못하게 생겼네 하던 때가 있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장발이든 차라리 완전한 쇼컷이든 단발은 절대 아니라고. 그리고 정말 간절히 바랐다. 결코 다시는 내 연인이 누구를 사랑했는지, 사랑했던 사람이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 알지 않으리라고. 물론 알고자 노력한 적 없이 성당의 신부님이 고해성사받듯 '알게 된' 것이었고 그래서 내게는 그야말로 Too much information이었지만. 그러니까 어른이 되어 시작한 첫 연애 상대의 첫사랑이 단발머리의 제비꽃 향기를 풍기던 소녀였다 같은 그런 정보는 내가 앞으로 어떤 사람을 만나 연애를 하거나 사랑을 하든 내가 묻기 전까지는 절대 알게 되지 않게 해달라고.


원래 그런 소망이나 바람은 바라는 족족 빗나가주는 게 인생의 법칙이랄까. 멀쩡한 다트판을 두고서 애꿎은 벽이나 바닥에 내리꽂는 플레이어들처럼 죄다 내 소망을 빗맞혔다. 기분이 좋아서, 술에 흥이 올라서, 그냥 내 자신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어서, 추억을 이야기하다 보니 내 촉에 걸려서 등등 이유는 다양했고 끝없이 변주했지만 결과는 똑같았다. 그런 이야기는 내게 마치 체크아웃 1시간 전에 걸려오는 콜과 같았고 그걸 들은 시점을 기점으로 빠르고 차갑게 식은 마음은 빠르게 퇴실을 준비했다. 그리고 잘 준비된 퇴실자는 방을 돌아보지 않는 법이었다.


그래서 정말로 평생 단발머리를 하지 않았느냐, 고 한다면 다짐에 무색하게 거의 그 연애를 끝내자마자 머리를 잘랐다. 퇴실한 마음이니 연연할 것도 없었고 긴 머리가 거추장스러워 미용실에 가 최대한 짧게 잘라달라고 했다. 헤어디자이너는 후회할 것이라며 나와 기장을 두고 딜을 보고자 했지만 해맑게 웃으며 "쌤 마음대로 예쁘고 짧게 잘라주세요."라고 하자 오히려 결연해진 얼굴로 내 귀밑에 가위를 대고 싹둑싹둑 자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난 그 디자이너 쌤의 단골이 되었고, 짧은 머리에 만족해 종종 단발머리를 하고는 했다. 단발을 한 내 모습이 예뻤거든.


이전의 흐름이나 만남을 끊어내듯 생에 첫 단발머리를 하는 세리머니 후에 어쩌다 저쩌다 알게 되는 여러 TMI에 대한 대처나 태도가 달라졌는가? 한다면 딱히 그렇지도 않다. 그냥 내성이 생겼고 그것만으로 퇴실을 준비하지는 않게 되었달까. 이건 내가 어찌 노력한다 해서 될 일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달까. 유호진 PD의 말처럼 연애는 그 사람의 세계가 내게 오는 것이고 그 세계 안에 있는 무수한 기억과 생김새와 사랑과 추억과 짙은 아픔과 연민과 동정과 미련을 김밥에서 단무지를 골라내듯 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 그냥 그 모든 걸 맛깔나게 비빈 비빔밥처럼 여기거나 셈 없이 끌어안고 여러 갈래로 터지는 감각들을 무시한 채 사랑하는 사람에 집중하면 되니까. 사랑은, 그렇게 온전하고 큰 너와 나의 세계가 천천히 스며 하나가 되는 거니까.

(그리고 사실 첫 연애 상대의 가장 큰 실수는 단발머리 첫사랑 소녀 이야기를 하면서 내게 '머리 단발로 해보지 않을래?'라고 물은 것이라 사실 애초에 나는 그런가 보다 무던하게 넘어갈 수 있었던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아닌 게 아니었던 것뿐인.)


그럼에도 여전히 생각지 못하게 터지는 지뢰처럼 그 후에도 느닷없이 나타나는 TMI는 여전히 존재하고 그 난이도가 수직상승할 때도 있다. 인터넷에서 무얼 검색하다 어이없게도 두 사람의 사진을 보게 된다거나 우연히 펼친 책에 적힌 편지를 보게 된다거나. 지인들 사이에서 내 존재를 잊고 떠드는 말들을 듣게 된다거나 저도 아니면 알게 된 이유를 파악하기도 전에 알게 된다거나. 그럴 때면 이제 굳이 모든 걸 알려고 읽으려 하지 않고 닫고 덮고 입을 다물고 잠시 멍하게 뇌를 식혔다가 흥얼거린다.


그 언젠가 나를 위해 꽃다발을 건네주던 그 소녀-

오늘따라 왜 이렇게 그 소녀가 보고 싶을까-.

나도 누군가에게는 그런 단발소녀겠지 하는 마음으로,

퇴실 준비 대신 그때의 사랑이 부디 즐겁고 행복했길 바라면서,

조금은 쪼잔하게 그 사랑의 크기가 지금의 나보다는 아니길 덤으로 바라주면서.


내 마음 외로워질 때면 그날을 생각하고 그날이 그리워질 때면 꿈 길을 헤매는데-... 으으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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