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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이 세상에는 쿤이가 없어

너무 너무 사랑스럽고 세상에서 가장 멋진 말티즈였던 쿤이에게

by 호현글방

2024년 7월 17일 강아지별로 여행을 떠난 우리 쿤이를 위해.


맑고 초롱해 거울처럼 눈을 마주하면 나를 보여주던 너의 눈이 조금씩 하얗게 탁하게 번져가기 시작했을 때에도

너는 내 발걸음 소리, 내 목소리에 바짝 고개를 들고 내가 어디에 있는지 얼굴로 방향을 찾으며 날 반겼어.

앞이 보이지 않아 나에게 오는 길에 우뚝 서서 여기가 어디일까 하는 얼굴로 가만히 서있다가도 다시 한 걸음,

여기저기 콩콩 부딪히면서, 무엇에 부딪혔는지 몰라 가만 서있다가도 한 걸음, 그렇게 서툴게 느리게 내게 왔어.

있잖아, 이렇게 말하면서 내가 알게 된 것은 무엇이냐면,

너는 보이지 않는 앞길에 무엇이 있을지 어떤 것에 부딪힐지 알 수 없는 두려움 속에서도 내게 왔다는 거야.

얼마나 아플지, 어떤 게 나를 막을지 알 수 없는 컴컴한 길을 너는 오직 나를 위해 걸어서 왔다는 거야.


내가 고등학교 1학년쯤, 네가 14살이니까, 아니 15살이구나.

내 손바닥만 한 하얀 말티즈가 꼬리는 쪼록 감겨서 너무너무 예쁜 검정 눈으로 여기저기 겁도 없이 내 방을 오갔어.

그 옆에 조금 겁먹고 가만히 앉아 있는 나루의 기다란 꼬리를 입안에 가득 물고 늘어지는 장난도 쳤지.

부산에 있는 이모네 집에 갈 강아지였으니까, 그때의 너는, 아무런 이름도 붙여주지 못하고 그냥

너무 예쁘고 사랑스런 새끼 말티즈였던 너는 내 방에서 그렇게 일주일을 머물다 떠났어.


그렇게 명절이나 방학이면 부산에 건너가 너를 볼 수 있었고 너는 여전히 나루를 기억했고, 우리 가족을 기억했지.

너는 사람 팔뚝을 내주어야 품에서 잠이 들고, 어린 아가들의 애착 이불처럼 작은 회색 비니를 입에 물고 다녔어.

크다고 해봐야 아이패드만 한 작은 말티즈인데도 산책길에 만나는 큰 강아지를 보면 꽝꽝 짖으며 대장 노릇을 했고

그러다 너가 수세에 몰리면 근처에 있던 나루가 달려와 너를 지켜줬다.

너랑 나루는 같은 집에서 하루 차이로 태어난 사이니까, 그러니까 형제니까, 너는 나루를 참 좋아했어.

나루는 너를 귀찮아했지만 너는 아빠가 너를 두고 나루만 데리고 등산을 가면 아우우 울면서 기다렸잖아, 그치?


그러다 사촌 큰언니가 임신을 하고, 어쩌다 네가 다른 사람 집에 간다는 소식을 듣고

우리는 너를 우리 집에 데려왔어. 그때 네가 5살이었던가?

길거리에서 항상 대장노릇을 하는 멋진 말티즈 답게 너는 우리 집에 이사 와서도 금방 적응했고

특히 아빠의 팔뚝 안에서 노곤 노곤히 잠드는 걸 좋아하는 우리 집 막내가 되었지.

베란다에서 뜨끈한 햇발이 몰려 들어올 때면 너는 꼭 그 안에 들어가 갓 쪄낸 찹쌀떡처럼 퍼져 긴 낮잠을 잤지.

그때부터 너의 눈을 뭐라도 가려줄 걸 그랬나 봐. 백내장이 제일 첫 번째로 너를 힘들게 할 걸 알았다면 말야.


대장 같은 말티즈였지만 너는 너무 사랑스럽고 여린 아가였어.

한 번도 널 혼낼 일이 없었지. 나루는 나랑 엄청 싸우고 혼나고 그랬거든.

물론 네가 견춘기라는 1~4살 시기를 다 보내고 와서였을지도 모르지만, 넌 집에서는 참 얌전했어.

자기보다 4배는 큰 나루와 공놀이를 할 때면 누구보다 열심히 작은 자기 공을 물고 와 던져 달라고 했지만

그전에 네가 먼저 놀아달라 보챈 적이 없었지. 그저 만져달라, 옆에 있어달라 애교를 부릴 뿐.


사실 이제 네가 어떤 강아지였는지, 내게 어떤 동생이었는지, 어떤 애기였는지는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아.

네가 대장이 아니었어도 네가 장난감을 잔뜩 물어와 놀아달라 했어도 네가 곁에 못 오게 했어도 예쁜 쿤이니까.

그냥 너를 보내고 떠올리는 너는, 뽀얗고 하얀 털에 작은 몸집, 이것저것 많이 먹고 싶어 하지만 알러지가 있는,

깡깡 짖기도 하지만 사실 너무 여리고 귀여운, 가만 보고 있으면 사랑스러워서 웃음이 나는 그런,

너무 사랑스러운 쿤이었어.


네가 일주일 곡기를 끊었다 했을 때 널 품에 안고 널 몇 번을 불렀어. 네가 반응을 하지 않아서.

네가 몇 번을 부른 내 목소리를 듣고 힘들게 고개를 들었을 때는 내 목에 가만 입을 가져다 두었다.

예전 내게 뽀뽀를 해주던 그 모습처럼. 아무리 맛있는 걸 주어도 입을 열지 못하는 너에게 그 동작은

내게 표현할 수 있는 최대의 사랑이란 걸, 반김이라는 걸, 기억하고, 듣고 있다는 표현이었고 마음이었고

너는 온몸의 통증에 밤새 잠들지 못하던 그 순간까지에도 내게 뽀뽀를 해주고 싶었던 거야.


안락사를 앞두고 깨끗하게 목욕을 한 네가 아빠 품에 안겨 있을 때 웃지는 못해도 웃고 있는 듯한 얼굴이,

너무 새하얗고 멀겋게 아무것도 모르는 그 얼굴이 여전히 쿤이어서 누나는 다행이다 생각하면서 울었어

그래도 아빠 품이라서 네가 좋구나, 그래도 아빠 냄새가 나고 아빠 체온이 있어서 기분이 좋구나.


너의 털 10가닥이라도 모아달라고, 널 닮은 인형을 만들 때 쓰겠다고 했지만 아빠는 모아주지 않았어.

매정한 게 아니라는 걸 쿤이 네가 제일 잘 알 거야.

아빠는, 부러 매어두지 않고 잘 보내주고 싶은 마음이니까. 누구보다 널 더 곁에 두고 싶었던 마음이니까.

그런데 쿤아 누나는 그게 너무 슬펐어.

널 어디서 기억해야 하지? 널 어디서 보고 싶을 때 찾아야 하지?


너를 강아지별로 긴 여행을 떠나보낸 날 저녁

과외 수업을 하러 가는데, 그 길에 우리 집 근처에 있는 큰 랜드마크가 보였어.

그걸 보는데 우리 집이 생각나고 그래서 네가 생각나고 그런데 너는 강아지별로 여행을 오늘 떠났고

그래서 알게 된 한 문장을 되뇌면서 엉엉 울었어. 엉엉 울면서 걸었어.


아, 이제 이 세상에는 쿤이가 없어,

이제 쿤이가 세상에 없어,

네가 이제 없어.


쿤아 네가 없다는 건 무엇을 뜻하는 걸까?

쿤아~ 하고 보채는 너를 부르는 아빠의 목소리도, 쿤아~ 하고 널 부르는 엄마의 목소리도

쿤이~ 하고 잠든 너를 깨우는 목소리도 이제 세상에 없다는 걸까?

아니면 사료 냄새에 허겁지겁 밥을 먹는 너를 보면서 그러다 얹힐라 노심초사 걱정할 일이 없다는 걸까?

아니면 목에 뽀뽀를 받고, 네 뜨끈하고 작은 머리에 뽀뽀를 하고, 가만히 조는 널 구경하는 일이 없다는 걸까?

쿤이야~ 하고 부르면 고개를 들고 나를 보려던 네가, 쿤이야~ 하면 졸망졸망 뛰어오던 네가,

잘 때가 되면 자기 몸만 한 회색 비니를 물고 잘 곳을 찾아 팔뚝 사이로 기어들어오던 네가,

새벽이면 종종 일어나 주변을 구경하고 다시 잠드는 네가 없다는 걸까?


있잖아, 쿤아,

누나가 더 많은 사랑을 주지 못해 미안해.

네가 얼마나 예쁘고 사랑스러운지, 얼마나 착하고 얼마나 멋진 말티즈인지,

내게 얼마나 와줘서 고마운 강아지이고 동생이고 가족인지 그걸 더 알려주지 못해서 미안해.

그 작은 몸으로 혼자 아픈 걸 견디면서 말도 못 하고 가만히 청하는 병잠을 더 일찍 깨워주지 못했어서 미안해.

그리고 이 넓은 지구에 이 큰 세상에 우리 가족에게 막내 쿤이로 와줘서 고마워.

가리지도 따지지도 셈하지도 재지도 않는 사랑을 가르쳐주고 알려주고 품에 가득 안겨주어서 고마워.

네가 없다는 건 내게 언제나 함께였던 무한한 사랑과 조건 없는 애정이 없다는 거야.


꼭 나중에 마중 나와줘.

강아지별에서 멋진 대장 말티즈 하다가, 먹고 싶은 거 잔뜩 먹고 편하게 자고 공놀이도 실컷 하다가

나루가 없어서 조금 외롭고 낯선 강아지들이 어려워도 넌 세상에서 가장 멋진 말티즈니까,

많이 많이 행복하고 많이 많이 즐겁게 지내다가 누나를, 나루를, 엄마를, 아빠를 마중 나와줘.


사랑해, 내 작은 멋진 말티즈 쿤이야.

이제는 멋진 강아지별에 잘 도착해 쉬고 있길.

꿈에도 나와줘, 얼마나 즐거운지 행복한지 꼭 자랑해 줘.

사랑해 쿤.


-너의 누나가, 모든 가족의 사랑을 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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