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이 바퀴에 올라탄 것은, 그러니까 험준한 산맥이 바다, 강, 하천과 함께 흘러 둥그런 바퀴가 몇 리 가지도 못하고 부서져 맥을 못 추는 이 땅에, 그러기에 사람이든 물건이든 수운으로 옮기는 것이 현명했던 시절을 지난 후 나라의 문호를 열어 외국의 것들이 들어오기 시작하던 쯤 조선에 머물게 된 러시아 대공의 짐이었다. 다른 마차의 바퀴들은 무게가 상당한 군수품들이 주인이었기에 바퀴의 입장에서는 행운이었다. 대공과 대공의 부인의 옷가지, 책과 간식거리가 대부분이었던 덕에 바퀴의 첫 기억은 꿀에 재운 케이크의 달콤한 냄새와 낯선 복식이었다. 그 후 대공이 이 땅에 머문 12년 동안 바퀴는 수많은 것들을 옮겼다. 대사들의 모임에 초대된 부인을, 러시아에서 보내온 물자를, 부인이 황실에 보내는 간식 같은 것들이 주였다. 시간이 흘러 러시아 대공이 돌아가게 되었을 때 이 바퀴는 대공의 부인이 가까이 지냈던 양반댁 부인에게 선물로 건너갔다. 그 덕에 한강의 하류에서 도성으로 긴 거리를 오가며 산이 깎이고 흙길이 다져지는 풍경을 담고, 진탕과 물을 오가며 단련이 된 바퀴는 도성에서 도성으로, 짧은 거리를 오가며 지냈다.
그렇게 올라탄 것이 짐에서 사람으로 옮겨지면서 바퀴를 이끄는 것 또한 말에서 인간으로 변화했다. 먼 거리를 다니지 않게 되었기에 바퀴를 이끄는 것은 양반댁 부인의 하인이었고, 말이 아닌 사람에 익숙해지기까지 시간이 필요했다. 몸을 이리저리 부딪히며 견디는 것이 존재의 목적이었던 바퀴가 이제는 몸을 사리고, 양반댁 부인의 치맛자락이 땅에 닿기 전에 조금의 흔들림도 없는 것이 목적이 되었다. 그러한 지루한 생활 중에 그나마의 즐거운 기억은 양반댁 아기씨의 혼인날이었다. 으레 그러하듯 아기씨는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신랑과 혼인을 하였지만 아기씨가 정말 아기일적부터 모시던 바퀴로서는 혼주와 납채서가 오가던 날 본 신랑의 낯빛이 넉넉했고 품행이 단정한 듯해 썩 마음에 들었다. 제가 한 것이라고는 종종 아기씨가 탈 때에 돌과 진탕을 지날 때에 단련된 몸으로 조금 더 견고히 버티는 것 뿐이었지만 바퀴로서는 그것이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이자 전부였다. 그렇게 모신 아기씨가 연지곤지를 바르고 서툰 맞절 후에 허공에 대추와 밤이 오가던 날 신랑의 모습에 낯을 붉히던 아기씨를 마지막으로 바퀴는 그 집을 떠났다. 그날의 기억은 아기씨의 손에 쥔 붉은 산호로 장식된 비녀였다.
어디로 가였는가, 그 후의 기억은 꽤 오랫동안 컴컴한 어둠이었다. 아기씨가 혼인을 간 후 양반댁 어른은 병환이 들었고 부인은 어른을 간호하느라 출입을 삼갔다. 종종 아기씨가 약재나 옷감을 보내오기는 했지만 바퀴가 움직일 일은 없었다. 나무 대문 뒤에 얌전히 선 채 문틈 사이로 오가는 것들을 보며 바퀴는 러시아 대공의 물품에 있던 책들이 담고 있던 이야기들, 특히 꿀에 재운 구운 밀가루의 달콤한 냄새와 낯선 화장품의 냄새를 떠올리곤 했다. 한강의 쿰쿰하면서도 맑은 물 내와 얼굴 가득 끼얹던 흙들은 어둠을 밝히는 빛 같은 추억이었다. 이제 대문 밖에서 흘러 들어오는 냄새는 더 새로운 것들이었고, 러시아어보다 더 낯선 언어들이 섞여 있었다.
마침내 상여가 떠나던 날, 바퀴도 떠났다. 부인이 오래 집안을 챙긴 하인 부부에게 작은 집을 한 채와 먹고 살 용도로 바퀴를 내준 것이었다. 낡고 오래된 것이었지만 바퀴는 다시 사람을 태우고 거리를 오갔다. 도성의 끝과 끝을 오가던 시절을 지나 윗동네에서 아랫동네로 가는 것조차 드문 일이 되었고 그마저도 이내 거리에 전차가 깔리며 바퀴는 붉은 산호로 장식된 비녀로 흰 머리를 쪽진 부인을 태우는 것을 마지막으로 바퀴로서의 삶의 끝을 내었다. 오랜만에 마주했으나 금방 알아볼 수 있었던 그 부인을 행선지에 모셔준 후 부서진 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