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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울과 철학 Dec 12. 2023

<자살에 대하여> 메모

사이먼 크리츨리 지음

1. 불치병에 걸린 사람은 행복보다는 불법적으로나 비도덕적으로 행동했다고 느끼지 않고 존엄한 죽음을 맞기를 바라는 경우가 매우 흔하다. 흄에 따르면, 자살은 "죄의식과 비난으로부터 벗어나 있는 것"이다.


2. 삶이 신이 준 선물이라면 정확히 선물이란 무엇인가? 선물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이다. 주는 행위 후에 선물은 받는 사람에게 속한다. 정의에 따르면 선물을 주는 사람은 선물을 주고 나면 더 이상 선물을 소유하지 않는다. 따라서 자살 금지가 삶은 신이 준 선물이라는 생각에 근거한다면, 삶은 많은 조건이 달린 선물처럼 보이며 이는 그것이 더 이상 선물이 아니라는 의미가 된다. 다시 말해 우리가 거부할 수 없는 선물은 선물이 아니다. 선물이 되기 위해서는 삶은 거부되고, 버려지고, 다른 누군가에게 다시 주어지고, 돈을 받고 되팔거나 거저 주어질 수 있어야 한다. 삶이 신이 준 설물이라면 신은 그 선물을 거부하는 행위로써 자살의 가능성을 고려해야 한다. 이러한 논증에 따라, 자살은 비난받을 수 없다.


3. 신이 무한히 사랑한다면 그, 그녀 또한 그것이 그 사랑을 거부할 수 있고, 삶과 죽음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게 허용해야 한다.


4. 사실을 말하자면 생명의 존엄성에 대한 믿음의 내부는 매우 너덜너덜하고 추하면 편협하다.


5. 자살이 다른 사람에게 미치는 피해의 문제는, 자살을 원하는 사람에게 참을 수 없는 신체적, 정신적 고통의 상황 속에서 계속 살아가도록 강요함으로써 야기되는 피해와 견주어 보아야 한다. 눈에 띄게 심한 우울증을 견뎠던 로빈 윌리엄스가 가족이나 팬들을 위해 살아야만 했을까? 우리가 도덕적 확실성을 갖고 그 판단을 할 수 있을지는 의심스럽다.


6. 합리성에 근거해 죽음을 정당화하면, 이성은 죽음을 자세히 들여다볼 수 없고 그에 대해 어떤 합리적인 판단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는 점이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


7. "자살중동을 느끼는 우울증은 냉혹하면서도 흥분된 공포, 끊임없는 절망의 상태이다. 삶에서 가장 사랑하는 것들이 빠져나가버린다. 종일 그리고 밤새도록 모든 것에 애를 쓴다. 희망도, 의미도, 무도 없다."

 -<동요하는 마음>, 케이 레드필드 재미슨


8. 애도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에 대해 느끼는 슬픔으로서 비탄과 탄식으로 이어진다면, 우울증에서 슬픔의 대상은 더 이상 죽어버린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다.


9. 그는 마음은 뛰어난 하인이지만 형편없는 주인이라는 말이 진부하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럼에도 그 말은 사실이다. 그리고 이것이 사람들이 총기로 심장 대신 머리를 쏘아 자살하는 이유라고 덧붙인다. 그들은 그 형편없는 주인을 죽이고 싶어 한다. 이것이 프로이트가 의미한 것이다. 자살은 우리를 노예로 만드는 것에서 벗어나려는 각오이다.


10.  우리는 권리 또는 의무의 개념에 기반해 자살에 찬성하거나 반대하는 모든 주장에는 명백한 철학적 결함이 있음을 보았다. 그렇다면 무엇이 우리가 자살하는 것을 막고 있는가? 우리는 왜 사는가?


11. "자살하는데 타당한 이유가 있을까? 너보다 더 오래 산 사람들이 이런 질문들을 했지만 그들은 답을 찾지 못했을 것이다"

 -<자살>, 에두아르 르베


12. 자살은 삶에 일관성을 부여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한 사람의 죽음의 순간을 통해 삶을 봄으로써, 삶에서 복잡성을 박탈해 버림으로써 그렇게 할 뿐이다.


13. <시지프 신화>에서 가장 중요한 주장은, 자살은 부조리에 대한 정당한 대응이 아니라는 것이다. 필요한 것은 부조리에 맞선 예술창작이다. 니체가 말했듯이 우리는 진리로 인해 죽지 않기 위해 예술이 필요하다.


14. 여기서 핵심은 "다정한"과 "무관심"이라는 단어의 조합이다. 카뮈에게 무심함은 냉소가 아니다.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도 세상의 아름다움과 야만성 모두에 열린 채로, 다정함과 이해를 품고 세상에 다가가 세상을 경험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좋든 싫든 간에 르베는 자살의 경험을 예술로 변형시킴으로써, 죽음보다 훨씬 더 오래 지속되는 부조리한 창조 행위에 참여했다.


15. 어쩌면 자발적인 자기 파괴를 할 수 있는 결정을 내리는 것, 자살할 능력이 우리를 하나의 종으로, 인간으로 구별 짓는 것일지도 모른다.


16. "자신의 소멸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은, 밧줄, 총알, 독약, 바다에 의지할 생각을 해보지 않은 사람은, 갤리선의 비참한 노예나 엄청나게 큰 짐승의 썩은 시체에 기어 다니는 벌레이다. 세계는 우리에게서 모든 것을 앗아갈 수 있고 우리에게 모든 것을 금지할 수 있지만 누구도 우리가 자신을 파괴하지 못하게 할 힘은 없다"

-<해체의 개설>, 에밀 시오랑


17. "낙관주의자만이 자살을 한다. 그 낙관주의자들은 더 이상(...) 낙관주의자가 될 수 없는 낙관주의자이다. 살아야 할 이유가 없는 다른 사람들에게 왜 어야 할 이유가 있겠는가"

-<고통의 삼단논법>, 에밀 시오랑


18. 어쩌면 우리는 진정하고 상황을 더 냉정하고 염세적으로 보아야 할지도 모른다. 죽음이 어떤 문제든 해결해 주고 보상과 보복과 응징을 하고 우리를 자신으로부터, 타인으로부터, 세게의 고통스러운 혼란으로부터 구해줄 거라는 낙관주의적 망상에 굴복해서는 안 된다.


19. 생각할 수 있는 힘과 기본적인 운동 기능을 갖고 있는 한 우리는 자유를 행사해 삶을 끝낼 수 있는 무기를 소유한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가 그 무기를 사용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전혀 그렇지 않다. 그것은 너무 낙관적인 행동이 될 것이다. 우리의 자살로 구원되는 것은 없을 것이다.


20. 우리를 괴롭히고 무력하게 하는 자기혐오에서 벗어나 자신의 다른 가능한 형태로 최소한의 전환을 시도하는 것은? 결국 이것이 더 용감한 게 아닌가? 바로 이것이 니체가 순진무구함과 약함의 낙관주의와 대비되는, 강한 염세주의라고 부른 것이다. 진정한 염세주의자는 자살하지 않는다.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21. 존재할 이유를 찾을 수 없다면 존재하지 않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큰 실수이며 치명적인 잘못이 될 것이다. 삶의 의미에 대해 질문하는 것은 오류로서 그 질문은 그만두어야 한다. 위대한 계시는 결코 오지 않을 것이다. 먹구름은 구원의 약속과 함께 사라지지 않을 것이고, 우리의 마음은 의심, 자기기만, 자기 연민, 죄의식의 시궁창에 곧두박질치는 걸 추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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