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적 사고로 삶을 살아가다
삶을 살기 위해서는 과학적 사고가 필요하다.
확률과 통계에 바탕하고, 근거를 가지는 과학을 통해 정확히 판단하고 삶을 헤쳐나간다.
그러나 인간은 철학적 사고도 하게 된다. 이 순간 여기에서의 나의 존재를 의심할 만큼 철저히 사물을 파헤치게 된다. 인식론까지로 의심이 심화되면 세계에 대한 기존의 틀은 모두 무너지게 된다. 그런 상태에서 인식의 기준들을 세우게 되고 인식론을 정립하게 된다. 인식론이 정립되면 윤리론이 그다음이다. 옳고 그름을 판단하게 되고 행동의 준칙을 마련하게 된다.
하지만 철학적 사고는 그 양이 생활을 영위하기에 충분히 풍부하지 않다. 철학적 방법은 너무 제한적이고 속도가 느리다.
과학적 사고를 필요하게 되는 것이다. 통계에 바탕하는 휴리스틱에 의존하게 된다. 휴리스틱은 개체의 생존 관점에서 보았을 때 매우 합리적인 도구이다. 물론 오류가 생길 때도 있지만 어느 정도의 오류는 감수할만하다. 그러한 오류까지도 포함하여도 합리적인 것이 휴리스틱이다. 부분적 오류 때문에 휴리스틱 전체를 포기할 수 없다.
철학적 사고의 이점은 무엇인가? 삶을 더 풍부하게 해 준다는 것이다. 과학적 사고만으로는 삶의 깊은 본질을 직관적으로 파악할 수 없다. 한 꺼풀 한 꺼풀 벗겨가는 철학적 사고를 통해 인간은 고양된 순간을 맞이할 수 있다. 고양된 순간이란 삶의 목표를 파악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윤리철학은 그러한 목표설정에 큰 이정표가 될 수 있다. 윤리적 준칙을 설정함으로써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갈지를 결정하게 된다.
반면 과학적 사고는 삶의 태도를 이루는 기본이 된다. 통계와 확률에 기반한 생각들은 정서가 되고 감정이 되며 평상심을 이루는 근본이 된다.
과학적 사고를 통해 불안과 불필요한 걱정을 배제하게 된다. 삶의 모든 판단은 과학적 사고를 기반으로 해야 한다. 판단의 근거가 실험적으로 밝혀져 있어야 한다. 통계적으로 유의미할 때 관련성을 인정할 수 있다. 정서적으로 이끌리더라도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차이가 없다면 관련성을 인정해서는 안된다. 그 경우 관련은 없는 것이다.
생을 지탱하는 데는 과학적 사고가 훨씬 중요하다. 휴리스틱을 통해 의사결정을 하여야 한다. 삶을 그렇게 유지하는 것이다. 불안과 감정은 과학적 사고를 통해 배제하여야 한다.
모든 학자는 과학적 사고를 해야 한다. 학자가 아니더라도 인간은 과학적 사고를 해야 한다.
판단을 위해 논문을 수시로 검색하고 전문가의 진단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철학적 생각은 간간히 하는 것으로 만족한다. 철학적 생각에 깊이 빠지면 삶을 정상적으로 영위할 수 없다. 철학자 흄 이래로 새로운 인식론은 더 이상 없다.
단 윤리학은 그 지평이 열려 있다. 신의 존재를 인정한다는 전제하에 인간은 생활철학으로써 윤리학을 정립할 수 있다.
특수한 철학적 관념에 빠져서 균형을 잃으면 안 된다.
근본적인 것은 과학적 사고다. 철학과 예술은 그것을 보충하는 정도가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