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단 오르기

퇴사 전초전

by 바람


추운 날씨, 뿌연 미세먼지로 인해 내가 택한 운동은 '계단 오르기'이다. 일전에 장모님도 추운 날씨가 되면 종종 계단 오르기를 통해 건강을 챙기셨다. 장인어른이 운동을 싫어하셔서, 억지로라도 모시고 두 내외가 함께 할 수 있는 유일한 활동이 계단 오르기였던 것 같다. 다만 장인어른은 힘들다고 얼마 되지 않아 그만두신 것으로 안다. 나도 언젠가 아파트 엘리베이터 교체공사로 인해 한 달 넘게 계단으로 집을 오르내리곤 했다. 그때를 생각하면 몸이 힘들었고 공사로 큰 득이 없을 세입자로서 오롯이 짜증만 났던 기억이 있다. 돌이켜보면 계단을 오르면서 허벅지가 단단해졌고, 체중관리에 어느 정도 도움이 된다는 사실은 눈치채지 못했다. 잉여 칼로리가 복부에 눌러앉지 않고 두꺼워진 허벅지로 이동한다는 기특한 사실도 올해 처음 알았다. 무엇보다 계단을 오르면서 좋은 건 거칠어진 숨소리, 빠른 심박수가 귀에 맴돌면 이내 잡념은 사라진다.


특히 퇴사를 앞두고 있는 요즘 생각이 많다. 계단을 오르면서 십수 년 몸담았던 직장과 직장 생활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한다. 회사를 다니며 경험한 소소한 성취감이나 동료들과의 즐거운 기억들이 적지 않다. 게다가 직장에 몸담고 있으면서 주말과 공휴일에 충분히 쉴 수 있어 편했고, 사회적 안전망에 착 달라붙어 마음의 평온을 얻었다. 다만 '월급'이라는 마약으로 삶의 감각 8할을 잃고 살아왔다는 생각이 든다. 좋은 게 좋은 것이고, 가능하면 갈등을 피하고 사람들과 원만하게 협의하며 나를 내세우지 않는 삶, 상사와 거래처 바이어의 눈치를 살피며 그들의 짜증에 움츠려야 했던 삶이 고단했다. 삶을 향해 영민하게 뻗어있던 감각을 월급이란 마약으로 마비시키고 아무 일 없는 듯 지내왔던 시간이 유쾌하지 않은 이유와 같다. 문득 오르는 계단 위에서 단단해진 허벅지 근육의 역동을 느끼며 영민했던 삶의 감각이 서서히 깨어나고 있음에 기쁘다.


새삼 계단이 내게 얼마나 이로운지 생각했던 배경 뒤에 엘리베이터는 직장에 몸담았던 편한 시절과 몹시 닮아있다. 내가 살고 있는 층수의 버튼을 누르면 아무 생각 없이 그 층에 도달한다. 도착지는 사실 중력을 거슬러야 오를 수 있는 높은 곳이었다. 어쩌면 손과 발이 저리도록 오랜 시간 매달려야 하는 클라이밍처럼 각고의 노력을 통해서만 어렵게 도달할 수 있다는 사실을 한동안 잊고 살아왔다. 직장이라는 이름의 빌딩 감옥 안에서 모범수마냥 열심히 그리고 얌전하게 머리를 굴리면 그리 어렵지 않게 삶을 영위할 수 있었다. 다만 목적지가 어딘지 모른 채 편하게만 흘러가는 게 맞는지 아주 가끔 불편한 마음이 들 뿐이었다. 아니 불편한 마음은 가끔은 아니고 자주.


계단 10층이 넘어가면 점점 호흡이 거칠어지고 땀이 나기 시작한다. 그리고 얼마 남지 않은 꼭대기 층을 떠올리며 약간의 설렘도 갖는다. 가고자 하는 목적지에 내 발, 다리, 호흡의 감각과 과정을 인지하며 도달했다는 것이 나를 설레게 하는 것일까? 아파트 계단을 오르는 일은 그렇게 잊고있던 몸의 기억을 깨우고 있다는 확신을 갖게 한다. 퇴사를 한 이후의 삶을 구체적으로 머릿속에 그리기 어렵지만, 삶에 대한 영민한 감각들을 깨우는 활동이 이 시점에서 내게 중요한 일임에는 분명하다. 그래서 편하게 버튼만 누르면 목적지에 다다르는 엘리베이터보다, 땀나게 힘든 감각을 일깨워주는 '계단 오르기'가 내게 더 설레나 보다. 몸은 편하지만 목적지가 어디인지 모르고, 마음이 불편한 채 정처 없이 흘러가는 직장 생활이 꼭 엘리베이터 같아서 오늘도 계단을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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