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의 순례길

교통비 이만원을 받고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by 바람

오늘 중년의 백수는 두 번째 면접을 보기 위해 오전 8시에 집을 나섰다. 흐리지만 완연한 봄기운이 텁텁한 미세먼지의 맛과 냄새 어딘가에 포개져있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어색한 남색 넥타이와 다림질 안된 흰 셔츠가 조금 신경이 쓰이는 모양새이지만 오래간만에 나온 출근길 같은 면접길을 아내는 너무나 반가워한다. 나와 다른 방향의 출근길로 향하면서 우리는 주먹을 마주쳤다. 나는 묵직한 긴장감을, 그는 봄을 반기는 밝은 설렘과 같은 것을 안고서 말이다. 상이한 두 마음의 거리가 최대한 멀어지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보자’결심하고 나는 그렇게 길을 나섰다.


지금까지 걸어온 길과 전혀 이어져있지 않는 길 위에 올라서니 분명 쉽지가 않다. 경력이 중요한 이 길을 나서는 중년에게는 어떤 '근자감'이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일인 만큼 중도하차하지 않을 마음가짐, 아내와 나 둘 뿐인 우리 두 입에 풀칠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나를 판단하는 어떤 일에서건 '벌벌벌' 긴장이 많았던 내게 처음 면접도 생각보다 떨리지 않았던 이유도 '근자감' 덕분이었다. 다만 첫날의 면접을 위해 성남에서 안성까지 그 먼 길을 떠나온 내 앞에서 하품하는 면접관을 보며 많이도 속상했다.


격 없이 실무자 두 명이 무성의하게 면접을 진행했다. 챗GPT가 알려줘서 알고 있는 뻔하디 뻔한 질문을 부여잡고 십 분이 채 안 되는 시간이 지나간 후 적격자가 아니라는 것을 실무자의 표정을 통해 단번에 눈치챘다. 모른 체하며 내러티브를 바탕으로 포부도 얘기하고 시장의 동향과 내 강점에 대해서 조목조목 설명했지만 그녀의 표정은 지루했다. 마스크로 너머 애써 숨기려고 하지 않는 그 하품이 면접의 마침표였다. 전직을 감행하고 첫 면접이었기에 열정을 품던 패기는 그녀의 하품처럼 이내 꺼져버렸다. 허무했고 속상했다.


집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미워하고 탓하는 마음이 마구마구 들끊는 용암기포처럼 보글보글 터져 나왔다. '무례하기 짝이 없느니', '직무태만이니' 하면서 말이다. 그 애린 기억 때문일까 두 번째 면접길은 조금 더 벌벌거릴 것 같았다. 이 심상치 않은 기운을 애써 떨어뜨려놓자고 환승버스를 타지 않고 두 발로 잠시 걸었다. 아니 한참을 걸었다. 일체유심조라 했던가, 천천히 한 발 한 발 띄워 목적지로 향하니 심란함은 가라앉고 내 마음이 잘게 보였다.


"지원한 포지션이 나와 맞지 않는다면 그건 이미 내 의지를 떠나 어쩔 수 없는 일, 굳이 그 옷에 내 몸을 꿰어 매려 들지 말자. 열정을 어필하되 비굴하지 말며, 내가 준비한 것들을 한치의 거짓 없이 얘기하되 상상력을 보태어 그들에게 내 비전을 풀어놓자" 속으로 되뇌었다.


목적지에 도착하니, 세워진 간판에 입사지원자들을 환영하는 안내가 있었다. 대기실도 있었고 브랜드 모를 생수도 몇 개 준비해 있었다. 생각지도 않은 교통비까지. 처음과 다른 대우에 기분이 묘했다. 첫 면접과 달리 팀장급의 인사들이 4명이나 나를 에워쌌지만 천천히 그리고 차분하게 대답했다. 아쟤아쟤한 면접관들과 면접실 곳곳에 덕지덕지 붙어있는 무뚝뚝함이 있었지만 내게는 왠지 모를 편안함이 있었다. 얼마 있으면 할아버지가 될 그들의 희끗한 새치와 표정이 꽤나 회색이었어도, 날카로운 눈으로 매섭게 쏘아보아도, 이미 엷게퍼진 얼굴의 미소는 막을 수 없었다. 텁텁한 미세먼지 어딘가에 포개진 봄기운의 설렘처럼 말이다.


오늘의 정신승리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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