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담

사물에 담기는 감정이 참으로 오묘하다.

by 바람

요즘 사물에 담기는 감정을 사뭇 진지하게 생각한다. 가까운 타인의 영향으로 나조차 모르게 어떤 사물에 어린 기억과 감정, 나아가 내 행동을 바꾸는 지점이 새삼 재밌고 신비롭다. 이런 걸 조작적 조건형성이라고 하겠지?


이를테면 아내와 공중목욕탕 얘기를 하다 공용비누 얘기를 나눈다. 비누에 감겨있는 머리카락 얘기가 나오면 아내의 반응은 전형적이다. 진절머리 나듯 머리를 좌우로 빠르게 세 번, 미간을 힘껏 찌푸리고 짧고도 작은 단말마의 비명을 내지른다. "으으ㅇ흐ㅡ~"


침대 위, 식탁, 거실바닥, 쇼파 위에 중년의 위기 '탈모'라는 불치병에 걸린 내 흔적, 소중한 머리카락들이 널브러져 있다. 아내는 발견즉시 주워서 내 머리 위에 도로 올려놓거나 재빠른 손놀림으로 휴지통에 던져 눈에 안 보이게 그 즉시 치워 버린다. 가끔 내 머리 위에 머리카락에 붙은 먼지도 같이 올라가는 건 덤.


배우자의 행동은 사실 장인어른의 깔끔한 성격으로 인해 비롯되었다. 화장실 수채구녕에 머리카락이 엉켜있는 꼴을 아버지는 참을 수 없으셨다. 어린 시절부터 잔소리, 안 치우고 혼이 나기를 수차례, 머리카락에 대한 감정은 아내에게 서서히 수치심이나 모멸감, 짜증으로 점철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보니 사물에 어린 많은 감정들은 사실 대물림이다.


한 서너 해 동안 배우자를 지켜보면서 나도 모르게 주변에 떨어진 머리카락이 눈에 거슬린다. 그 놈들이 이전에는 가엽고 안타까웠다. 몇 개가 내 앞에 드러누워도 그들에게 스킨십하지 않았다. 그의 자리를 존중했고, 함께 공존했다. 다만 이제는 그럴 수가 없다. 보이는 즉시 최대한 엄지와 검지 끝이 빨개지도록 안간힘을 다해 꼬집어 치워 버린다. 사물에 담기는 감정이 참으로 오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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