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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서재 Part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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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컹리 Feb 23. 2019

완전사회

#106 문윤성 [완전사회]


p.55

   선구는 그녀의 손을 꽉 잡았다. 무척 반가웠다. 실로 오래간만에 대하는 웃음이며 사람다운 대접이었다. "마담, 고맙습니다. 이렇게 따뜻하게 대해주셔서 나는…." 선구는 말을 도중에서 끊고 어무어물하였다. 더 말하다가는 실언이 될 것 같아서였다. 지금 그의 마음은 몹시 허약하고 감성적이어서 지금 하려던 말도 자신의 외로움을 호소하고자 했던 것이다.



p.72

   '이제는 의심할 여지 없이 이곳은 여인천하이다. 다른 지방은 어떤 꼴인지 모르겠으나 이곳은 완전히 여자 일색이다. 그것도 요즘 시작된 여인천하가 아니라 이런 판국이 된 지 이미 오랜 모양이다. 그러기에 보기 힘든 남자라 해서 이다지 성화들이 아닌가. 혹 모르겠다. 이들은 생후 처음으로 남성을 구경하는지도.' 선구는 생각했다.

   남자들은 어디로 갔으며 여자만 가지고 어찌 꾸려 나가는 건지 의심스러웠다. 그러나 이런 궁금증은 선구에게 나중 일이었다. 우선 당장은 이 꼴을 당하니 기가 막힐 뿐이었다. 오늘 이 마당에 처음 인도됐을 때는 이젠 좀 대우 개선이 되나 보다 하고 반갑기까지 했었다. 여자 떼들이 모여들자 이거 좋은 구경거리구나 하고 그들의 골격, 언어, 노유의 비율 등을 관찰하기에 분주하기까지 했었으나 이내 지치고 말았다.

   이제는 조금도 의심할 바가 없이 자기는 포로며, 노리갯감이라는 걸 절실히 깨달았다. 서글프기도 하고 그 꼴들이 보기도 싫어 푸른 하늘을 상대로 잔디 위에 벌렁 누워 버렸다. 선구가 누워 버리자 군중들이 와글거렸다. 어떤 이는 잘 보이지 않으니 일어나라고 외치기도 했다. 아나운서와 경비원이 와서 일어나라고 지근거렸다. 미칠 노릇이었다. (중략)

   '오늘의 이 마당에 오기 위하여 완전인간의 까다로운 절차를 치렀으며, 어머니의 간청을 뿌리치고, 사랑도 버리고, 형제며 동포며 조국을 외면했던 건가. 이 지경 요 꼴을 만들기 위하여 유엔은 그 권위를 기울여 비커츠섬의 거창한 건설을 이룩하였고, 전 세계 주민은 열띤 환호와 축복을 보냈던 것이냐.' 분통이 터져 죽을 노릇이었다. 그간 스스로 자기 마음을 달래고 억제해 온 인내가 이제는 한도에 도달하여 폭발할 것만 같았다. 실로 허무하고 값없는 161년의 세월이었구나.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면서 선구는 과거를 더듬어 보았다. 생에 충만한 자기의 역사였다. 오로지 육체에만 정기가 서려, 그러기에 전 인류의 이름 아래 대표자로 뽑힌 것이 아니었더냐!

   선구는 두 손에 불끈 힘을 주었다. '내가 이 꼴을 당하고만 있어야 하나? 아니, 아니, 아니다. 이 꼴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다. 내 신세를 운명으로만 돌리고 체념할 수는 없다. 싸우자. 이 구덩에서 벗어나 보자.'



p.101

   1일 자로 시작된 일기의 최초 9년간은 아름다운 서정과 착실한 생활기록으로 가득했다. 그다음, 9년 7월 20일. 여기서 숙원은 제3차 세계 대전이 폭발했음을 기록했다.

   "유럽 일각에서 투닥거리던 분쟁은 기어이 온 세계에 불똥을 튕기고 말았다. 동서 양 진영 그리고 제3세력권의 모든 나라는 성급히 핵무기를 사용하였다. 아, 무서워라. 신이여, 비커츠섬을 굽어보옵소서. 우선구를 편히 쉬도록 보살펴 주옵소서."

   전쟁의 시작으로부터 그 경과, 종말에 이르는 숙원의 기록은 대단히 소홀하고 그나마 그녀의 관심은 오로지 선구의 안식처인 기밀실의 안위에만 얽매여, 역사 기록으로선 아쉬운 바가 많았다. 선구는 이 부분을 연감 등 다른 책에서 보충해야 했다.

   출판물 기록에 의하면, 제3차 세계 대전은 선구가 그 옛적에 기우한 바 같은 우발적 사고나 동서 세력 간의 미리 마련된 정면충돌로 야기되지 않았음이 선구에겐 의외라면 의외였다. 연감 편집자의 저술을 보건대, "제3차 세계 대전의 불씨를 던진 당사국, '알비나'와 '에스야'는 유럽 일각에 붙어 있는 소국이며 같은 공산주의 이념 국가다. 서로 도와야 할 이 두 나라가 서로 다툼으로써 열린 이 세기적 비극의 원인은 어디 있으며 목적한 바는 무엇일까? 극서은 피치못할 절대적인 이유도 거둬들일 아무런 수확도 없는, 말하자면 우매하고 허호아된 투기 그것뿐이다. 지금까지의 모든 인류 전쟁사가 전부 그랬듯이. 결국 그들의 어리석음을 역사는 증명하였다. 과거의 모든 전쟁의 결과가 전쟁 도발자들의 의사를 배척한 바 그대로."

   제3차 세계 대전은 사전에 예상한 바 그대로, 최초의 몇 시간 동안 대세가 결정되었다. 교전 국가들은 다 같이 첫머리에서 치명적 타격을 입고 말았다. 그들은 이러한 피해에도 불구하고 연 사흘간 핵무기 교전을 벌였다. 이로써 그네들 국민 거의 전부가 몰살을 면치 못했다.

   그렇다고 전쟁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지하 방공호 또는 해외 기지에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쌍방의 생존 부대 사이에 단말마적 싸움이 3년을 두고 끌어나갔다. 이렇게 장기전이 되리라고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으리라. 이 기간 중의 전쟁은 실로 비참하고 무의미하기 짝이 없었다.

   그들 생존 부대들은 오직 싸우기 위하여 싸우는 동물에 지나지 않았다. 비록 그들은 생존은 했으나 목적하는 국가도 겨레도 국토도 없었거니와, 그들 자신도 다소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모두 방사능의 오염, 기타 사고로 정신적으로 또 육체적으로 폐인이 돼 버렸던 것이다. 제3차 세계 대전의 더욱 이색적인 특징은 종반전의 형태에 있었다.

   이 종반전은 교전 국가 간의 승부로 끝난 것이 아니라 제3세력에 의하여 쌍방 교전국의 잔존 부대들이 소탕됨으로써 끝을 고했다. 여기 제3세력이란, 대전에 참여할 자격도 없던 몇 개 조무래기 국가들을 말함인데, 이들은 공포와 흥미 속에서 강대국들이 거꾸러지는 걸 구경하고 있다가, 언제 끝날지 모르는 종반전을 기다리지 못해 교전 단체 토벌에 나서게 된 것이었다.

   이들 토벌대 앞에 과거를 자랑하는 강대국 패잔병들은 맥없이 사라졌다. 전쟁은 끝났다.



p.105

   날마다 늘어가는 앞바다의 어선들을 숙원은 헤아려 보게도 되었다. 보랏빛 여명기를 뚫고 드디어 약진 시대가 왔다. 비커츠 섬 연대로 따진 23년 4월 14일의 일기에는 숙원은 기쁨을 터뜨렸다.

   "오늘은 인류 역사상 영원히 기념할 날이다. 아르헨티나의 립튼 박사가 원자탄 피해 회복 방식을 발견하여 학계에 발표하였다. 박사의 이론에 따르면 방사선 장애를 일으킨 동식물의 세포는 회복될 가능성이 초기 환자는 80퍼센트 이상, 중기 환자는 60퍼센트 이상, 말기 환자도 20퍼센트 이상이라고 했다."

   립튼 이론의 위력은 대단하였다. 제3차 세계 대전 핵폭발 지역이 복구 대원들에 의하여 속속 회복 개발되었다. 이 해는 숙원의 양가인 나달잔 일가에 있어서도 기념할 만한 해였다. (중략)

   세계가 아르헨티나 청년들의 독무대가 되는가 싶을 정도로 그들은 전 세계로 진출하였다. 립튼 박사의 덕택으로 방사능 노이로제는 완전히 제거되었다. 아르헨티나 이민단의 뒤를 이은 얷은 브라질, 그리고 칠레. 이들의 공동 용어인 스페인어가 전 세계를 휩쓸었다. 이에 지지 않으려고 오세아니아의 섬사람들, 그리고 아프리카의 주민들이 용감히 서둘렀다.

   세계 지도는 나날이 달라졌다. 아메리카에, 아시아에, 유럽에 건설의 망치 소리가 요란했다.

   "조용한 건 오직 비커츠섬뿐. 그러나 우리는 외롭지 않다. 우선구가 깨어나 디딜 세상이 밝아 오나니." 숙원의 글이었다. 세계는 말끔히 부흥되고 더러는 전쟁 전 수준을 돌파하기도 하였다.

   이민단은 부흥 지대의 막대한 자원으로 무섭게 비대해졌다. 지도자들은 넘쳐흐르는 힘의 소비처를 찾아 헐떡였다. 처처에서 과잉 의욕, 과잉 생산, 과잉 충돌이 잦았다. 유엔이 재조직되었다. 그들은 원탁에 둘러앉아 세계 지도의 재편집을 의논하였다.

   그러나 국제 협상이란 고금을 통해 시간의 낭비와 거짓말 늘어놓기 경연에 지나지 않았다. 국제간의 긴장도는 나날이 높아갔다. 유엔이 베푼 업적이란 고작 비커츠섬의 방위 시설을 강화하자는 데 합의를 본 정도에 그쳤다. 그렇다고 그곳 주민들이 이것을 좋아한 건 아니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자는 누구냐? 그건 과학자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약하고 못난 사람은 누구냐? 그건 과학자다."

   이러한 말은 예전부터 있었다. 창조자로서는 위대하나 자기 창작품의 사용 능력에 있어선 허약하고 그 결과에 대한 책임감은 지지리 못나게 걸머져야 하는 게 과학자라는 이 말의 진실성을 선구는 지금 뼈아프게 되새기고 있었다. 제4차 세계 대전사를 읽으면서 그는 새삼 과학의 위대성과 그 잔인성, 그리고 그 허망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제4차 세계 대전도 개시 벽두에 있어 핵무기의 대량 투입으로 무자비한 살상과 파괴를 감행한 것은 전번 제3차 세계 대전의 수법과 다를 바 없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간에 발달한 방위 무기와 보호 시설의 효과로 해서 이것만으로는 전번처럼 전국의 대세를 결정짓지는 못하였다.

   그럼 무엇으로 살육의 철저한 성과를 거둘 수 있었을까? 과학자들은 제4차 세계 대전을 주로 기상작전으로 맞싸웠다. 전쟁 초판의 핵무기 교환이 한물가자 곧 등장한 것이 상대방 지역에 대한 이상기후 조성과 이에 대항하는 역조성이었다. 적 진영에 초고기압이나 초저기압 현상이 일어나도록 하는 인공천후 조성 기술, 다시 말하자면 옛적에 전설이나 허무맹랑한 공상 소설, 군담에 등장하는 환풍호우술이 이번에는 현실로 나타나 판을 친 것이었다. 과학자들은 우주선에 광파유도기를 실어 구름, 비바람, 번개를 몰고 간다든지, 이와 반대로 일정한 지역의 대기를 빼내 온다든지 하였다.

   여기 사용된 두 가지의 병기, 즉 우주선과 광파유도기 중 우주선은 이미 전세기에 많은 보급을 보아 제3차 세계 대전 전후에는 온 하늘이 우주선으로 뒤덮였다고 형용할 정도로 그 수와 질에 있어 큰 발전을 보았고, 광파유도기는 전세기에 있어선 광학 이론상 한 묶음의 광파를 단일 광파로 집중시켜 여기에 발생하는 열과 속력을 이용할 가능성을 마련하고, 실험적으로 천체 망원경 같은 투광기 또는 금속에 구멍을 뚫는 착공기로 사용한 바 있는 건 선구도 이미 알고 있었다.

   이것이 차츰 발달하여 제3차 세계 대전에선 살인 광선으로서도 어느 정도의 위력을 발휘하였음이 기록에 나타나 있었는데, 제4차 세계 대전에 이르러서는 과학 병기 중의 결정 무기로 크게 등장했다. 이 무기의 더욱 구체적인 내용은 이곳 도서실에 비치된 서적에는 없었고, 또 있다 한들 그 내용을 연구할 겨를이 선구에겐 있지도 않았다. 자세치는 않으나 아무튼 기상작전의 피해는 핵무기의 그것에 비할 바 아니었다. 비유컨대 핵폭발이 점 공격이라면 기상작전은 선 공격이었다. 바로 살인 광선의 홍수 작전이라고 하면, 어눌한 표현이라 할 수 있을까?

   이런 무자비한 무기가 마구 구사되었음에도 이 전쟁이 2년 이상을 두고 끈 것은 이런 무기가 일방적으로 발전한 게 아니고 대립하는 양 진영에 고루 보급되어 피차 효력의 상쇄와 중화 작용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이때 이르러 과학자들의 두뇌는 또 한 번 수고해야 했다.

   기상작전에 겹쳐 사용된 것이 독기류, 독가스, 독세균 작전이었다. 이 무기들의 모습은 명칭 그 자체가 설명하겠으므로 별다른 해설이 필요 없으리라. 요컨대 이 무기들로 해서 싸우는 쌍방의 전 생물은 고스란히 멸망하고 만 것이었다. 3차 대전을 겪고 살아남은 6억 인구가 그 후 11억까지 불어났었는데, 이제 다시 불과 9천만 명도 못 되게 된서리를 맞았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이들 인구는 주로 남극이나 북극에 피난 간 사람들과 태평양, 대서양에 흩어져 있는 일부 소도서의 제한된 주민들이었다. 이 밖에 극소수의 인간들이 대륙 안에서 생을 유지하였는데, 그들은 지하 백 미터 이하의 특수 대피소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 요행 중의 요행을 잡은 행운아들이었다. 비커츠섬은 이번에도 무사할 수 있었다.

   "비커츠의 사람들은 우선구에게 깊은 감사를 드려야 한다. 그이로 해서 우리는 살아남았으니."

   이것은 비커츠섬 연대 35년 1월 13일 숙원의 일기문이었다. 제4차 세계 대전이 끝난 날짜는 어느 기록에도 명확치 않았다. 기름 마른 등잔불이 스스로 꺼지듯 4차 대전도 저절로 슬며시 끝난 것 같았다. 이번 전쟁 역시 승리자도 패배자도 없었다.

   살아남은 인간들이 여기저기서 인간이 그리워 '야-호'를 부를 때 비로소 전쟁이 끝났음을 알게 되었다. 전쟁은 끝났으나 장구한 시일을 두고 지구는 어두운 그림자로 뒤덮였다. 과학자들이 온 세상을 남김없이 사막으로 만들고 독약으로 그을려 놓았으니 말이다.

   이렇듯 대단한 위력을 뽐낸 과학자들은 제 사업에서 얼마나 보수를 받았을까? 선구는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그러나 한편 불쌍하도록 어리석은 그들을 추궁하고 싶지는 않았다. 어리석은 그네들은 살인 무기를 만들면서도 그것이 무기인 줄은 조금도 몰랐을 것이다. 무기인 줄 알았을 때는 이미 그것은 자기 것이 아닌 때였다. 더욱 불쌍한 건 자기 것이 아닌 자기가 만든 무기가, 자기 자신을 희생시킬 그 시각까지 그것에 매달려 지낸 그 사람들의 생애였다. 

   이러한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 과거 수천 년을 두고 되풀이 계속됐다. 이것이 역사이며 인류 문화였다. 이 꼴이 언제까지나 계속 될까?

   "암담한 4차 대전도 그 전부가 무가치한 것은 아니었다. 과학자들이 이번 대전을 치르고 나자 비로소 자기네들의 위치와 사명에 올바른 눈을 떴나니, 역사상 처음으로 세계과학자연맹이 탄생한 것이 그것이다."

   연감 편집자의 이 논설을 읽자 선구는 구호 신호를 받은 표류자처럼 가슴 설레며 그 후의 기록을 탐독하였다. 살아남은 과학자들은 국가며 민족의 울타리를 거두고 한자리에 모여 다음과 같은 결의를 하였다.


   첫째, 세계의 과학자들은 모든 차별감과 이기심을 떠나 부흥에 적극 힘쓴다.

   둘째, 앞으로 과학자들은 정치인의 절제를 받지 않는다.

   셋째, 과학자들은 각급 과학센터를 조지가여 이를 운영 관리한다.

   넷째, 과학자 및 과학센터는 인류 공동의 이익, 평화, 진보를 위해서만 활동한다.


   과학자 선언이 발표되자 전 세계 인민은 환호성을 올렸다. 그들은 보낼 수 있는 온갖 것을 과학자들에게 보내어 그들의 센터 건설에 이바지하였다. 이제 다시는 과학자의 다이너마이트가 폭탄이 되지 않고, 광속기가 살인 광선이 되지 않도록 적극 원조하였다. 용기와 희망에 찬 과학자들은 그네들의 센터를 중심으로 열의에 찬 노력을 아낌없이 들어부었다.

   이러한 일은 여태껏 인류 역사에 없던 현상이었다. 이제까지는 각가지 멍에에 얽매어 비밀, 배타, 방해 위주로 고립되었던 세계의 과학자들이 화기 가득한 마당에 모여 서로 토론하고 돕고 힘을 합하니 그 성과야말로 실로 경이, 그것이었다. 그뿐이랴. 전 세계의 인민들이 온갖 정성을 다해 그들을 밀어주니, 바야흐로 천리마에 날개 돋친 듯 세계 부흥 사업은 약진 또 약진, 성과는 태양처럼 눈부셨다.

   과학센터가 설립된 지 불과 2년 만에 과학자들은 전 세계 인민들로부터 위촉받은 몇 가지 가장 중요한 사업을 훌륭하게 이룩하였다. 전 인류가 충분하게 먹고, 입고, 살 수 있도록 식량, 의복, 주택 문제를 해결해 놓은 것이다. 재래의 농사 대신 공기와 바닷물의 분해 및 재결합 과정에서 무진장한 식량을 뽑아내는 데 성공하였고, 흙 속에 무진장으로 끼어 있는 알루미늄 성분을 섬유화함으로써 가볍고 시원하고, 가공하면 따스하고 매우 질긴 새로운 의목지 '시루'를 창안해 냈고, 이 '시루'에 변화를 붙여 '비시지'란 건축재를 발명하였다.

   '비시지'는 능히 내화, 내수의 성질을 가지면서 마음대로 구부리고 펴고 오려내고, 폴로 붙이고, 얇게 쪼개 내면 유리판, 이중으로 겹치면 마루나 지붕이 되는 이용도 높은 물질이었다. 이 재료로 이층집을 짓는 데 두 사람이 3시간이면 족했다. 의식주 문제가 해결되자, 세상 모습은 많이 달라졌다.

   인간이란 자고로 먹고 입고 자고 나서 하는 일의 우두머리는 정치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하겠지. 엤적에 있었던 민족, 국가, 지역별의 파벌이 다시 싹트고 이것을 토대로 정치인이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이 풍조는 세계 부흥의 보금자리이며 과학자들의 아성인 과학센터 안에까지 번졌다.

   이 기미를 알아챈 센터의 지도자들은 과감한 숙청을 단행하였다. 그들은 일체의 정치성을 외면하기로 결의하고 센터 운영에 있어 외부로부터의 간섭은 물론, 산하 과학자들이 센터 외의 여하한 조직체에도 가입하는 것을 허락치 않았다. '과학자는 오직 과학에만'의 슬로건을 내걸고 센터의 자주독립을 공고히 하였다.

   다시는 과거의 뼈아픈 과오를 범하지 않겠다는 비장한 결심에서 그들은 일체의 정치성을 외면하였다. 이것은 정당하고 현명한 방침이었다. 그럼으로써 과학센터는 사회 부흥과 발전의 기간 요소가 되고, 한편 과학자 자신들의 지위 보존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지나친 정치 외면에서 오는 모순이 없지도 않았으니, 이것이 훗날 제5차 세계 대전의 터전이 되고 그 결과 인류 유사 이래 가장 심각한 벽혁을 일으킬 줄이야 그 당시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p.185

   사가들의 갖은 험구를 두고두고 받아가며 악마의 상징이 된 스톤만이라는 사람의 기록을 읽고 난 선구는 절로 긴 한숨을 금할 수 없었다. 더욱 처량한 건 스톤만이 처형당한 후의 세계 형편이었다.

   스톤만의 폭거로 해서 여성들의 사기는 꺾이기는커녕 그녀들의 보복심과 단결심은 순식간에 칼렘 공화국을 부흥시켰을뿐더라 각처에서 여인국 독립의 선풍이 일어났고, 그녀들은 평화 보장이라는 명목으로 자위 군대를 갖출 권한마저 획득하였다.

   군대라야 하잘것없는 자위대 정도의 것이긴 하나 국제경찰군 외에는 일체의 사병을 둘 수 없었던 그 당시의 정세로 봐서 이것은 괄목할 만한 사실이라 아니할 수 없었다. 이 자위대가 미구에 닥쳐온 남성 대 여성의 최후의 결전, 성전쟁에 있어 결정적 역할을 수행하게 될 것이었다. 여성들의 사기가 복돋아진 반면에, 땅에 떨어진 건 남성들의 사기였다. 이거 역시 스톤만이 의도했던 바와는 딴판이었다.

   일반 남성들은 이 사건 이후 여성 경계론보다 여성 동정론이 앞장서, 여인국의 생존과 여기에 따른 자위대의 설치를 그저 당연한 사태로 인정하였다. 그들은 다시는 스톤만 같은 흉악범이나 그런 참사가 안 일어나길 바랐다.

   이런 것들만 해도 스톤만 일당이 남성 세계에 주고 간 좋지 않은 유산인데 더욱 중요하고 심각한 조건이 또 있었다. 그것은 이 사건이 도화선이 된 과학센터의 구조 변화였다.

   최초 칼렘 공화국이 기습을 받았을 때 인근 국제경찰군에 구원을 청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출동이 늦어 피해가 최대한에 도달한 사실은 사건 수습 후 중대한 의혹 사건으로 등장하여 각계 인사로 구성된 조사 위원회가 조직되어 철저한 심사를 하게 되었다.

   그 결과 이런 경우 의당 경찰군의 뒷받침을 해 줘야 했을 과학센터가 제대로 움직여 주지 않은 사실이 규명되었고, 이 원인이 해당 부문에 관계한 남성 과학인들의 의식적인 사보타지에 있었다는 혐의가 농후하게 되었다. 일체의 정치성에 엄정 초월함을 가장 자랑으로 삼아온 과학센터로선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과학센터의 세계 총회는 대책을 거듭 강구한 끝에 병력, 병기에 관계된 위원회에서 여성의 발언권을 남성의 그것보다 우위에 두기로 결정하였다. 예방 경찰의 인원도 여성의 머릿수를 남성보다 약간 더 두기로 조치하였다. 이 조치가 다음에 온 성전쟁의 결말에 어떤 영향력을 주었는지는 뻔히 예측할 수 있었다.


   '인간 사회에 다시는 전쟁이 있어선 안 된다. 인간이 인간을 살육하는 인간성을 잃은 행사에 인간의 지혜가 동원되어서는 안 된다.'

   이러한 비상한 자각 아래 학도들은 결속되었고, 그럼으로써 근 80년간 지구 위에 평화를 이룩하고 문화 향상에 크나큰 역할을 담당한 과학센터였건만 찬란한 그 역사도 임종이 없을 순 없었다. 인류 최후의 대전이라는 성전의 폭발과 더불어 과학센터도 별 수 없이 허물어지기 시작하였다.

   성전쟁은 명칭 그대로 남성과 여성의 대결을 내용으로 했다. 인류 역사상 가장 기이하고, 가장 잔인하고, 가장 심각한 이 전쟁은 서기 2108년(신기원 14년) 프랑스 지방의 여성 단체들이 수도 파리시를 점령하고자 하는 데서 불붙기 시작하였다. 이 당시 파리의 인구는 근 50만. 세계 유수의 대도시였다.

   이보다 앞서 칼렘 공화국을 비롯한 수다한 여인국들의 군세가 팽창일로로 화대되어감으로써 주위의 다른 행정 기구들과 자주 분리가 일어나 불안한 공기는 전 세계에 자욱이 깔렸던 터라 파리에서 벌어진 남녀 간의 정권 쟁탈전은 용이하게 세계적 규모로 번져나갔다. 이것이 제5차 세계 대전이었다.

   이번의 대전은 과거의 1, 2, 3, 4차 전쟁과는 근본적으로 성격도 방식도 달랐다. 이 전쟁은 12년을 두고 치열하게 계속되었는데, 마지막 2, 3년을 빼고는 쌍방이 다 같이 뚜렷한 지휘 계통이나 사령부도 없이, 따라서 군대다운 군대의 동원도 없이, 일정한 선이나 지역으로 된 전선의 편성도 없이 뒤죽박죽으로 진행되었다.

   그도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남녀가 존재하는 그 사실이 싸움이요, 남성과 여성이 마주친 곳이 곧 싸움터였다. 한 가정 안에서도 싸우고, 가정 대 가정으로도 싸우고, 크고 작은 수많은 집단 대 집단, 혹은 지역 대 지역으로도 싸웠다. 그 복잡한 현상은 이루 형용하기 곤란한 지경이었다.

   전쟁은 역사가 증명하듯 결국은 남성 진영의 참패로 끝을 맺었다. 그만큼 여러 면에서 남성에겐 불리한 조건들이 얽혀 있었다. 전쟁 의식도 그 명분에 있어 우선 여성은 남성을 앞질렀다.

   즉 여성은 칼렘의 여성 선언에서 본 바와 같이 남성의 말살을 명백히 내세운 데 반하여 남성 측은 고작 공존, 유화를 모색하는 데 그쳤다. 여성 측이 상대방을 무자비하게 살육 처지하는 데 맞서 남성 측은 가능한 한 생포와 설복을 기본 방침으로 삼았다.

   게다가 여성 측은 여성만의 순수한 단일 조직체였음에 비하여 남성 측은 재래의 부부 생활 그대로 남녀 혼성 부대가 일쑤였다. 남성 진영 내에 있던 여성들이 한 번 번의하는 날의 타격이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런 타격은 성전쟁의 맨 처음부터 끝장까지 줄기차게 반복되었다.

   남성의 어리석음은 그뿐이 아니었다. 여성들은 전 세계적으로 거의 전원이 결속된 데 반하여 남성 측은 태반이 전투 행위에 가담하기를 꺼렸다. 여성과 사우다니 점잖지 못하다는 게 그들의 핑계였다. 그들 자칭 중립론자들은 여성 측의 좋은 공격 목표가 되어 포로가 되기 일쑤였다. 포로가 되고 나서도 그들 대다수는 회개하지 않았다.

   "될 대로 돼라지 뭘 그래. 장래가 여인 천국이 되더라도 남성이야 밑질 것이 없지. 남녀의 입장이 거꾸로 되어도 우리가 임신하고 출산하는 괴로움을 당하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남성 측의 이러한 자기 분열과 딴판으로 여성 측의 단결은 철저한 바 있었다. 2068년의 칼렘의 선언 이래 여성세계 쟁취를 위한 비밀 결사가 그들 간에 광범하게 그물을 펼치고 있었다. 이 당시 남성들의 조직체란 등산이나 마작 구락부 등 오락을 위한 친목 기관이 있었을 뿐이었다. 예외로 스톤만 일당 따위의 만용을 부린 무리가 있었긴 나 그들은 여성들처럼 종국의 승리를 위한 치밀하고 끈덕진 전략 조직체에 비할 바 아님은 몰론이었다.

   전투 의식에 있어, 그리고 조직 면에 있어 이렇듯 불리한 데다가 여성 측은 남성 측에 없는 자위대까지 전쟁 이전부터 가지고 있었다. 즉 스톤만 폭도 사건 덕분으로 여성 측만이 보유할 수 있는 사병 제도가 성전 발발과 동시에 크게 효과를 발휘하여 전광석화로 각지에서 전과를 올려 차후의 필승 태세를 갖추게 하였다.



p.206

   하여간 그 서류를 받아 놓자, 사회자가 선구에게 발언을 요청했다. "이번엔 우선구 씨가 말씀 좀 해 주셔야겠군요. 과거를 돌이켜 볼 때 그 당시 가장 비극적인 현상은 무엇이었을까요?"

   선구는 잠시 궁리하였다. 과거사에 있어 범세계적인 비극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빈부의 차. 사상의 대립. 천재지변 등등.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전쟁과 이에 대한 공포가 으뜸일 것이다. 자신이 비커츠섬에 간 동기도 주로 여기에 있었다.

   '전쟁'이라고 말하려다가 선구는 다시 생각하였다. 이건 너무 단순하지 않을까 하여 잠시 망설이던 중 얼핏 머리에 떠오르는 게 있기에 즉흥적인 대답을 하였다. "내가 아는 가장 큰 비극은 그 시대 여성들의 치마가 몹시 짧았다는 것."

   일동은 약간 어리둥절한 눈치. 자기네들끼리 맞대고 멀거니 바라보기도 하고 이리저리 머리를 기울여 수수께끼 같은 우선구의 말을 해독고자 노력하기도 했다.

   "좀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시죠." 사회자가 청했다.

   선구는 차분히 입심을 놀렸다. "구세기에 있어 여성은 상대적인 남성에 대해 스스로 자신을 보호하고 또 남성을 여성의 비호자로서 대우해야 마땅했을 텐데 대대수의 여성은 스스로 자신의 취약성을 노출하고 남성의 자제력을 마비시키는 데 노력한 것 같아요. 그 본보기가 여성들의 짧은 치마였습니다. 오직 자신의 육체미를 남성들에게 자랑하겠다는 아무 실속 없는 이유 하나로 추운 날씨에도 여성들은 자신의 하체를 노출하고 있었죠. 그 결과 거의 모든 여성의 내장 기관은 형편없이 됐어요. 수지맞은 건 부인과 의사들뿐이었죠. 개업 의사의 과반수는 부인과 의사였나 봅니다. 남성들은 남성들대로 여성 측의 도발 해윙에 불나비 모양 푸드덕거리다간 자신과 상대를 불살라 버리기 일쑤였고요." (중략)

   "댁에선 중대한 과오를 범하고 있군요. 구세대의 여성들이 설사 자신의 육체를 노출했다손 치더라도 그건 자의에 의한 것보다는 남성들의 강요에 의한 것이었을 걸요. 남성들은 그런 짓을 좋아했대요. 기록에 엄연히 나타나 있어요."

   "그렇지." 맞장구치는 사람이 있었다. 대머리였다. "그 시대에선 어떤 연회석이나 집회 장소에서나 남성들은 여성을 발가벗겨야 직성이 풀렸나 봅니다." 그녀는 내뱉듯 말했다.

   "아니, 내가 말한 건 쇼의 장면이 아니라 일반 여성들의 평상시 복장을 지적한 거예요.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선구는 당황하여 변명했으나 소용없었다.

   이번엔 금붕어 모양 눈알이 튀어나온 학자가 노기 띤 어조로 외쳤다. "복장이고 뭐고 매한가지예요. 그 시대에 있어 매사를 결정짓는 건 강자의 고집뿐이에요. 여성들은 오직 남성들 비위에 맞춰서 행동했다 뿐이에요."

   "그렇지. 그래." 다들 맞장구쳤다.

   "매사에 강자의 뜻대로 된 거지. 어려운 사람이 뼛골 빠지게 일해야 했던 거라든가, 여성이 발가벗어야 했다든가…,"

   선구는 답답하였다. "아니, 그런 문제와 내가 말한 건 이질적인 거예요."

   "아니요. 본질적이오." 두어 사람이 일제히 외치는 것이었다. 선구는 골치가 아파졌다.

   "하하하." 루펜사 박사가 뭐가 우스운지 크게 웃었다. 그녀는 사뭇 점잔을 빼며, "이 점도 바로 양성문화의 복잡한 모습 그거란 말이에요." 일동을 휘둘러보며 뽐냈다. 선구는 아예 입을 다물기로 마음먹었다.

   그러자 오소리 모습의 양반이 루펜사 박사에게 이의를 제기하였다. "여성의 짧은 치마는 양성문화의 특색이 아니라 웅성문화의 그것이겠지요."

   "아니, 양성문화의 특색이오." 루펜사 박사는 단언하는 것이었다.

   "아니요." 오소리도 버텼다. "그 시대의 짧은 치마는 전적으로 여성의 노예적 표시이니 분명 웅성시대의 특색이오."

   "천만에. 짧은 치마는 다분히 심미적 자위행위니 양성문화의 특징이오."

   "심미적 자위행위라구요? 천만의 말씀. 노예의 표식입니다."

   "아니래두."

   "그렇지 않대두."

   두 사람은 서로 양보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도 두 편으로 갈려 왈가왈부 법석이었다. 보다 못한 끼허햅 원장이 단을 내렸다. "오늘은 시간도 없고 하니 이만하고 헤어집시다."

   일동은 기다렸다는 듯 우르르 자리를 떴다.



p.254

   그리고, 사흘 후에 우선구와 쏠리는 다시 만났다.

   "그동안 잘 생각해 봤겠죠?" 쏠리의 물음에 선구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우리 일에 협력하겠소?"

   "그 일을 결정하기 전에 먼저 내 청을 들어주시오."

   "무슨 청?"

   "나에게 자유를 주시오."

   "자유?"

   "그렇소. 나는 자유를 원하오. 억압당하면서 남의 일에 협력한다는 건 굴북에 지나지 않는 거요. 나는 그런 일은 할 수 없어요." 선구는 또렷하게 말했다. 사흘 동안 곰곰이 생각한 후 도달한 결론이기에 선구는 거침없이 선언할 수 있었다.



p.278

   시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댁에서 비커츠섬에서 나온 지도 반년이 지났군요. 그간 괴로움도 많이 겪으셧지만, 그런대로 관찰하신 것도 없지 않을 거라 생각합니다. 이에 대해 고견을 듣고자 해요."

   시니 팔의 어조에는 상대방의 식견의 깊이를 시험해 보겠다는 의사가 뚜렷했다. 선구는 한 차례 심호흡을 하면서 어찌 대답해야 할까를 궁리하였다.

   "내 경험을 말하라면 오직 경악과 당혹의 연속이라 할 수밖에 없겠죠. 그러나 나는 지금 그런 걸 말하고 싶진 않소. 나는 지금 한 가지 커다란 의문점에 사로잡혀 있어요." 이렇게 말머리를 꺼내 놓고 선구는 침착하게 상대의 기색을 살폈다. 시니 팔도 신중한 자세로 전 세대 인간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선구는 말을 이었다. "내가 의심하는 것은, 나는 그도안 오랜 잠을 자고 났는데 깨어보니 세상은 별로 다랄진 게 없는 것 같아서, 그 까닭을 의심하고 있어오."

   이 말에 시니 팔은 두 눈을 놀란 토끼 모양 동그랗게 뜨고 선구를 응시했다. "달라진 게 없다고요?"

   "그야 겉모양은 많이 달라졌겠죠. 그런 변화는, 비록 자유롭지 못한 환경에 있었지만 나도 어느 정도 인식할 수 있었소. 그러나 더욱 본질적인 면, 인류 사회의 기본 형태는 조금도 변함이 없는 것 같아요. 인간 대 인간, 또는 어느 집단 대 집단의 대립, 이를 해결하기 위한 심각한 투쟁, 심지어 인간 상잔의 처참한 모습마저 예나 지금이나…."

   선구가 논설을 벌이는 걸 시니는 급히 손을 저으며 막았다. "아니, 아니 그게 무슨 말이죠? 대립과 모순은 이미 선사시대의 전설로 끝난 지 오랩니다. 신기원 이후 인류 최초의 이상 사회가 이루어졌는데, 인간 상잔이란 당치 않은 말입니다."

   선구는 상대의 강경한 반박에도 불구하고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시니 팔은 성난 얼굴로 선구를 노려보다가 한결 태도를 누그러트리고 타이르듯 말했다. "당신은 아직 깨닫지 못하는 모양이나 인류 역사는 깡그리 뒤집혔어요. 인간이란 싸우기 위하여 태어나고 싸우기 위하여 산다는 게 선사시대에선 진리였을지 모르나 오늘날 이 사회는 모든 대립 투쟁의 씨가 말끔 처리되고 말았단 말이에요.

   첫째 식량, 둘째 영토, 셋째 오락, 기타 사람이 필요로 하는 모든 물자와 수단이 물이나 공기 모양 무제한으로 제공된단 말이에요. 이제는 싸우려도 싸울 조건이 없어졌어요. 문자 그대로 이상 사회죠. 혹 당신은 종족 번식의 본능, 즉 성문제가 아직 투쟁의 씨로 남았다고 주장할지 모르지만 진성시대의 오늘날, 과거와 같은 양성 대립의 어리석은 비극은 있을 수 없어요. 이것이 변화가 아니고 뭐죠?"

   패기 넘친 시니 팔의 태도에 대하여 선구는 한층 더 부드러운 어조로 맞섰다. "오늘의 사회가 진정 알력과 투쟁이 없는 이상 사회일진데 강자와 약자의 뚜렷한 분열, 지배자와 예속자의 한계가 이토록 선명할 까닭이 없을 텐데요."

   시니 팔은 이해 못 하겠는지 고개를 갸웃했다.

   "이상 사회라면 진리가 사회활동 전반의 원동력이겠고, 진리 즉 질서로 통할 겁니다. 그런데 내가 보기엔 현 사회를 끌고 나가는 건 진리가 아니라 힘, 즉 강력한 권력이 진리를 대신하여 전체를 압도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렇지 않을까요?" 선구가 말을 마치고 상대의 반응을 살폈다.

   "글쎄요. 그건 피상적 관찰일 걸요. 물론 우리는 전 세계를 통틀어 강력한 중앙 집권 체제를 채택하고 있어요. 그러나 이건 댁에서 생각하는 억압을 위함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전체 주민을 위하고 주민이 원한 방식이죠." 시니 팔이 대답했다.


   선구는 빙그레 웃었다. 선구가 웃는 걸 보고 시니 팔은 약간 어리둥절했다. 전 세대의 유물이 왜 웃는지 분간을 못 해서였다. 호의의 뜻인지 빈정조로 그러는지 얼핏 가름이 안 되는 그런 웃음이었다. 시니가 판단 못 한 것도 무리가 아닌 것이 사실 선구 자신도 어떤 뚜렷한 이유가 있어 웃은 것이 아니었다. 다만 이 사람의 입에서 옛적 정치인들이 흔히 쓰던 말투가 튀어나오자 절로 웃음이 나왔다.

   "하하하. 물론 그렇겠죠. 그러나 인민을 위하여 인민이 원한 정치일지라도 반드시 결과도 그렇다곤 볼 수 없을 걸요."

   "예?" 시니 팔은 비로소 상대의 웃음이 호의적이 아님을 알자 표정이 굳어졌다.

   선구는 '아차, 실언했구나.' 후회도 없지 않았으나 내친걸음이라 끝을 맺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기억하건대 예부터 어떤 집권자고 간에 인민을 위하지 않는다고 말한 사람은 없었다고 봅니다."

   "왜 그런 소릴 하시죠?" 시니 팔의 표정은 더욱 굳어졌다.

   "정치의 성과란 인민의 생활 상태에서 찾아봐야지 위정자의 설명만으론 판단할 수 없다는 겁니다."

   "결국, 댁에선 진성사회의 성과를 부정하시군요."

   "아니, 그렇지 않아요. 짧은 나의 경험 중에는 감명 깊은 것도 있었으나, 반면 의심스러운 장면도 없지 않았다는 것뿐이죠."

   "뭣을 어떻게 보셨기에 그러시죠? 구체적으로 지적해 보세요."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더군. 나와 마주 앉아 이야기하면서도 나를 진성인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중략)

   대수롭지 않게 넘겨 버리려는 시니의 태도에 개의치 않고 선구는 말을 이었다. "나는 이런 현상을 다음 두 가지 중의 하나로 봅니다. 한 가지는 인민의 판단력을 저지하는 어떤 장애가 있는 게 아닐까? 다른 한 가지는 오늘의 진성인은 예전의 여성과는 어지간히 변질되어 그 자신이 반여성화함으로써 남성을 알아보지 못할 지경에 이른 건가?"

   "응?" 시니의 눈망울이 신경질적으로 굴렀다.

   "전자의 경우라면 오늘의 사회는 그만큼 타락한 것이고, 후자의 경우라면 오늘의 진성사회란 최초의 칼렘주의로부터 많이 이탈하여 혁명은 실질적으로 뒷걸음질 치고 있는 게 아닌지?"



p.287

   당선된 따루는 지역권 행정 요원 중에서 자기 정부의 각료를 뽑았다. 이들 각료는 인민원의 비준을 거쳐 정식으로 임명되게 마련, 각료를 혜민어로 '시니'라 했다. 시니 하면 기재 중의 기재들이다. 그런데 이들이 대개 새파란 젊은이들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범세계적으로 뒤져내는 기재라 두뇌 명석하고 재기발랄해야겠는데, 이 점 늙은이보다는 아무래도 젊은이에게 기울어졌다. 그 위에 자신의 사생활 전부를 공개하고 나서는 용기와 정열에 있어 젊은이는 노인네들에 비할 바 아니었다.

   사실 젊은이란 자랑스러운 것이다. 선구는 그 옛적에도 모든 진리의 발견자나 문물의 발명가는 거의 서른 살 이전의 청춘이었다고 기억했다. 일생 일대에 있어 가장 정력 왕성하고 지능이 고조된 시기가 청춘기니 이는 당연히 현상이리라. 다만 구세대에 있어 장년 이후의 노인들이 모든 분야를 주름잡은 것은 기교나 술수가 젊은이보다 훨씬 능글맞은 데 유래했다.

   그때의 사회 분위기는 능글맞게 구는 사람들이 판치게끔 되어 있었으나, 일체의 허식이 통용 안 되는 현대 진성사회에선 참된 실력이 매사를 결정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내용과 제도를 알게 되자 선구는 어떤 압박감에 가슴이 묵직해졌다.

   이토록 젊고 힘찬 일꾼들이 이끌고 나가는 여인천하의 됨됨이가 짐작되었다. 이미 경험한 갖가지 문물의 우수성만 보더라도 알 만했다. 그리고 전날 구경한 초급학교 생도들의 초롱초롱한 눈동자에 서린 총기며, 자라나는 이들을 지키는 노련한 교육자들의 진지한 모습. 여기서 벌써 여인천하의 견고성을 인식한 바 있었던 것이다.

   여인천하의 현재는 강하고 앞날도 앞찬 바 있었다. 과연 구세대를 무너뜨리고 오늘을 이룩한 까닭이 있다 하겠다.

   그럼 구세대는 허물어져야 마땅했던가? 남성이란 물거품처럼 말살되어야 할 보잘것없는 것이었던가?

   칼렘주의는 인류 진화의 진리일까? 여인천하는 과연 시니 팔의 말처럼 이상 사회라 할 것인가?

   선구는 수긍할 수 없었다. 그럴 리가 없었다. 지금 사회가 이상적인 사회라곤 볼 수 없었다. 비록 짧은 기간이었으나 자기는 허다한 의문점을 목격하지 않았는가? 비커츠섬의 병사들이며, 제5국의 직원들, 그들은 결코 이상 사회의 이상적 인민들은 아니었다.

   그보다도 비커츠섬의 기밀실에서 처음 눈을 뜬 그때로부터 오늘날까지 접촉한 수많은 사람 거의 대다수의 안색에 서린 주저, 고독, 회의의 기색은 무엇을 뜻함인가?

   결코 행복한 그들이 아니었다. 절대 이상 사회에서 호흡하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이 사회는 어딘가 잘못이 있었다. 앞날도 절대 평탄치 않을 것이다.


p.309

   선구는 작가 비봐부리힐에게 그만한 걸작에 관객이 없어 유감이라고 위로의 말을 했다.

   "우린 아예 관객은 염두에 두지도 않지요." 비봐부리힐은 오히려 태연했다.

   "관객 없는 연극이란 무의미한 게 아닐까요?" 선구는 작가의 허튼소리에 일침을 놓았다.

   "물론 관객 없는 연극이란 말이 안 되는 소리죠. 우리도 그건 알아요. 다만 우리는 오늘의 관객에 기대하지 않을 뿐이죠. 내일의 대중을 위하여 우린 참된 연극의 명맥을 이어가는 전령군 노릇을 하는 셈이에요."

   비봐부리힐의 말이 그럴듯하긴 했다. 그러나 선구도 자기 나름의 예술관이 있는 사람이었다. 즉각 반박을 했다. "내일을 관객을 위한다는 것도 훌륭한 의의가 있겠죠. 그러나 오늘의 관객을 잡지 못한다는 건 그만큼 힘 부족, 노력 부족이 아닐까요?"

   "모르시는 말씀. 우리도 과거에는 오늘의 관객을 끌어모으고자 애써 보기도 했죠. 그들의 기호에 맞춰 레퍼토리를 꾸미기도 했어요. 그 결과 연극 자체가 질식할 위기에 부딪혔지 뭡니까. 댁 같은 관객이면 문제야 없지만, 우린 아예 오늘의 관객층엔 손들었어요."

   "아니, 오늘의 관객층은 그다지도 저속한가요?"

   "세계적인 일류 연극인들의 모임인 파랑새 공연에 댁들을 빼고는 단 한 사람도 얼씬거리지 않았다면 알겠죠."

   "그건 선전의 부족이 원인 아닐까?"

   "선전이라고? 누구에게 선전을 하란 말이오? 소귀에 경 읽는 편이 낫지. 오늘의 사회인들은 예술에는 장님입니다. 지금 나의 작품을 보셨죠. 진성인은 어린 시절이 꽃이지요. 자라남에 따라 허수아비가 돼 버려요. 정부 시책이 졸렬하기 때문이죠. 오로지 그게 원인입니다. 정부는 사회인들을 모조리 바보로 만들고 있어요. 잘 아시겠지만 지금 전 인구의 90퍼센트는 변태 성격자가 됐어요. 이거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먹고 자고 나면 하는 짓이 있잖아요. 참 기가 막혀. 글쎄 헤어지루 이 거리에도 구석구석 판을 치는 게 께브, 이거 되겠어요. 그야 따분한 이 세상에 께브라도 있어야 하긴 하지. 솔직히 말해서 나도…, 아니 내가 취했나허허허."



p.341

   의술은 인류 초창기에선 요술 주문을 포함한 정신 요법으로 시작하여차츰 약물 요법으로 전환구세대는 약물 만능 시대를 이루었다고 했다현대의 자연 요법이란 식이요법을 병용하는 건데 대부분의 내과 계통 환자 치료는 식사와 목욕으로 처리되었다약이나 주사도 있긴 있되 아주 특수한 경우에만 사용했다.

   "구세대의 의학은  어처구니없었죠." 소보논 병원에 있을  그곳 의사들이 종종 말하곤 했다. "구세대의 약이 효과가 없는  아닙니다올바른 진찰과 처방으로  약은 물론 해당 병에 효율을 나타내죠그런데 문제점은 약이란 어느 것이고 예외 없이 부작용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에요그래서 제아무리 적합한 투약이라 할지라도  가지 병을 고쳐놓는 동시에 별개의 다른 고장을 일으키게 되는 걸요구세대의 의사들이나 약제사들도  사실을 모르고 있지는 않았어요그러면서도  기묘한 방식을 몇백  동안 채용하고 있었으니 기가  노릇이죠.

   주사의 경우는  모순 현상이 한층  심합니다말도 마세요구세대가 암흑시대라는  의술면  가지만 봐도 족할 정도지요그럼 지금 형편은 어떠냐고요물론 구세대와는 판이하죠첫째 병리학 이론부터 달라요병이란 도대체 뭐냐한마디로 해서부자연한 생활로 인한 결과적 현상입니다먹지 않아야   먹었거나 먹어야    먹었거나또는 하지 말아야  짓을 했거나 필요한 행동을  했거나이래서 병은 발생하는 거예요이에 대한 치료 방법이야 뻔하죠자연 원칙에 순응하는 이게 전부예요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우선 정신 안정다음의 충분한 영양 보급이거죠.

   뭐라고요바이러스의 존재를 부인하느냐고요 부인하겠어요현대 의학은 바로 바이러스의 연구를 토대로 하여 발전하고 있어요모든 바이러스는  자체에 대항하는 반생명체를 수반하고 있다는 사실이 실증된  오래입니다 현상은 미생물계의 원칙일  아니라 생물계 전반 걸음  나가선 자연계의 원칙이기도 해요하나의 생명체하나의 활동체에 대항하는 반대 세력의 존재야말로 자연의 섭리지요서로 반대하는 어느 한쪽의 세력이 꺾이는  자연의 평형은 무너지고 부자연 형태가 형성됩니다바이러스의 번식은 인간 생명을 위협하나 그와 동시에 바이러스의 소멸은 인간의 존속을 부인하게도 되죠건강이란 바로 생명체와 반생명체의 평형 상태를 표시하게도 되죠건강이란 바로 생명체와 반생명체의 평형 상태를 표시하는 거예요의사는  평형 상태를 지키는 파수꾼이라   있고 건강 진단은 평형도의 측정이란 할까요."

   그러므로 건강이 좋지 않다는  바이러스의 평형 상태가 고르지 않은  치료 방식은 위축된 일방 세력에 활력을 공급하는 것이었다.

   질병의 예방은 신체 내부에 머무르고 있는   세력이 고루 왕성한 활동을   있는 바탕 건전한 체질을 유지하게 하면 된다체질 조성은 부작용을 퍼뜨리는 구세대의 투약 방식을 지양하고 영양 보급의 조절로 이룩할  있다는 것이었다.



p.375

   사회인은 누구나 연령거주신앙지위  여하한 조건에 구애없이 '홀랜의 ' 이용할  있습니다그리고 이곳 이외에서의 성행위는 일체 금지되어 있습니다위법자는 의법 처단됩니다정부는 법으로 엄격히 개인의 성행위를 통제하는 반면개인 성행위의 만족을 충반시키기 위하여 항상 최선의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고 있습니다.

   홀랜법을 제정하여 '홀랜의 집은 인민의 건강을 보호하고인민의 기호를 존중하고긍지를 보장'하도록 명시되어 있습니다. '홀랜의 ' 사회인이 있는 곳이면 어디나 설치되어 있고 언제나 어디서나 면허증 소유자라면 누구에게나 항상 개방되어 있습니다그리고 사용자를 위하여 비밀을 보장합니다.

   다만 다음의 경우에는 사용이 제한됩니다. '사용 빈도가 지나쳐 본인의 건강이 염려될 홀랜의  시설을 고의로 파괴했을 .'

   홀랜의  사용 절차는 먼저 면허증을 검정기에 넣고 검정실에 들어가 체력 검정을 받습니다표준 지수가 되어야 홀랜의 방으로 들어갈  있고모든 순서를 질서 있게 마치고 나면 본인에게 면허증이 반환되게 마련입니다.

   


p.376

   실로 뜻밖의 서신이었다뜻밖의 편지이긴 했으나 여기 적힌 내용은 선구가 요즘 가장 절실하게 알고자  문제의 초점 바로 그것이었다선구는 지금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문젯거리가 '()' 걸려 있다고 보고 있었다.

   홀랜과 께브의 대립이  세상을 혼란의 도가니로 만들고 있는 모양이었다께브의 실태는 일찌감치 비커츠섬에서 우연한 기회에 목격한  있었다그러나 홀랜이 어떻게 생긴 것인지 선구는 전혀 몰랐다홀랜의 내막을 몰라서는 현대를 연구 이해할 수조차 없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선구는 최근 누차 께브와 홀랜의 대립상을 경험하고 있었다비커츠섬의  경비병이 께브 탄로로 해서 재판받는   이후극작가 비봐부리힐이  말을 떠드는  들었고리리시노는 대담하게 홀랜과 께브 문제를 들고 세계 정부에 대드는 장면도 있었다샘앤 교수도 이를 언급하지 않았던가.

   어디를 가나 이게 문제인 성싶었다혹시 이것이  사회 밑바탕에 깔린 근본 모순점일지도 모르겠다전잘 고전문화연구원 끼허햅 원장이 말한바 정부 시책이 갈팡질팡하는 원인도 여기 있으며 일부에서 떠드는 화성 공포론이나 토벌론의 발생 원인도 여기 있지 않을까?

   아무튼알아봐야  문제라고 선구는 요즘 느끼고 있던 참이었다알아봐야 하긴 하겠는데 섣불리 손댈  없는 것임을 선구도 이미 알고 있었다.

   전날 소보논 병원의 오유지는 '여성'이란 말에도 발끈하지 않았던가함부로 알려고 덤빌  없는 성질의 것이었다그러나 알아야겠다홀랜이란 도대체 뭐냐?

   이런  시니 팔의  서신이  것이었다아주 시기에 적합한 선물이었다하기야 시니 팔은 민완 정치가였다우선구로 하여금  문제에 잔뜩 관심을 갖게  다음 슬쩍  서신을 보냈는지 모르겠다그건 아무래도 좋다홀랜이란 과연 어떤 것이냐?

   이제 금단의 문은 절로 열렸다.



p.382

   사실 세계 정부가 수립된 이후 가장 거창하고 가장 복잡하고 가장 처리 곤란한 행정 부문이 성행정입니다성본능은 인간인 이상 누구나 가졌을  아니라 누구에게도 양보할  없고 누구도 제지할  없는 강렬한 작용을 가진 본능이며모든 생활은 여기에 달려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겠지요성문화가 바로 인류 문화라고도 하잖습니까이다지 소중한 ''이긴 하나 한편 ''처럼 안이하게 대해지는 것도 드물 겁니다.

    점은 인간과 공기의 관계와도 같습니다그러나 공기에는 임자가 없고 성격이 없으나 성에는 불가침의 소유권과 저마다의 개성이 있습니다뿐더러 개인에 따라지방에 따라종족에 따라그리고 시간장소환경에 따라 성행위의 행태는 실로 천태망상이니 성행정을 담당한 책임자는 처음에는 성의 의의성행위의 규범조차 손을   정도였습니다.  

   한때는 '성문제'에 관해선 행정 조치를 취하지 말자는 의견이 우세한 시기도 있었으나, 그렇다고 방치할 수도 없는 사회 실정에 비추어 세계 정부는 장기간에 걸친 연구 검토 끝에 '홀랜법'을 제정 공포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세계 인민은 이 법에 의하지 않고는 성행위를 행사치 못하게 한 거죠.  

   입법 취지는 세게 인민의 건강을 보호하고 행복을 보장하자는 데 있습니다. 홀랜법이 일부 지방 사회에서 시험적으로 채택되고 차츰 여러 사회권으로 퍼져 드디어 세계 정부의 통일법으로 시행된 건 지금으로부터 15년 전입니다. 홀랜법의 공적은 실로 막대합니다. 인민의 건강과 행복을 보호 보장함과 아울러 성행위를 둘러싼 지방별, 종족별의 분파 작용을 없애 준 고마운 법입니다.

   그런데 최근 홀랜법을 위반하는 사태가 반발하여 세계 정부의 골치를 때리고 있습니다. 많은 워시두가 '홀랜의 집' 밖에서 성행위를 하는 경향이 늘어갑니다. 그들은 홀랜 집의 시설 대신 같은 워시두끼리 어울리는 겁니다. '께브'라는 거죠. 귀하는 과거 께브 중의 한 형태를 비커츠섬에서 보셨을 겁니다.

   처음 세계 정부는 께브 행위를 소홀히 보고 단속 대상으로 삼지 않았습니다. 이 변태 행위는 일시적 현상이고 오래가지 못하리라 보았기 때문입니다. 께브는 홀랜에 비해 너무나 약점이 많습니다. 상대가 꼭 있어야 하고, 남의 눈을 피해야 하고, 따로 기구가 필요하죠. 이런 불편 외에도 본인의 건강에 해롭고, 느끼는 오르가즘도 께브는 홀랜에 미치지 못합니다. 그런 점으로 보아 께브는 자연도태될 것으로 봤던 겁니다.

   그러나 현실은 우리의 기대를 배반하였습니다. 께브는 차츰 창궐 일로에 있습니다. 그 폐단도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께브 상습자들은 본인들도 모르는 사이에 심리적 변화를 일으켜 성행위에 있어 능동자와 수동자의 구별이 굳어지면서 능동자는 수동자를 지배, 억압, 애무로써 대하고, 수동자는 굴복, 인내, 자학을 스스로 취하는 형편입니다. 이들은 유유상종으로 끼리끼리 모여 집단적으로 공공연히 홀랜법을 유린하고 심지어는 과거의 웅성시대를 동경하는 탈선행위까지 저지르는 겁니다.

   귀하는 혹 웅성시대를 동경한다니까 회고감에 젖을지도 모르나 귀하가 비록 웅성일지라도 저들 께브 도당들을 결코 용납하지는 않으리라 본관은 빋습니다. 귀하는 웅성인인 동시에 훌륭한 이성인이시니까요.

   께브 상습자들은 분명 의학적 견지에서 보아 환자들입니다. 그들의 정신 상태는 불건전하고 공동 사회의 발전을 아예 외면하고 있습니다. 드디어 세계 정부는 '께브 금지령'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역효과였습니다. 그들은 음성적 형태에서 감히 양성화하였습니다. 그만큼 그들의 세력은 늘어난 겁니다.

   여기에 곁들여 두버무 소동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두버무'란 일체의 성행위를 거부하는 워시두를 말하는 겁니다. 께브고 홀랜이고 성행위는 모조리 거부한다는 과격파입니다. 반동 세력 께브에 대한 반동의 반동인 두버무주의자들은 '인간에 있어서 성이 있는 한 모순은 근절되지 않는다'라는 표어 아래 스스로 성수술을 받아 성호르몬선과 수란관을 제거해 버리고 마는 겁니다. 이러면 께브가 안 되긴 하지만 후생은 단절되고 마는 거죠.

   두버무주의는 상상외로 번져 이제는 중대한 사회 문제로 등장하였습니다. 일부 사회권 정부는 당황한 나머지 께브 금지령을 철회하여 이를 묵인하는 대가로 께브 상습자들의 배출 난자를 수집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인구의 감소를 막고 보자는 소극책이죠.

   이쯤 되니 의기양양한 건 께브주의자들입니다. 자기네들을 용납하는 사회권에서는 터놓고 동조자들을 끌어모으고, 반대하는 지역에서는 사회인 친목 단체를 가장하여 저들의 세력 확장에 발 벗고 나서고 있습니다. 이곳 헤어지루 지역에서도 '희망과 우정의 모임'이란 단체가 있습니다. 그들의 대표가 며칠 전 귀하를 방문했던 리리시노입니다. 이러한 현상에 불만을 느낀 몇몇 사회권 정부에서는 께브 행위자들을 극형으로 대하여 이에 대한 반발 또한 치열합니다.

   세계 정부는 이 문제에 대하여 결단을 내려야 할 처지에 몰렸습니다. 께브를 용인하느냐 박멸을 기하여 강경책을 취하느냐 기로에 섰습니다. 어느 사회권에서는 중화책을 써 보기도 했습니다. 즉 께브 행위를 용인은 하되 '홀랜의 집' 안에서만 하도록 한 겁니다. 이럼으로써 지나친 방종ㅇ르 통제하고 능동자-수동자의 형식을 타파하자는 거죠. 결과는 신통치 않은 모양입니다. 께브 상습자들은 극성스럽게 자웅의 형식을 고집하고, 심지어 특정 수동자를 사이에 두고 능동자들 사이에 결투 행위가 발생하는 사태랍니다.



p.387

   께브에는 홀랜에서 얻을 수 없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설사 극형이라는 무시무시한 위협이 있다기로 께브가 이끄는 매력이 있는 한 세계 정부가 제아무리 억지를 써봤자 성과는 없을 것이다.

   께브는 남의 이목을 피해야 하고 오르가즘이 홀랜보다 못하다는 결점이 있다 하더라도 홀랜에 없는 '애정'이 있었다. 제아무리 발달했다기로서니 오토메이션은 오토메이션. 개계에는 애정이 없었다. 감정을 속삭이고 의지하고 받아 주는 멋이 없는 것이다.

   남성을 말살하고 배우자의 존재를 부인하는 단성인으로서 옛적의 자웅의 흉내를 내는 께브 행위는 그야 시대 역행이요, 분명 반동임에 틀림없으리라.

   한편, 께브 유행에 대한 반작용으로 두버무가 출현한 것도 당연했다. 양성에서 단성으로 옮겨온 이상, 더욱 순화된 독신주의, 단신종료사상으로 발전함은 있음 직한 일이라 하겠다. 

   이 사상이 보편화하여 인류의 씨가 정말 끊어져서야 안 되겠지만, 설사 그러한 결말이 된다 해도 어찌 보면 무방하고 당연하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인생의 철학적 진리가 허무라 할진대, 허무한 결말은 가장 이상적 형식이 아니겠느냐. 양성에서 단성으로, 그리고 무성으로, 자연에 귀화함도 좋지 않겠는가?

   이거야말로 인류사의 마지막 형식으로 가장 어울릴지 모른다. '두버무' 만세다. 이렇게 생각하니 만사는 해결된 성싶었다. 이것저것 깊이 파고들 필요도 없겠다.  



p.399

   "허, 또 변호사 타령이로군요. 그 언변 좋고 재치 있고 고집 센 변호사 말이오? 사형수를 무죄로 만들기도 하고 죄 없는 사람을 대신 사형수로 몰기도 하는 재주꾼, '변호사란 법을 팔아먹는 허가 받은 사기꾼'이란 말이 있었잖아요. 이건 현대인이 말한 게 아니라 당신네 시대의 고전에 나오는 말입니다. 원고의 돈을 받으면 원고편이 되고 피고 청탁을 받으면 피고편, 때로는 악당의 앞잡이가 되어 자기네들의 위법이 옳다고 버티기를 서슴지 않는 철면피를 간판으로 삼는 장사꾼이 변호사란 직업이었다죠.



p.442

   시끄러운 문제란 물론 께브 소동이었다. 이곳 감방의 라디오는 외면하고 있지만 지금 온 세상은 홀랜과 께브의 대립으로 온통 야단법석이라는 리긴의 얘기였다. 그렇다면 급작스러운 화성전쟁론의 이유가 이해되기도 했다. 정부는 소란스러운 성소동으로부터 대중의 이목을 전환하기 위하여 전쟁 분위기를 조작할 수도 있을 것이다.

   성소동이 가라앉으면 외계 전쟁의 위기 역시 싱겁게 해소될 경우도 상상이 되었다. 이렇게 생각하면 걱정만 할 것이 아니겠으나 혹 모를 일이었다. 인위적으로 조작한 위기가 그대로 발전하여 현실화할 수도 있었다. 아니 세상일이란 대개 이런 경로로 저질러지는 게 아닐까?

   돌이켜 살펴보면 인류 역사는 흔히 하찮은 일, 어리석은 주관, 당치도 않은 부조리가 진리나 이성을 몰아내고 일으킨 변란이 연속이라고 볼 수도 있었다. 어리석은 역사의 타성은 이제 또다시 어떤 참극을 빚어낼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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