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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서재 Part 1

어쩌면 별들이 너의 슬픔을 가져갈지도 몰라

#14 김용택 [어쩌면 별들이 너의 슬픔을 가져갈지도 몰라]

by 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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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

이문재


문득 아름다운 것과 마주쳤을 때

지금 곁에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떠오르는 얼굴이 있다면 그대는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그윽한 풍경이나

제대로 맛을 낸 음식 앞에서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 사람

그 사람은 정말 강하거나

아니면 진짜 외로운 사람이다


종소리를 더 멀리 보내기 위하여

종은 더 아파야 한다




당신의 눈물

김혜순


당신이 나를 스쳐보던 그 시선

그 시선이 멈추었던 그 순간

거기 나 영원히 있고 싶어

물끄러미

꾸러미

당신 것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내 것인

물 한 꾸러미

그 속에서 헤엄치고 싶어

잠들면 내 가슴을 헤적이던

물의 나라

그곳으로 잠겨서 가고 싶어

당신 시선의 줄에 매달려 가는

조그만 어항이고 싶어





자화상(自畵像)

윤동주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 봅니다.

우물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엽서집니다.
도로가 들여다 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수선화에게

정호승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

갈대숲에서 가슴검은도요새도 너를 보고 있다.

가끔은 하나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고

네가 물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다.

산 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번씩 마을로 내려온다.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퍼진다.




청포도

이육사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 주저리 열리고

먼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 단 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사평역에서

곽재구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 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름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 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장을 달고

밤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한 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긍정적인 밥

함민복


시 한 편에 삼만 원이면

너무 박하다 싶다가도

쌀이 두 말인데 생각하면

금방 마음이 따뜻한 밥이 되네.

시집 한 권에 삼천 원이면

든 공에 비해 헐하다 싶다가도

국밥이 한 그릇인데

내 시집이 국밥 한 그릇만큼

사람들 가슴을 따뜻하게 데워줄 수 있을까

생각하면 아직 멀기만 하네

시집이 한 권 팔리면

내게 삼백 원이 돌아온다.

박리다 싶다가도

굵은 소금 한 됫박인데 생각하면

푸른 바다처럼 상할 마음 하나 없네.




고독하다는 것은

조병화


고독하다는 것은

아직도 나에게 소망이 남아 있다는 거다

망이 남아 있다는 것은

아직도 나에게 삶이 남아 있다는 거다

삶이 남아 있다는 것은
아직도 나에게 그리움이 있다는 거다

그리움이 남아 있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곳에
아직도 너를 가지고 있다는 거다

이렇게 저렇게 생각을 해보아도
어린 시절의 마당보다 좁은
이 세상
인간의 자리
부질없는 자리

가리울 곳 없는
회오리 들판

아 고독하다는 것은
아직도 나에게 소망이 남아 있다는 거요

소망이 남아 있다는 것은
아직도 나에게 삶이 남아 있다는 거요

삶이 남아 있다는 것은
아직도 나에게 그리움이 남아 있다는 거요

그리움이 남아 있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곳에
아직도 너를 가지고 있다는 거다




사막

오르탕스 블루


그 사막에서

그는 너무나 외로워


때로는

뒷걸음질로 걸었다


자기 앞에 찍힌

발자국을 보려고




흔들리며 피는 꽃

도종환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곷들도

다 한들리면서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웠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걸어보지 못한 길

로버트 프로스트


노란 숲 속 두 갈래길

나그네 한 몸으로

두 길 다 가 볼 수 없어

아쉬운 마음으로 덤불 속 굽어든 길을

저 멀리 오래도록 바라보았네


그러다 다른 길을 택했네

두 길 모두 아름다웠지만

사람이 밟지 않는 길이 더 끌렸던 것일까

두 길 모두 사람의 흔적은

비슷해 보였지만


그래도 그날 아침에는 두 길 모두

아무도 밟지 않은 낙엽에 묻혀 있었네

나는 언젠가를 위해 하나의 길을 남겨 두기로 했어

하지만 길은 길로 이어지는 법

되돌아올 수 없음을 알고 있었지


먼 훗날 나는 어디선가

한숨지으며 말하겠지

언젠가 숲에서 두 갈래 길을 만났을 때

사람들이 잘 가지 않는 길을 갔었노라고

그래서 모든 게 달라졌다고




젊은 시인에게 주는 충고

라이너 릴케


마음 속의 풀리지 않는 모든 문제들에 대하여

인내를 가지라.

문제 그 자체를 사랑하라.

지금 당장 해답을 얻으려 하지 말라.

그건 지금 당장 주어질 순 없으니까.

중요한 건

모든 것을 살아 보는 일이다.

지금 그 문제들을 살라.

그러면 언젠가 먼 미래에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삶이 너에게 해답을 가져다 줄테니까.




갈대

신경림


언제부턴가 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갈대는
그의 온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까맣게 몰랐다.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




봄밤

김수영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강물 위에 떨어진 불빛처럼

혁혁한 업적을 바라지 말라

개가 울고 종이 울리고 달이 떠도

너는 조금도 당황하지 말라

술에서 깨어난 무거운 몸이여

오오 봄이여

한없이 풀어지는 피곤한 마음에도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너의 꿈이 달의 행로와 비슷한 회전을 하더라도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기적소리가 과연 슬프다 하더라도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서둘지 말라 나의 빛이여

오오 인생이여

재앙과 불행과 격투와 청춘과 천만 인의 생활과

그러한 모든 것이 보이는 밤

눈을 뜨지 않은 땅속의 벌레같이

아둔하고 가난한 마음은 서둘지 말라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절제여

나의 귀여운 아들이여

오오 나의 영감이여




해답

거트루드 스타인


해답은 없다.

앞으로도 해답이 없을 것이고

지금까지도 해답이 없었다.

이것이 인생의 유일한 해답이다.




비망록

문정희


남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남보다 나를 더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가난한 식사 앞에서

기도를 하고

밤이면 고요히

일기를 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구겨진 속옷을 내보이듯

매양 허물만 내보이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사랑하는 사람아

너는 내 가슴에 아직도

눈에 익은 별처럼 박혀있고

나는 박힌 별이 돌처럼 아파서

이렇게 한 생애를 허둥거린다




구부러진 길

이준관


나는 구부러진 길이 좋다.

구부러진 길을 가면

나비의 밥그릇 같은 민들레를 만날 수 있고

감자를 심는 사람을 만날 수 있다.

날이 저물면 울타리 너머로 밥 먹으라고 부르는

어머니의 목소리도 들을 수 있다.

구부러진 하천에 물고기가 많이 모여 살 듯이

들꽃도 많이 피고 별도 많이 뜨는 구부러진 길

구부러진 길은 산을 품고 마을을 품고

구불 구불 간다.

그 구부러진 길처럼 살아온 사람이 나는 또한 좋다.

반듯한 길 쉽게 살아온 사람보다

흙투성이 감자처럼 울퉁불퉁 살아온 사람의

구불구불 구부러진 삶이 좋다.

구부러진 주름살에 가족을 품고 이웃을 품고 가는

구부러진 길 같은 사람이 좋다.




값진 삶을 살고 싶다면

프리드리히 니체

그대가 값진 삶을 살고 싶다면
날마다 아침에 눈뜨는 순간
이렇게 생각하라.

‘오늘은 단 한 사람을 위해서라도 좋으니
누군가 기뻐할 만한 일을 하고 싶다’고




어쩌면

댄 조지


어쩌면 별들이 너의 슬픔을 데려갈 거야

어쩌면 꽃들이 아름다움으로

너의 가슴을 채울지 몰라

어쩌면 희망이 너의 눈물을

영원히 닦아 없애 줄 거야

그리고 무엇보다도,

침묵이 너를 강하게 만들 거야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킴벌리 컴버거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내 가슴이 말하는 것에 더 자주 귀 기울였으리라

더 즐겁게 살고, 덜 고민했으리라

금방 학교를 졸업하고 머지 않아 직업을 가져야 한다는 걸 깨달았으리라

아니, 그런 것들은 잊어 버렸으리라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해 말하는 것에는

신경쓰지 않았으리라

그 대신 내가 가진 생명력과 단단한 피부를 더 가치있게 여겼으리라


더 많이 놀고, 덜 초조해 했으리라

진정한 아름다움은 자신의 인생을 사랑하는 데 있음을 기억했으리라

부모가 날 얼마나 사랑하는가를 알고

또한 그들이 내게 최선을 다하고 있음을 믿었으리라


사랑에 더 열중하고

그 결말에 대해선 덜 걱정했으리라

설령 그것이 실패로 끝난다 해도

더 좋은 어떤 것이 기다리고 있음을 믿었으리라


아, 나는 어린아이처럼 행동하는 걸 두려워하지 않았으리라

더 많은 용기를 가졌으리라

모든 사람에게서 좋은 면을 발견하고

그것들을 그들과 함께 나눴으리라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나는 분명코 춤추는 법을 배웠으리라

내 육체를 있는 그대로 좋아했으리라

내가 만나는 사람을 신뢰하고

나 역시 누군가에게 신뢰할 만한 사람이 되었으리라


입맞춤을 즐겼으리라

정말로 자주 입을 맞췄으리라

분명코 더 감사하고

더 많이 행복해 했으리라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방문객

정현종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는 것이다.

그 갈피를
아마 바람은 더듬어볼 수 있을
마음,
내 마음이 그런 바람을 흉내낸다면
필경 환대가 될 것이다.




달이 떴다고 전화를 주시다니요

김용택


달이 떴다고 전화를 주시다니요
이 밤 너무 신나고 근사해요
내 마음에도 생전 처음 보는
환한 날이 떠오르고
산 아래 작은 마을이 그려집니다
간절한 이 그리움들을,
사무쳐 오는 이 인정들을
달빛에 실어
당신께 보냅니다

세상에,
강변에 달빛이 곱다고
전화를 다 주시다니요
흐르는 물 어디쯤 눈부시게 부서지는 소리
문득 들려옵니다.




사람들은 왜 모를까
김용택

이별은 손끝에 있고
서러움은 먼데서 온다
강 언덕 풀잎들이 돋아나며
아침 햇살에 핏줄이 일어선다
마른 풀잎들은 더 깊이 숨을 쉬고
아침 산그늘 속
산벚꽃은 피어서 희다
누가 알랴 사람마다
누구도 닿지 않는 고독이 있다는 것을
돌아앉은 산들은 외롭고
마주보는 산은 흰 이마가 서럽다
아픈 데서 피지 않는 꽃이 어디 있으랴
슬픔은 손끝에 닿지만
고통은 천천히 꽃처럼 피어난다
저문 산 아래
쓸쓸히 서 있는 사람아
뒤로 오는 여인이 더 다정하듯이
그리운 것들은 다 산 뒤에 있다
사람들은 왜 모를까 봄이 되면
손에 닿지 않는 것들이 꽃이 된다는 것을




김용택


매미가 운다

움직이면 덥다

새벽이면 닭도 운다

하루가 긴 날이 있고

짧은 날이 있다

사는 것이 잠깐이다

사는 일들이 헛짓이다 생각하면,

사는 일들이 하나하나 손꼽아 재미있다

상처받지 않은 슬픈 영혼들도 있다 하니,

생이 한 번뿐인 게 얼마나 다행인가

숲 속에 웬일이냐, 개망초꽃이다

때로 너를 생각하는 일이

하루 종일이다.

내 곁에 앉은

주름진 네 손을 잡고

한 세월 눈 감았으면 하는 생각,

너 아니면 내 삶이 무엇으로 괴롭고

또 무슨 낙이 있을까

매미가 우는 여름날

새벽이다

삶에 여한을 두지 않기로 한,

맑은

새벽에도 움직이면 덥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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