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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서재 Part 1

청춘의 독서

#16 유시민 [청춘의 독서]

by 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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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흥준 선생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조선 문인 유한준의 말을 인용해 우리의 문화유산을 사랑하라고 권했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에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맹자]를 읽으면서 나는 그 말을 이렇게 바꾸어보았다. "알면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면 보이나니, 그때에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인간의 욕망을 억압하면서 사회적 사명감으로 사람을 강제하는 체제, 개인의 자발성과 신명을 말살해버리는 사회가 건전하게 발전할 수는 없다는 것이 작가의 진단이었다.
최인훈 [광장]

아하, 당은 저 더러는 생활하지 말라는 겁니다. 일이면 일마다 저는 느꼈습니다. 제가 주인공이 아니고 '당'이 주인공이라는 걸. '당'만이 흥분하고 도취합니다. 우리는 복창만 하라는 겁니다. '당'이 생각하고 판단하고 느끼고 한숨지을 테니, 너희들은 복창만 하라는 겁니다. 우리는 기껏해야 "일찍이 위대한 레닌 동무는 말하기를...""일찍이 위대한 스탈린 동무는 말하기를..." 그렇습니다. 모든 것은, 위대한 동무들에 의하여, 일찍이 말해져 버린 것입니다. 이제는 아무 말도 할 말이 없습니다. 우리는 인제 아무도 위대해질 수 없습니다. 아, 이 무슨 짓입니까? 도대체 어쩌다 이 꼴이 된 겁니까?
최인훈 [광장]

오른손으로, 은혜의 군복 앞 단추를 끌렀다. 다음에는, 가죽 때를 끌렀다. 마디가 굵은 버클이 무디게 절그럭거린다. 이 고운 몸에, 이 무슨 흉한 쇠붙이란 말인가. 이 몸을 볼쇼이 테아트르의 대리석 기둥이 받치는 놀이마당에서, 전차가 피를 토하는 이 스산한 마당까지 불러온 자는 누군가. 이 예술가의 가냘픈 몸의 도움까지 받아가면서 해내야 할 사람 잡이에 내몰기 위해서? 안 된다. 너희들이 만일 인민의 이름을 팔면서 우리를 속이려 든다면, 우리도 걸맞은 분풀이를 해줄 테다. 사람을 얕잡아보지 마라. 너희가 한 푼을 속이면, 어김 없이 한 푼을 속이우리라. 전차와 대포를 지키라고 너희들이 데려다 놓은 자리에서, 우리는 원시의 광장을 찾아가고 있다. 이렇게. 단추와 가죽 허리띠를 끌러낸 풀빛 루바시카 윗저고리를 벗긴다. 그녀의 드러난 가슴에 얼굴을 묻는다.
[사기열전 1]

한신曰 정말 사람들의 말에 "날랜 토기가 죽으면 훌륭한 사냥개를 삶아 죽이고, 높이 나는 새가 모두 없어지면 좋은 활을 치워버린다. 적을 깨뜨리고 나면 지모 있는 신하는 죽게 된다"라고 하더니, 천하가 이미 평정되었으니 내가 삶겨 죽는 것은 당연하구나!
"아무리 선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라고 하더라도, 인간은 악한 수단을 사용한 데 따르는 정신적 고통을 벗어나지 못한다." 도스토옙스키는 이렇게 말한다.
인류는 20세기의 전체주의 경험을 통해 나쁜 수단으로는 결코 좋은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다는 것을 절실하게 깨달았다.
스탈린과 히틀러 같은 '비범한 사람들'이 '인류를 구원하려는 신념'에 입각해 '보든 종류의 폭력을 사용할 권리'를 행사함으로써 구축했던 사회체제를 가리켜 우리는 '전체주의'라고 한다. 이 체제는 인간의 생명과 권리를 학살하고 억압하는 '제도하된 악'이었다.
20세기 세계사는 소수의 '비범한 사람들'이 인류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이 스스로 자신을 구원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지성인의 최고의 덕성은 인식과 실천을 결부시킨다는 것이다.
언론 자유가 신문사 사주의 독점적 특권이 되고, 언론사가 사회의 목탁이 아니라 세습적 권력이 되고, 기자가 언론인이 아니라 기업의 직원처럼 행동하는 시대가 되고 보니 이 글이 더 귀하게 다가온다.
지식인은 무엇으로 사는가. 리영희 선생은 말한다. 진실, 진리, 끝없는 성찰, 그리고 인식과 삶을 일치시키려는 신념과 지조. 진리를 위해 고난을 감수하는 용기. 지식인은 이런 것들과 더불어 산다. 선생의 글을 다시 읽으니 선생이 내게 묻는다.
부끄럽다. 당당하게 대답할 수가 없다. '세상의 은사'앞에 서는 것이 정녕 이토록 두려운 일인가.
인류 역사에서 사상의 자유를 가장 철저하게 말살한 인물이 둘 있다. 법가의 책만 빼고 제자백가의 모든 책을 불태웠던 진시황, 그리고 나치가 허가한 것만 빼고 공공 도서관의 모든 책을 불태웠던 히틀러가 그들이다.
사회는 이해관계를 달리하는 적대적인 계급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 계급들 사이의 투쟁이 역사를 변화시키는 동력이다. (마르크스주의)
[공산당 선언]

정치권력은 원래부터 한 계급이 다른 계급을 억압하기 위해 조직한 폭력이다. 만일 프롤레타리아트가 부르주아지와 싸우면서 불가피하게 하나의 계급으로 결속한다면, 혁명을 통해 스스로를 지배계급으로 만든다면, 그리하여 지배계급으로서 낡은 생산관계를 폭력적으로 폐지한다면, 결국 이러한 생산관계와 함께 계급 대립의 존재 조건을, 계급이라는 것 자체를, 종국적으로 자기 자신의 계급적 지배까지도 철폐하게 된다. 계급과 계급 대립이 존재하던 낡은 부르주아 사회가 있던 자리에, 한 사람 한 사람의 자유로운 발전이 만인의 자유로운 발전이 되는 연합체가 들어서는 것이다.
이상이 아무리 좋아도 적절한 방법을 찾지 못하면 소용이 없는 것이다.
흔히들 보수가 물질적 이익과 세속적 출세를 탐낸다고 하지만 진짜 보수주의자는 이익이 아니라 가치를 탐한다.
역시 그랬다. 권력은 마주 서 있을 때보다는 함께 서 있을 때 더 큰 두려움을 느끼게 한다.
그들은 전쟁 때는 한 일이 없었지만 국가 제도를 정비하고 황제의 권력을 높이 세우는 일을 보좌하면서 전면에 등장했다. 이것은 전형적인 '역할의 전도' 현상이다. 역사는 도전과 응전의 연속이다. 시대가 바뀌고 도전의 성격이 달라지면 응전에 성공하는 주체 또한 달라질 수밖에 없다. 한 시기의 도전에 성공적으로 응전한 사람들은 새로운 도전에도 옛날 방식으로 응전함으로써 실패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새 시대는 새로운 사람을 부른다. 구시대의 도전에 성공적으로 응전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새 시대의 도전에 제대로 응전하지 못하면 어떤 식으로든 도태되고 만다.
2000년도 더 지난 옛날 중국에서 벌어졌던 일들을 보면서 인간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인간은 생물학적으로 진화하지 않았다. 2000년은 생물학적 진화가 일어나기에는 너무나 짧은 시간이다. 인간의 유전자에 새겨진 시기심, 권력욕, 공격성, 독점욕은 그대로 살아 있다. 제도와 문화와 의식이 진화했기에 그런 욕망의 표출이 절제되고 견제될 따름이다. 히틀러가 저지른 홀로코스트, 크메르루주의 대학살, 스탈린의 대숙청, 중국의 문화 대혁명, 보스니아 내전에서 벌어진 인종 청소 후세인의 쿠르드족 학살과 미국의 이라크 침공 등을 보면 2000년 전 중국 대륙에서 터져 나왔던 인간의 야수성은 그럴듯한 환경만 조성되면 언제든 재현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정치는 위대한 사업이다. 짐승의 비천함을 감수하면서 야수적 탐욕과 싸워 성인의 고귀함을 이루는 것이기 때문이다. 설사 한신과 유방이 빛을 좇는 불나방처럼 권력을 향한 본능에 이끌려 투쟁의 소용돌이에 뛰어들었다 할지라도, 그들은 덕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고 인의를 존중하려고 노력했다. 그만하면 충분하지 아니한가. 비록 성인의 반열에 오를 만한 덕성을 갖추지 못했다 할지라도, 때로 맹목적 욕망과 시기심에 휘둘렸다 할지라도, 그러한 마음과 능력을 발휘하여 결과적으로 성인의 고귀함을 이루었지 않은가.
"슬픔도 노여움도 없이 살아가는 자는 조국을 사랑하고 있지 않다."
마르크스는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관찰함으로써 "우리는 서로에게 무엇인지"를 밝히려 했다. 프로이트는 "내가 누구인지"를 알기 위해 무의식의 세계에 처음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다윈은 "인간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밝혀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더 유연하게 인습적 사고방식과 행동 양식을 교정하는 수고를 기꺼이 감수하는 것일까? 똑같은 생활환경의 변화에 노출되어 있다고 해도 자신에 대해, 타인과의 관계에 대해, 사회제도에 대해 더 넓고 깊게 이해하고 성찰하는 지성적인 사람일수록 더 유연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조지가 밝이혀고 했던 진리는 분명하게 밝혀졌다. 그는 옳았으며 지금도 옳다. 그러나 그가 말한 바대로 그 진리가 받아들여지기는 어렵다. 사람은 보통 진리보다는 이익을 중시하기 때문이다. 분투하고 고난을 감수하는 '조지의 벗'들이 세상 곳곳에 있지만, 그 진리가 온전하게 받아들여지는 사회는 존재하지 않으며 앞으로도 나오기 어려울 것이다.
다시 헨리 조지를 읽으면서, 그에 미치지 못하는 나는 스스로를 위로한다. 그래, 진리가 아름다운 것은 그걸 실현하기가 너무나 어렵기 때문일지도 몰라. 행하기 쉬운 진리에는 매력이 없는 거야. 그러니까 '근본적 변화'가 사람의 마음을 끄는 것은, 그 자체가 멋지기도 하지만, 실패하고 좌절하면서 한 걸음이라도 더 가깝게 다가서려는 '진리의 벗'들, 그들의 몸부림이 아름다워 서일지 몰라.
랑케는 역사의 발전이나 진보를 인정하지 않았다. 역사는 발전하거나 진보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이리저리 변화할 따름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어느 시대가 앞서 간 다른 시대보다 우월하다는 것도 인정하지 않았다. 진보를 인정하는 경우에도 어디까지나 물질적 진보만 인정한다. 정신은 진보하지 않는다. 만약 인간 정신이 진보한다면 어째서 수천 년이 지나도록 석가모니, 예수, 공자, 메호메트를 능가하는 현인이 나오지 않는다는 말인가.
[역사란 무엇인가]

오늘날의 모든 언론인들은 여론을 움직이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적절한 사실은 선택하고 배열하는 데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흔히 '사실'은 스스로가 말한다고들 한다. 이것은 물론 진실이 아니다. '사실'이라는 것은 역사가 불러줄 때만 말을 한다. 어떤 '사실'에게 발언권을 줄 것인가, 도 어떤 순서로 어떤 맥락에서 말하도록 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역사가인 것이다. '사실'이라는 것은 자루와 같다. 그 속에 무엇인가를 넣어주지 않으면 사실은 일어서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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