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조지 오웰 [1984]
당에서는 오세아니아가 유라시아와 동맹을 맺은 적이 없다고 했다. 하지만 윈스턴 스미스는 오세아니아가 사 년 전에 유라시아와 동맹을 맺었던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런데 이런 지식이 어디에 존재하는 것일까? 바로 그의 의식 속에, 여차하면 완전히 지워져 버릴 그의 의식 속에만 존재할 뿐이다. 그래서 만일 사람들이 당의 거짓말을 믿는다면 그 거짓말은 역사가 되고 진실이 되는 것이다. '과거를 지배하는 자는 미래를 지배한다. 현재를 지배하는 자는 과거를 지배한다.' 이것이 당의 슬로건이다. 그러나 과거는 본질적으로 변경될 수 있음에도 여태 그런 적이 없다. 지금 진실한 것은 영원히 진실하다. 이는 지극히 단순한 이치이다. 필요한 것은 자신의 기억을 끊임없이 말살시키는 것뿐이다. 사람들은 이를 '현실 제어'라 챙했는데, 신어로는 '이중사고'라고 한다.
윈스턴으로서는 위더스가 왜 숙청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부정을 저질렀거나 무능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너무 인기가 많아서 빅 브라더가 제거했을 수도 있다. 혹은 위더스 본인이나 그와 가까운 누군가가 이단적인 성향이 있는 것으로 혐의를 받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무엇보다 숙청이나 증발이 권력을 유지하는 불가피한 수단인 만큼 단순히 그런 이유에서 그렇게 되었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
그들은 의식을 가질 때까지 절대로 반란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며, 반란을 일으키게 될 때까지는 의식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모든 것이 안갯속처럼 희미했다. 과거는 지워졌고, 지워졌다는 사실마저 잊혀서 허위가 진실이 되어버렸다.
그들은 직장 동료와의 말다툼이나 잃어버린 자전거펌프를 찾아다닌 일, 오래전에 죽은 누이동생의 얼굴, 칠십 년 전 어느 바람 불던 날 아침의 뿌연 회오리바람 같은 쓸데없는 것들만 기억할 뿐이었다. 진정으로 중요한 사건이나 그들의 삶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사실들은 그들의 관심 밖이었다. 그들은 큰 것은 못 보고 작은 것만 볼 줄 아는 개미와 같았다. (비록 소설 속의 설정이지만 우리 주변의 모습이 아닐까? 폴 발레리 "생각하는 대로 살아라. 그렇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한다.") 그렇게 때문에 점점 기억은 상실되고 기록은 날조되어 가는데도 인민들의 생활이 개선되었다는 당의 주장이 사실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그런 주장을 반박하거나 검증할 기준이 없고, 앞으로도 있을 것 같지 않은 상황이었다.
"섹스를 하면 힘이 빠지고, 그다음엔 행복감에 젖어서 무엇에게든 욕을 하거나 저주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게 되는데, 그들은 그런 상태를 용납할 수 없다는 거예요. 그들은 사람들이 언제나 정력으로 똘똘 뭉쳐 있기를 원해요. 행진을 하고, 함성을 지르고, 깃발을 흔드는 것들은 모두 섹스의 변종일뿐이에요. 행복감을 느끼면 뭣 하러 '빅 브라더'나 '삼 개년 계획'이나 '이분 증오'나 그 밖의 썩어빠진 그들의 의식에 그처럼 열을 올리겠어요?" 그녀의 말이 옳다고 그는 생각했다. 순결과 정치적 정설은 직접적이고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강력한 본능의 힘을 축적하여 그것을 추진력으로 사용하지 않는다면 당이 당원들에게 요구하는 공포와 증오, 광적인 맹신을 어떻게 유지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두 세대 전의 사람들은 역사를 바꾸려 하지 않았고, 그래서 이런 일은 그리 중요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개인적인 성실성으로 삶을 살았고, 아무도 그것을 문제 삼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개인적인 인관간계 였으며, 죽어가는 사람을 포옹하고 눈물을 흘리고 한마디 위로의 말을 건네주는 등의 무력한 행위에서도 어떤 가치를 찾을 수 있었다. 문득 노동자들은 아직 이런 상황 속에 살고 있다는 생각이 윈스턴의 뇌리를 스쳤다. 그들은 당이나 국가나 이념 따위에 충성을 바치지 않고 그들 자신에게 충실했다. 그는 비로소 노동자들을 경멸하지 않게 되었다. 경멸하기는커녕 그들이야말로 어느 날인가 생명을 되찾아서 세계를 재건할 수 있는 잠재된 힘이라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노동자들이야말로 인간이다. 그들의 내면은 경직되어 있지 않다. 그들은 윈스턴이 의식적인 노력으로 다시 배워야 할 원시적인 감정을 그대로 지닌 채 살고 있다.
그녀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들이 할 수 없는 일이 한 가지 있어요. 그들은 당신이 무엇이든 말하게끔 할 수는 있지만, 믿게는 할 수 없어요. 당신의 속마음까지 지배할 수는 없으니까요."
"그래. 당신 말이 맞아. 사람의 속마음까지 지배할 수는 없지. 만약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게 가치 있는 일이라고 확신할 수 있다면, 비록 대단한 성과를 얻지는 못하더라도 그들을 패배시키는 셈은 되는 거야."
그런데 단순히 살아남는 게 아니라 인간으로서 사는 게 목적이라면, 궁극적으로 무엇이 어떻게 달라진단 말인가? 사람들이 그들을 자신들과 똑같게 개조시킬 수 없듯 그들 또한 사람들의 감정을 변화시킬 수 없다. 설령 그들이 사람들의 말과 행동과 생각을 하나하나 적나라하게 파헤친다 하더라도, 인간의 속마음까지 공략할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속마음은 자신이나 다른 사람이 어떻게 할 수 없는 신비로움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싸워야 할 설질적인 명분이 없는 것도 현대 전쟁의 성격이랄 수 있다. 자립 경제 체제가 확립되면서 생산과 소비가 서로 조화를 이루어 전시대에 전쟁의 주요 원인이었던 시장 확보를 위한 경쟁은 이제 끝난 상태이고, 원자재 획득을 위한 경쟁 역시 더 이상 생사를 건 문제가 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현대 전쟁의 기본적인 목적은 국민의 전반적인 생활수준을 향상시키지 않으면서 공산품들을 완전히 소모하는 데 있다. 19세기 말 이후 잉여 소비재의 처리 문제가 산업사회에 내에서 중요한 과제로 부상했다. 그러나 식량이 충분하지 않은 오늘날 이 문제는 그리 시급한 것이 아니며, 설령 인위적인 파괴를 하지 않더라도 그렇게 큰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오늘날의 세계는 1914년 이전에 비해 헐벗고 굶주리고 황폐화되었다. 당시의 사람들이 예견했던 상상 속의 미래 세계와 비교해 보면 더욱 그렇다. 20세기 초에 대다수의 지식인들이 예측했던 미래 사회란 풍요하고 여유가 많으며, 질서가 잡힌 가운데 모든 것이 능률적인 것이었다. 요컨대 유리와 강철과 하얀 콘크리트로 건설된 휘황찬란하고 영구적인 세계였던 것이다. 그들은 과학과 기술이 놀랄 만한 속도로 발달할 것으로 보았고, 그래야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게 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장기적인 전쟁과 혁명으로 인해 나라 살림이 거덜 난 한편, 과학과 기술의 발전적 토대가 될 경험적 사고방식이 엄격한 통제 사회에서는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전체적인 면에서 볼 때 오늘날의 세계는 오십 년 전보다 더 원시적이다.
원칙적으로 전쟁 규모는 국민의 가장 원초적인 욕구만을 충족시키고 그 잉여 물자를 완전히 소모할 수 있는 범위에서 계획된다.
전쟁은 건전한 정신을 지키는 일종의 보루였고, 지배계급에 관한 한 가장 중요한 안정장치였다.
하지만 우리 시대의 지배자들은 서로 간의 전쟁은 하지 않는다. 전쟁은 이제 지배 집단이 국민을 상대로 벌이는 싸움이며, 전쟁의 목적도 영토의 정복이나 방어가 아니라 사회 자체를 그대로 유지하는 데 있다. 결국 '전쟁'이란 낱말은 잘못 해석되고 있는 것이다. 늘 전쟁이 계속되고 있기 때문에 사실은 전쟁이 없다는 말이 정확한 표현일지도 모른다.
상층계급은 오랜 기간 권력을 안전하게 장악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조만간 신뢰나 효율적인 통치 능력 중 한 가지를 잃거나 두 가지를 잃어버리는 순간이 그들에게 닥친다. 그러면 중간계급은 자유와 정의를 위해 투쟁하고 있는 것처럼 가장하여 하층계급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임으로써 상층계급을 전복시킨다. 그런데 그들은 자기들의 목적을 달성하자마자 하층계급을 다시 옛날의 노예 신분으로 전락시키고 스스로 상층계급이 된다. 이때 새로운 중간 계급은 다른 두 계급 중 하나에서 분리되거나 양쪽 계급에서 분리되어 나오는데, 이로 인해 투쟁이 다시 반복되는 것이다. 이 세 계급 중에서 하층계급만이 단 한순간도 자신들의 목표를 달성할 수 없다. 모든 역사를 통해 물질적인 면에서의 발전이 전혀 없었다고 말하는 것은 과장일지도 모른다. 쇠퇴기에 들어선 오늘날에도 물질적으로는 몇 세기 전보다 훨씬 풍요하다. 그러나 부가 늘고 인간관계가 부드러워지고 개혁이나 혁명이 있었지만 인간의 평등이라는 점에서는 조금도 발전한 게 없다. 하층계급의 입장에서 볼 때 역사적 변화란 그들의 주인이 바뀌는 것 외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계층 사회를 영속화시키는 문제는 이보다 더 어렵다. 지배계급이 권력을 상실하는 경우는 네 가지이다. 외부로부터 정복당한 경우, 비능률적으로 통치하여 군중이 봉기한 경우, 불만에 찬 중간계급이 강력한 세력을 형성한 경우, 통치할 자신감과 의욕을 잃는 경우이다. 이러한 요소들은 하나만 작용하지 않고 무슨 법칙처럼 네 가지가 거의 동시에 작용한다. 이 모든 요소들을 제압할 수 있는 지배계급만이 영원히 권력을 유지할 수 있다. 그리고 궁극적인 결정인자는 지배계급 자신의 정신 자세이다.
'이중사고'를 창출해 낸 사람들이 '이중사고'를 가장 교묘하게 행하고, '이중사고'가 엄청난 정신적 기만 체계라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임은 굳이 말할 필요조차 없다. 우리 사회에서 현재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이 현실 그대로의 세계를 가장 모른다.
당은 또 중요 행정기관마저 뻔뻔스럽게 사실과 정반대인 뜻을 지닌 이름으로 부르게 만들었다. 평화부는 전쟁을, 진리부는 거짓말을, 애정부는 고문을, 풍요부는 굶주림 문제를 담당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모순은 우연한 것도 아니고, 일반적인 의미의 위선에서 나온 것도 아니다. 신중한 '이중사고'에서 나온 행위의 결과이다. 왜냐하면 권력은 이런 모순들을 조화시킴으로써만 영원히 유지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방도로는 과거의 악순환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윈스턴, 자네는 형이상학자가 아닐세. 지금 이 순간까지 자네는 존재란 말이 뭘 의미하는지 생각해 본 적이 없네. 좀 더 자세히 얘기해 볼까. 과거는 구체적으로 공간에 존재하는 건가? 과거의 사건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어떤 확고한 객체의 세계가 이 세상 어딘가에 있나?"
"없습니다."
"그렇다면 과거는 대체 어디에 존재하는 거지?"
"기록 속에 존재합니다. 과거는 기록되는 겁니다."
"기록된다... 어디에?"
"마음 속에요. 인간의 기억 속에 기록됩니다."
"기억 속이라... 좋아. 우리가, 즉 당이 모든 기록을 지배하고, 모든 기억을 지배한다면... 그렇다면 우리는 과거를 지배하는 것이 되겠군. 그렇지 않나?"
"하지만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는 걸 어떻게 정지시킬 수 있습니까? 그건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 불가항력입니다. 기억을 어떻게 지배하겠습니까? 결국 당신들은 내 기억을 지배하지 못했습니다!"
윈스턴이 순간적으로 다시 다이얼을 잊고 소리쳤다.
"아니야! 고백을 받아내기 위해서도, 벌을 주기 위해서도 아니야. 왜 자네를 이리 데려왔는지 말해 줄까? 그건 치료하기 위해서야! 자네를 온전한 정신을 지닌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라고! 우리는 자네가 저지른 어리석은 범죄 따위에는 관심도 없네. 당은 겉으로 드러난 행위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지 않아. 우리가 신경 쓰는 건 사상일세."
"죽은 자들은 순교자가 됐고, 그들에 대한 경멸도 잊혀져 버렸네. 왜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하나? 첫째로 그들의 자백이 강제에 의한 것이었고, 사실이 아니었기 때문일세. 우리는 그런 식의 실수는 저지르지 않네. 여기서 얻은 자백은 모두 진실이네. 우리가 진실로 만드는 거지. 무엇보다 우리는 죽은 자들이 다시 우리에게 반항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네. 윈스턴, 자네는 후손들이 자네를 옹호해 주리라고 생각해서는 안 되네. 후손들은 자네에 대한 얘기를 전혀 들을 수 없을 걸세. 자네는 역사의 흐름에서 깨끗이 지워져 버린다네. 공기로 변해 먼 하늘로 사라져 버리는 거지."
"죽는 순간까지 우리는 그 어떤 탈선도 용납하지 않네. 옛날에는 이단자들이 여전히 이단자인 채 스스로 이단자임을 자처하며 화형장으로 끌려감으로써 모종의 희열을 느끼기도 했지. 그런데 우리는 처치하기 전에 두뇌를 완전히 개조시키지. 옛날 전제군주의 명령은 '너희들을 이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식이었고, 전체주의자의 명령은 '너희들은 이렇게 해야 한다'는 식이었지만 우리의 명령은 '너희들은 이렇게 되어 있다'는 식이네. 우리가 여기에 끌고 온 사람 치고 우리에게 맞선 자는 없었네. 모두 완전히 세뇌되었지."
"순수한 권력이 뭐냐고? 자네도 그게 뭔지 이해하게 될 걸세. 우리는 우리 자신이 무얼 하고 있는지 알고 있다는 점에서 과거의 과두정치와 다르네. 우리와 다르든 비슷하든 과거의 사람들은 모두 겁쟁이이고 위선자일세. 독일의 나치와 소련의 공산당은 그 수법에서는 우리와 매우 흡사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권력에 대한 동기를 인정할 만한 용기가 없었네. 그들은 어쩔 수 없이 한시적으로만 권력을 장악하겠다고 약속하고는 인간이 자유롭고 평등하게 살 수 있는 낙원이 도래할 것이라고 꾸며댔지.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믿기까지 했네. 우리는 그들과 다르네. 누구든 권력을 장악하면 포기하려 하지 않는 법이지. 권력은 수단이 아닐세. 목적 그 자체이네. 혁명을 보장하기 위해서 독재를 행사하는 게 아니라 독재를 하기 위해서 혁명을 일으키는 걸세. 박해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박해일뿐이네. 고문의 목적은 고문이고 말일세. 그처럼 권력의 목적도 권력 그 자체이네. 이제 내 말을 이해하겠나?"
"웃음도 적을 패배시키고 승리감에 취해 웃는 웃음만 있게 될 것이고, 미술, 문학, 과학도 없어질 걸세. 뿐만 아니라 아름다움과 추함의 구별도 없어지고, 호기심이라든가 세상을 살면서 느끼는 즐거움 따위도 없어질 것이네. 한마디로 말해 이 세상의 모든 쾌락은 파괴되어 버리는 거지. 그런데 이걸 잊지 말게, 윈스턴. 언제나 끊임없이 커가고 끊임없이 미묘해지는 권력에 대한 도취감만 맛보게 되리라는 점을 말일세. 언제나 어느 순간에나 승리감이 주는 전율과 무력한 적을 짓밟는 쾌감을 얻게 될 것이네. 만약 미래의 모습이 보고 싶으면, 인간의 얼굴을 짓 밝고 있는 구둣발을 상상해 보게."
"당신이 방금 말한 그런 세계를 당신들은 만들 수 없단 말입니다. 그건 꿈에 불과합니다. 불가능한 일입니다."
"왜지?"
"공포와 증오와 잔인성 위에 문명을 세운다는 건 불가능합니다. 그건 결코 지탱될 수 없습니다."
"어째서인가?"
"생명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붕괴될 겁니다. 그런 문명은 저절로 파멸하게 됩니다."
"천만에! 자네는 증오심이 사랑보다 심신을 더 피로하게 만든다는 생각을 하고 있군. 왜 그래야 하나? 설령 자네 말이 옳다고 하더라도 대체 무슨 차이가 있나? 우리가 더 빨리 늙는다고 생각해 보게. 생명의 속도를 높여 서른 살에 노쇠한다고 생각해 보란 말일세. 그렇다고 뭐가 달라지겠는가? 개인의 죽음은 죽음이 아니란 걸 이해할 수 없나? 당은 불사의 존재일세."
그런 것은 있지도 않은, 그 자신이 꾸며낸 것이다. 그는 상반되는 일을 기억하고 있다고 기억했지만 그런 것은 모두 틀린 기억이고 자기기만의 산물이었다. 이 모든 일이 얼마나 쉬운가! 항복만 하라. 그러면 모든 일은 저절로 해결된다. 이것은 물결을 거슬러 올라가려고 발버둥 치지만, 결국 뒤로만 밀리다가 갑자기 방향을 바꿔 물결을 따라서 헤엄치는 것과도 같다. 오직 자신의 자세만 바뀌었을 뿐, 아무것도 바뀐 것이 없다. 어떤 경우에든 예정된 일은 일어나게 마련이다. 그는 왜 자신이 지금까지 반항해 왔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