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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컹리 Feb 17. 2018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55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01. Intro

   소설을 읽는 건 시간 낭비다. 읽고 나서 얻는 게 크지 않다. 차라리 그 시간에 다른 종류의 책들을 읽어 지식을 얻는 게 낫다. 게다가 소설을 읽는 데는 시간이 오래 걸린다. 그리고 끝까지 집중을 놓치면 안 된다. 중간에 한 부분만 빠뜨리면 다음의 스토리가 이해가 안 된다. 소설을 읽는 것은 골치 아픈 일이다.



02.

   나는 사단 정보처 계원이다.

   대부분의 병사들은 선후임, 동기 병사들하고 지내는 반면 나는 간부들하고 일과를 보낸다. 처부 안에 병사들보다 간부들이 훨씬 많다. 정보처에 있는 실무자 간부님들은 대부분 계급이 대위이다. 보통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을 형성하고 있다. 그래서 내 또래 사이에서 듣지 못하는 이야기를 접할 수 있다. 새 차를 사는 이야기, 결혼에 대한 고민, 주식 이야기 등등. 전역을 앞둔 간부님께는 앞으로 무슨 일을 하며 살지에 대한 이야기도 들을 수 있다. 


   문득 알아차렸다.

   그들은 내가 상상해왔던 20ㆍ30대 모습들이 아니었다. 

   나는 막연히 30대가 되면, 직장을 잡고 나면, 고민 없이 안정적으로 살 줄 알았다. 그런데 그들이 일하는 모습과 일상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나니 내가 상상하고 있었던 30대의 모습에 비하면 사람들이 초라하고 보잘것없어 보였다. 



03.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등장하는 토마시, 테레자, 사비나, 프란츠들도 마찬가지였다. 역사의 흐름에 휩쓸리며 서로 관계하는 모습을 보며 내 가슴속에 인생의 공허함이 가득 찬다. 니체가 영원회귀 사상의 무게에 비하면 소설 속의 등장인물의 존재들은 가볍고 덧없어 보인다. 그 가벼움은 참을 수 없는 정도이다. 하지만 이것은 소설 속에만 있는 허구적인 이야기가 아니었다. 우리 주변의 인생사도 마찬가지였다. 대부분 우리의 인생은 목표도 없이 사는 대로 살거나 꿈과 이상을 품고 살아도 그것을 이루지 못하여 평범하게 살아간다. 나는 항상 완전하고 중한 삶을 살 것이라 막연히 생각해왔지만 사실 우리들은 그렇지 않다.



이 책의 여운은 마치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의 여운과 비슷했다. 깊은 여운에 눈물을 흘렸는데 내가 왜 우는지 설명할 수가 없었다. 그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04.

   우리는 각자 완벽함을 추구하며 살지만 인간은 본연적으로 불완전한 존재이며 그 인생 또한 완전하지 않다. 나는 인생에 있어 선택의 순간에 완벽함을 추구하였다. 고등학교 진학, 대학교 진학, 군 복무 등등 여러 중요한 선택에 많은 기대를 걸었다. 그러나 남들이 어떻게 평하든 간에 결과는 기대에 못 미치고 나에게 실망감을 안겨주었다. 실망감 속에서 시작된 일과에서 나는 생활 속의 순간순간들이 불행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허나 인간은 본연적으로 완전하지 못한 존재였다. 완벽함을 이루지 못하더라도 그것에 대해 힘들어야 할 이유도 없고 힘들어야 할 필요도 없었다. 더 나아가 생각해 보았다.




<가지 않을 수 없던 길>

가지 않을 수 있는 고난의 길은 없었다.
몇몇 길은 거쳐오지 않았어야 했고
또 어떤 길은 정말 발 디디고 싶지 않았지만
돌이켜보면 그 모든 길을 지나 지금 여기까지 온 것이다.


(중략)


그 길이 내 앞에 운명처럼 파여 있는 길이라면
더욱 가슴 아리고
그것이 내 발길이 데려온 것이라면
발등을 찍고 싶을 때 있지만
내 앞에 있던 모든 길들이
나를 지나 지금 내 속에서 나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도종환-




   나에게 유신고, 서강대학교, 정보처 ASIC은 모두 나에게 최선의 길이 아닌 차선의 길이었다. 하지만 내가 원했던 길이 아니었더라도 지금의 나를 구성해주는 것들이다. 그것들이 나에게 그럴 의도는 없었겠지만 나를 나 자신으로서 있게 해주어서 감사하게 생각한다.

   앞으로 나에게 어떠한 길이 주어지더라도 담담하게 받아들이겠다. 결국은 그것들이 나를 이루는 밑거름이 될 것이기에.








   우리 인생의 매 순간이 무한히 반복되어야만 한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혔듯 영원성에 못 박힌 꼴이 될 것이다. 이런 발상은 잔혹하다. 영원한 회귀의 세상에서는 몸짓 하나하나가 견딜 수 없는 책임을 떠맡는다. 바로 그 때문에 니체는 영원 회귀의 사상은 가장 무거운 짐(das schwerste Gewicht)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영원한 회귀가 가장 무거운 짐이라면, 이를 배경으로 거느린 우리 삶은 찬란한 가벼움 속에서 그 자태를 드러낸다.



   지금 그는 그 순간을 떠올렸다. 그때 체험한 것이 사랑이 아니라면 무엇이었을까? 그는 그녀 곁에서 죽고 싶었다고 확신했는데, 그 감정은 명백히 과장된 것이었다. 겨우 두 번째 만남이었는데! 자기가 사랑의 부적격자임을 뼈저리게 깨달은 한 남자가 스스로에게 사랑의 희극을 연기하면서 빠져들었던 신경질적인 반응은 아니었을까?



   물리 실험 시간에 중학생은 과학적 과정의 정확성을 확인하기 위해 실험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은 오직 한 번밖에 살지 못하므로 체험으로 가정을 확인해 볼 길이 없고, 따라서 자기 감정에 따르는 것이 옳은 것인지 틀린 것인지 알 길이 없는 것이다.



   잠든 테레자 곁에서 뒤척이다가 몇 년 전 그녀가 무심코 던진 말이 떠올랐다. 그들이 친구 Z에 대해 이야기하던 중 그녀가 말했다. "당신을 만나지 않았으면 나는 틀림없이 그를 사랑했을 거야."

   당시에도 그 말을 듣고 토마시는 야릇한 우울함에 빠졌더랬다. 테레자가 그의 친구 Z가 아닌 자기와 사랑에 빠진 것은 철저히 우연이라는 사실을 문득 깨달은 것이다. 가능성의 왕국에는 토마시와 이루어진 사랑 외에도 실현되지 않은 다른 남자와의 무수한 사랑이 존재하는 것이다.



   책은 그녀에게 아무런 만족도 주지 못하는 삶으로부터 벗어나는 상상의 도피 기회를 제공했지만, 그 자체로도 의미가 있었다.



   그런데 왜 총을 쏘는 사람이 토마시였고, 왜 그는 테레자를 쏘려고 했을까?

   테레자를 여자들 가운데로 보낸 것이 바로 그였기 때문이다. 테레자는 자신이 그에게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에 꿈을 통해 토마시에게 그것을 가르쳐 준 것이다. 그녀는 모든 육체가 평등했던 어머니의 세계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그와 함께 살러 온 것이다. 자신의 육체를 유일하고 대체 불가능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그와 함께 산 것이다. 그런데 이제 토마시 역시 그녀와 다른 여자들 사이에 평등의 선을 그었다. 그는 같은 방식으로 모든 여자에게 키스했고 같은 식으로 애무했으며 테레자의 육체와 어떤 구별도, 정말 추호의 구별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그녀가 벗어났다고 믿었던 세계로 그녀를 되돌려 보낸 셈이다. 그는 다른 벌거벗은 여자들과 함께 행진하라고 그녀를 내몰았던 것이다.



   그녀는 무거운 트렁크를 위쪽 짐칸에 얹고 열차 구석 자리에 앉았다. 카레닌은 그녀의 발치에 웅크리고 있었다. 어머니와 함께 살던 시절 일했던 술집 요리사가 생각났다. 그는 틈만 나면 그녀 엉덩이를 찰싹 때리며 여러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그녀에게 동침을 제안했다. 바로 그 사람이 머릿속에 떠오른 것이 이상한 노릇이었다. 그는 그녀에게 혐오감을 일으키는 모든 것 그 자체였다. 그런데 지금 그녀에게는 오로지 한 가지 생각밖에 없었고 그를 만나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나하고 자고 싶다고 그랬지. 자, 나 여기 왔어."

그녀는 돌이킬 수 없는 어떤 짓을 저지르고 싶었다. 지나간 칠 년을 단번에 지워 버리고 싶었다. 그것은 현기증이었다. 머리를 어지럽히는, 극복할 수 없는 추락 욕구.

   현기증을 느낀다는 것은 자신의 허약함에 도취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자신의 허약함을 의식하고 그에 저항하기보다는 투항하고 싶은 것이다. 자신의 허약함에 취해 더욱 허약해지고 싶어 하며 모두가 보는 앞에서 백주 대로에 쓰러지고 땅바닥에, 땅바닥보다 더 낮게 가라앉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그(프란츠)는 땅바닥까지 머리를 조아리고 그녀(마리클로드)와 결혼했다. 그녀가 자살하겠다고 협박했던 순간만큼 강렬한 감정을 그에게 보여 준 적은 이후로 한 번도 없었지만, 마리클로드에게 결코 아픔을 주지 않고 그녀에게 내재된 여자를 존중하리라는 다짐은 그의 마음속 깊이 강렬하게 남아 있었다.

이 문장은 묘하다. 그는 마리클로드를 존중한다고 한 것이 아니라 마리클로드에게 내재된 여자를 존중한다고 다짐했던 것이다.

   마리클로드 자체가 여자인데, 그가 존중해야만 하는 그녀 속에 숨어 있는 또 다른 여자란 누구란 말인가? 여자에 대한 플라톤적 개념은 아니었을까?

   아니다. 그것은 그의 어머니다. 그가 어머니에게서 존경하는 부분이 여자였다고 말할 생각은 한 번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어머니를 사랑했지, 어머니에게 내재된 어떤 여자를 사랑한 것은 아니다. 여자에 대한 플라토닉한 개념과 그의 어머니는 동일한 것이었다. 



   지금까지는 배반의 순간들이 그녀를 들뜨게 했고, 그녀 앞에 새로운 길을 열어 주고, 그 끝에는 여전히 또 다른 배반의 모험이 펼쳐지는 즐거움을 그녀의 가슴에 가득 채워 주곤 했다. 그러나 여행이 끝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부모, 남편, 사랑, 조국까지 배반할 수 있지만 더 이상 부모도 남편도 사랑도 조국도 없을 때 배반할 만한 그 무엇이 남아 있을까?

   사비나는 그녀를 둘러싼 공허를 느꼈다. 그리고 바로 이 공허가 그녀가 벌인 모든 배신의 목표였다면?

   물론 지금까지 그녀에게 이런 의식은 없었고, 그것도 이해할 수 있다. 우리가 추구하는 목표는 항상 베일에 가린 법이다. 결혼을 원하는 처녀는 자기도 전혀 모르는 것을 갈망하는 것이다. 명예를 추구하는 청년은 명예가 무엇인지 결코 모른다. 우리의 행위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우리에게는 항상 철저한 미지의 그 무엇이다. 사비나 역시 배신의 욕망 뒤에 숨어 있는 목표가 무엇인지 모른다.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 이것이 목표일까? 제네바를 떠나온 이래 그녀는 이 목표에 부쩍 가까워졌다.



   테레자는 그녀가 가족과 어떻게 살았는지 표현하기 위해서 거의 유년기부터 이 단어를 사용했다. 집단수용소, 그것은 밤낮으로 서로 뒤엉켜 사는 세계였다. 잔인성과 폭력은 이 세계의 부수적 (전혀 필연적이지 않은) 측면에 불과했다. 집단수용소, 그것은 사생활의 완전한 청산이었다. 친구와 술을 마시며 토론할 때 자기 집에서조차도 (그것이 치명적 실수였음에 틀림없다!) 안전하지 못했던 프로하즈카는 집단수용소에서 살았던 것이다. 어머니 집에 살던 시절의 테레자는 수용소에서 지냈던 것이다. 그때 이후로 수용소란 아주 예외적인 것, 놀란 만한 것도 아닌 뭔가가 주어진 조건, 뭔가 근본적인 것, 세상에 나왔을 때부터 있으며 온 힘을 다해 극도로 긴장했을 때만 벗어날 수 있는 그 어떤 것임을 그녀는 알았다.



   그리고 그는 근본적인 문제는 그들이 알았는지 몰랐는지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문제는 몰랐다고 해서 그들이 과연 결백한가에 있다. 권좌에 앉은 바보가, 단지 그가 바보라는 사실 하나로 모든 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토마시와 테레자의 사랑은 그와 다른 여자와의 사랑이 끝났던 시점에서 정확하게 시작되었다. 그 사랑은 그를 여자 사냥에 나서게 했던 필연성과는 다른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그는 테레자의 그 어느 것도 들춰내려 하지 않았다. 그는 이미 완전히 드러난 상태인 그녀를 만난 것이다. 그는 세계의 육체를 열기 위해 사용하는, 그의 상상력의 메스를 채 손에 쥐기도 전에 그녀와 정사를 했던 것이다. 그녀가 정사 중에 어떠할 거라고 궁금해할 시간도 갖지 못한 채 이미 그녀를 사랑해 버린 것이다.

   사랑의 역사는 그 후에나 시작되었다. 그녀의 몸에서 열이 나는 바람에, 그는 다른 여자들에게 그랬듯이 그녀를 돌려보낼 수 없었다. 그녀의 머리맡에 무릎을 꿇고 앉자 불현듯 그녀가 바구니에 넣어져 물에 떠내려와 그에게 보내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이 은유가 위험하다는 것을 나는 이미 말한 적이 있다. 사랑은 은유로 시작된다. 달리 말하자면, 한 여자가 언어를 통해 우리의 시적 기억에 아로새겨지는 순간, 사랑은 시작되는 것이다.



   제네바에서 사 년을 지낸 후 사비나는 파리에서 살았으며 여전히 우울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누군가 그녀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냐고 묻는다 해도 그녀는 딱히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할 것이다.

   한 인생의 드라마는 항상 무거움의 은유로 표현될 수 있다. 사람들은 우리 어깨에 짐이 얹혔다고 말한다. 이 짐을 지고 견디거나, 또는 견디지 못하고 이것과 더불어 싸우다가 이기기도 하고 지기도 한다. 그런데 사비나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아무 일도 없었다. 그녀는 한 남자로부터 떠나고 싶었기 때문에 떠났다. 그 후 그 남자가 그녀를 따라왔던가? 그가 복수를 꾀했던가? 아니다. 그녀의 드라마는 무거움의 드라마가 아니라 가벼움의 드라마였다. 그녀를 짓눌렀던 것은 짐이 아니라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었다.



   서명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아직까지도 고민하는 이유가 뭘까? 그의 모든 결심 기준은 하나뿐이다. 테레자에게 해를 끼치는 일은 절대 하지 말 것. 토마시는 정치범은 구할 수 없었지만 테레자는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었다. 아니다, 그것조차도 그는 할 수 없었다. 그러나 탄원서에 서명한다면 경찰이 더욱 자주 그녀를 괴롭히러 올 것이며 그녀의 손은 더욱 심하게 떨릴 것이라는 것은 거의 확신할 수 있었다.

"대통령에게 탄원서를 보내는 것보다 생매장당한 까마귀를 꺼내 주는 것이 훨씬 중요하지요."






05. Good Will Hunting



   나의 완벽함만을 고집하다 놓친 사람들이 하나둘 생각이 난다. 아직 나의 불완전한 모습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나름 어른스럽게 행동한다고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다.




06. Kendrick Lamar - Good Kid, M.A.A.D City



   켄드릭 라마는 두 번째 정규 앨범에서 악명 높은 도시 Compton(M.A.A.D City)와 그 속에서 성장한 자신(Good Kid)의 모습을 담았다. 마약, 술, 총기, 절도, 폭력가 만연하는 세계 속에서 자신이 어떠한 영향을 받으며 성장하였는지를 기술한다. 그 과정 속에서 켄드릭 라마는 캄튼을 비난을 하지도 과시하지도 않는다. 그저 자신의 래핑으로 자신이 행동하고 목격한 것들을 전시할 뿐이다. 그리고 지금의 자신을 만들어준 이 미친 도시 출신이라는 것에 자부심을 느낀다. 물론 그 환경 속에서 훗날 사회적으로 성공한 건 순전히 그의 예술적 역량 때문이다.




07. Outro

현존은 미학적으로 정당화하는 것이다.
-프리드리히 니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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