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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서재 Part 1

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

#65 유현준 [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

by 컹리

교보문고 앞에는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라는 멋진 문구가 적혀 있다. 이 책을 읽으면 비슷한 문구가 떠올랐다. "사람은 도시를 만들고 도시는 사람을 만든다." 도시라는 유기체 안에 사람이라는 유기체들이 살아간다. 둘은 끊임없이 공진화한다.


하지만 건축물만이 가지고 있는 특이한 전달 매체가 있다. 그것은 비어 있는 보이드 공간이다. 공간은 우주가 빅뱅으로 시작되었을 때부터 시간과 함께 있었던 존재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이다. 공간이 없다면 빛도 존재할 수 없다. 공간이 없다면 우리는 시간을 느끼지도 못할 것이다. 건축은 이러한 공간을 조절해서 사람과 이야기한다. 이러한 보이드 공간은 건축의 도움을 통해서 느끼게 된다.


두 번째로 10차선의 속도를 늦춰 줄 수 있는 데크 공간이 너무 없다. 대신에 미국 대사관이나 역사박물관, 세종문화회관, 정부종합청사 같은 대형 건축물만 있다. 주변에 바라볼 것이 없으니 가운데를 보게 되고, 남들에게 노출되고 싶은 사람들이 그 공간을 점유하는 것이다. 그런 구성이기 때문에 시민에게 개방하기 위해 광화문 광장을 만들었지만 항상 정치적 시위 공간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중앙 집중식 공간은 거리로서는 바람직하지 않다. 우리가 세종로를 걷고 싶은 거리로 만들려면 건축물 앞에 한 줄로 가게를 설치하고 인도 위에는 버스 정류장 외에도 노천카페를 설치하여 전체적인 공간의 속도를 낮추어 주어야 한다. 그래야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거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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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가 코르뷔지에는 자신이 설계한 도안은 고층 건물과 고층 건물 사이를 녹지로 만들어서 고층 건물의 발코니에서 바라보면 넓은 자연을 볼 수 있게 계획하는 등 각각의 세대에서 바라보는 자연이 많음을 강조했다.

하지만 이는 그저 바라보는 자연일 뿐이었다. (중략) 르 코르뷔지에의 디자인에서 자연은 일상에서 체험되기보다는 보기만하는 대상으로 전락하면서 계획안은 실패하였다. 자연을 바라보는 대상으로만 이해했을 때 건축 디자인은 실패한다.


필자는 예술을 '인간의 감정을 일의는 무엇'이라고 정의한다. 마음속이 잔잔한 호수처럼 조용하다가도 어떤 노래를 듣거나 소설을 읽으면 마음속에 새로운 감정이 솟아난다. 그러면서 우리는 살아 있다는 것과 자신의 인간됨을 깨닫게 되는 것 같다. 배불리 먹고 잘 잤다고 인간다워지는 것은 아니다. 대신 가슴속에 무엇이 됐든 감정이 솟아날 때 비로소 인간됨을 느낀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예술은 감정을 일으켜 주는 대가로 돈을 받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돈으로 공간의 권력을 사는 것이다. 펜트하우스는 부자들이 권력을 갖는다는 자본주의 사회의 권력 구조를 확실히 보여주는 주거 행태라고 할 수 있다. 볼 수 있는 사람은 권력을 갖게 되고, 보지 못하고 보이기만 하는 사람은 상대적으로 지배를 받는다로 할 수 있다.


오스카 와일드가 말했듯이 '은행가 사람이 모이면 예술 이야기를 하고, 예술가들이 모이면 돈 이야기를 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돈 많은 자본가들이 보니 예술가들이 로프트에서 사는 모습이 아주 멋있어 보였다. 그렇게 하나둘 부자들이 이사를 오게 되고 높은 천장 높이의 트인 공간에서 사는 것이 뉴욕 여피(Yuppie)들의 '쿨'한 삶의 형태가 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건축은 오브제(object)의 성격이 강한 도자기나 그림과는 다르다. 건축은 사람이 들어가고 나오는 공간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계속해서 재료가 교체되고 복원되고 사용되면서 보존되는 것이 옳다.


생명체에 이러한 성장, 발전, 진화가 있듯이 도시에는 성장, 발전, 진화가 있다. [생명의 기물(Web of Life)]의 저자 프리초프 카프라 박사에 의하면, 어떠한 시스템이 살아 있는 유기체냐 죽어 있는 무기체냐를 결정하는 요소는 그 조직체의 패턴이 스스로 만들어지는(Self-Marking) 네트워크냐 아니면 외부에 의해서 수동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냐에 달려 있다고 한다. 이런 관점에서 도시는 초기 계획자의 디자인이라는 수동적인 패턴을 뛰어넘어 특정한 디자이너의 계획 없이 자생적으로 만들어지는 패턴들이 보이는데, 이 같은 자생적 패턴은 도시를 살아 있는 유기체로 보기에 충분한 증거라고 생각된다.


좋은 건축물은 소주가 아니라 포도주와 같다. 소주는 공장에서 화학 공식에 따라서 대량 생산되는 술이다. 소주는 생산하는 사람이나 지역의 다양성이라는 가치가 반영되지 않고, 인간과 격리된 가치를 가지는 술이다. 건축물에 비유한다면 찍어 내듯이 양산되는 아파트나 지역성이 전혀 반영되지 않은 국제주의 양식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겠다. 반면, 포도주는 좋은 건축물 같다. 같은 종자의 포도라도 생산되는 땅의 토양에 의해서 다른 포도가 생산되고, 같은 종자의 포도와 같은 밭이라고 하더라도 그 해의 기후에 의해서 다른 포도가 만들어지며, 똑같은 재료라고 하더라도 포도를 담그는 사람에 의해서 다른 맛이 만들어지는 것이 포도주다. 건축도 이같이 지구상에 단 한 종류밖에 없는 땅 위에 특별하게 주어진 프로그램에 특정한 건축가가 개입되어서 단 하나의 디자인이 나와야 한다.


우리의 삶은 개개인 하나만 살펴보아도 복잡하고 파악하기 힘들다. 그런데, 건축은 그러한 개인들이 모여서 이룬 더 복잡하고 심오한 사회를 담아내는 장치이다. 이 복합적 삶들을 담아낼 뿐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인간 행동들을 건축을 통해서 조절하기도 해야 한다. 그리고 어떠한 건물을 짓든 그 건축물이 들어서는 땅은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곳이다. 따라서 우리가 이 세상에 제대로 된 건축물을 짓기 위해서는 주어진 땅에 대한 이해와 그 땅 위에서 일어날 프로그램이 조심스럽게 다루어져야 한다.


공간은 실질적인 물리량이라기보다는 결국 기억이다. 우리가 몇 년을 살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시간 속에서 어떠한 추억을 만들어 냈는냐가 우리의 인생을 결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렇게 때문에 우리에게 다양하게 기억되는 공간은 우리의 머릿 속에서 이벤트 별로 각기 다른 공간으로 각기 다른 기억의 서람들 속에 들어가게 된다. 그렇게 되면서 우리의 머릿속에서 실제 크기보다 더 크게 인식된다.


여러 건축가들에게 한강의 미래를 생각해 보라는 주제를 준 워크숍이 있었다. 여기에서 건축가들이 가장 고민했던 것이 휴먼 스케일이 아닌 광활한 한강의 폭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었다. 그래서 전임 오세훈 시장은 비어 있는 한강에 보스턴의 찰스 강처럼 요트를 띄우고 싶어 했다. 평지 공원이 부족한 서울 시민에게 한강의 평평한 물이라도 사용 가능한 공원으로 만들어 보자는 의미가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잘 실행이 된다면 좋은 계획이 될 수 도 있을 것이다. 위에서 말한 워크숍에서 어떤 건축가는 한강에 집합 주거를 짓자는 계획도 내놓았고, 서울의 모든 행정 기관을 옮겨 오자는 계획안도 있었다. 이처럼 한강 개발에 대한 많은 접근 방식에서 우려되는 것은 비어 있는 한강을 지나치게 밀도 높은 공간으로 만들려고 하는 것이다. 지금 서울 시민들에게 한강은 마치 비어 있는 마당이나 도가 사상으로 만들어진 선정원같이 정신없는 서울의 일상에서 벗어난 비움의 공간으로 잘 이용되고 있다. 빈 땅이 있으면 그 땅에 무언가를 해야 하는 우리나라 국민에게 뿌리박힌 '개발DNA'가 한강에선느 잘못 작동하지 않았으면 한다.


프라이빗한 공간을 얻는 다른 방식은 익명성을 통해서 얻는 것이다. 대도시화되면서 공간의 부족으로 없어지는 사생활의 자유는 대도시의 익명성이라는 장치를 통해서 회복된다. 나를 모르는 여러 사람들 속에 섞여 있게 되면 나는 더 자유로워진다. 더 자유로워질수록 그 공간에서 사적으로 행동할 수 있다. 사적으로 행동한 만큼 그 공간을 소유하는 것과 마찬가지가 된다. 사람들은 이러한 완벽한 익명성의 자유를 얻기 위해서 멀리 해외여행을 간다. 그런데 아주 먼 곳까지 비행기를 타고 마음먹고 해외여행을 갔는데 거기에서 한국 사람을 만나면 김이 샌다.


하지만 집이 작거나 부모와 사는 경우가 많은 우리나라에서는 시간당으로 빌리는 모텔이 그 역할을 해 준다. 이처럼 개인의 욕망과 공간의 부족이 충돌되는 상황에서 시장 경제는 노래방, 비디오방, PC방, 룸살롱 같은 방 중심의 문화를 만들어 낸 것이다. 우리의 밀폐적인 방 문화는 우리나라 사람이 방을 좋아해서 만들어진 게 아니라 욕망과 공간적 제약이 합쳐져서 만들어 낸 해결책으로서의 결과물이다.


또 다른 식량 저장 기술은 가축을 키우는 것이다. 고대의 농부들이 돼지를 키우는 것은 남는 식량을 오랫동안 보존가능한 식량으로 바꾸는 기술이다. 소비 후에 남는 감자나 고구마를 돼지에게 먹이고 수년 후 기근 때에 돼지를 도살해서 식량으로 전용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에 보신탕을 먹는 풍습도 이와 비슷하게 부족한 단백질 공급원을 해소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하나의 문화라고 할 수 있다. 식량이 풍족할 때에는 먹다가 남은 음식을 개에게 먹이면서 보안용으로 개를 이용하다가 단백질이 필요한 순간에 개를 보신용으로 먹었던 것이다.


아시다시피 우리의 도시는 유럽의 유서 깊은 오래된 도시에 비해서 건축적으로 아름답지 못하다. 여러 가지로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오래된 건축물이 없어서다. 건축은 사람의 수명보다 오랫동안 지속된다. 오랜 시간을 거치면서 비로소 건축은 사람의 삶을 담아내고, 사람 냄새가 배어나는 '환경' 되는 법이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우리나라에는 한국 전쟁 이후에 새롭게 지어진 '젊은' 건축물들만 있을 뿐이다. 절대적 시간이 부족하니 시간이 만들어 내는 유서 깊은 도시가 안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옛 선형 중 장자가 '호접지몽'이라는 사자성어에서 잘 설명된다. 장자가 자신이 나비가 되는 꿈을 꾸었는데, 그 꿈이 너무 현실적이라 내가 나비 꿈을 꾼 것인지 아니면 나비인 내가 사람이 되는 꿈을 꾸는 것인지 모르겠다는 이야기이다. 이른 현실과 가상의 경계가 모호한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가 사는 세상이라는 것이 주관적 인식에 의해서 만들어진다는 것을 설명하는 이야기이다. 인터넷과 가상 공간이 발달한 현대 사회에서 우리가 체험하는 공간이라는 것은 다른 어느 시대보다도 더 주관적인 인식에 근거를 두고 있다. 따라서 건축 공간이라는 것도 어느 하나의 확정된 물리적 조건으로 바라보면 안 된다. 대신 정보의 해석에 의해서 달라질 수 있는 주관적 인식의 산물로 보는 것이 이 시대에 건축 공간을 바라보는 올바른 관점일 것이다.


빛이 물체를 때리면 반사된 빛이 수정체를 통해서 우리의 눈으로 돌아오고, 망막에 상이 맺히고, 그 상은 전기적 신호가 되어 뇌로 전달된다. 뇌는 그 정보를 연산해서 공간을 만든다. 현실은 뇌가 초당 200장 정도의 그림을 연산해서 만들어 낸 것이다.


일반적으로 외부인이 한 도시에 애착을 갖기 시작하는 시점은 그 도시의 도로망을 완전히 이해하기 시작하면서부터라고 한다. 그 이유는 자신이 어느 지점에 있는지 인식이 안 되면 길을 잃기 쉽고 공포감을 느끼게 되며 그러면 주변을 즐길 여유가 없이 경계만 하기 때문이다.


유럽의 성공적인 광장에는 두 가지 법칙이 발견된다. 하나는 랜드마크가 될 만한 건축물이 있거나, 둘째로 고아장 주변으로 가게들이 위치해 있다.


이처럼 더 많은 이벤트는 심리적으로 기억할 것이 많다는 것을 의미하고, 더 많은 기억들은 같은 시간을 더 길게 느끼게 만든다. 그리고 시간이 길게 느껴지면 공간은 더 크게 느껴지게 되는 것이다. 같은 원리에 의해서 공간을 크게 느끼게 하려면 시간을 길게 느끼게 해야 하고, 시간을 길게 느끼게 해야 하고, 시간을 길게 느끼게 하려면 기억할 사건을 많이 만들어 줘야 한다. 기억할 사건이 많게 하려면 많은 감정을 느끼게 해 주어야 한다. 철학자 강신주의 말처럼, 기억할 감정이 많다는 것은 인생이 그만큼 풍요롭다는 것을 의미한다.


70년대부터 시작된 아파트의 공급은 주로 여의도와 강남의 한강 주변 평지를 중심으로 시작되었다. 이때에는 땅이 평지였기 때문에 별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초기의 평지 중심의 아파트가 다 지어진 후에도 아파트가 더 필요해지자 달동네를 없애고 경사지에 아파트를 짓기 시작했다. 여기서 비극이 시작된다. 앞서 생성된 달동네는 비록 상하수도, 전기 설비는 제대로 들어가 있지 않았지만 공간 구조는 사람 위조로 되어 있었다. 집의 크기가 작고 심지어는 방 하나의 규모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휴먼 스케일이었다. 그러나 아파트는 그렇지 못하다. 하나의 건물에 최소 100세대가 들어가는 대형 건축물이다. 길이도 수십 미터가 된다. 이렇듯 수십 미터의 건물이 평지에 들어갈 때는 큰 문제가 되지 않으나, 경사지에 들어가게 되면 어떻게 되겠는가? 커다란 평지의 땅이 필요해졌다. 당연히 토목기사들은 커다란 계단식 택지 개발을 하였다. 건물을 땅에 맞추지 않고 땅을 기존 건물 스타일에 맞추어 버린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사는 땅에 어마어마한 콘크리트 옹벽을 보고 살게 된 배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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