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 헨리 키신저 [헨리 키신저의 세계 질서]
p.16
주요한 세력 중심지들 모두가 베스트팔렌 질서의 요소들을 어느 정도 실행하고 있지만, 어떤 중심지도 스스로를 이 체제의 타고난 옹호자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모든 중심지들은 내부적으로 상당한 변화를 겪고 있다. 문화와 역사, 전통적인 질서 이론이 그렇게 까지 다른 지역들이 공동 체제의 정당성을 옹호할 수 있을까?
그러한 시도가 성공하려면 인간의 죄건이 다양하다는 사실은 물론 자유를 추구하는 인간의 타고난 습성까지 존중하는 방식이 필요하다. 이런 의미에서의 질서는 강요할 수 있는 게 아니라 구축해야 한다. 실시간 통신이 이루어지고 혁명적인 정치 변동이 발생하는 시대에는 특히 그렇다. 어떤 세계 질서 체계든 지속 가능하려면 지도자들뿐 아니라 시민들도 그 체제가 공정하다고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두 가지 진실을 반영해야 한다. 첫째는 자유 없는 질서는 일시적 고양으로 유지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결국에는 그 질서와 균형을 이루는 세력을 초래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 진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화를 유지하는 질서 체계 없이는 자유를 보장하거나 유지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때로는 경험 스펙트럼의 양단에 있다고 설명되는 질서와 자유는 상호 의존적인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현대 지도자들은 매일 발생하는 긴박한 사건들에 굴하지 않고 이 균형을 달성할 수 있을까?
p.42
오늘날 베스트팔렌 조약의 이 개념들은 도덕적인 요구에 무관심한 채 부정적인 힘의 조종을 일삼는 체제라는 비난을 종종 받는다. 그러나 베스트팔렌 평화 조약에서 수립된 구조물은 합의된 규칙과 제한을 기초로 국제 질서를 제도화하고 지배적인 한 국가가 아니라 다수의 강대국들을 기초로 해서 국제 질서를 세우려던 최초의 시도였음을 보여 주었다. 처음으로 등장한 국가 이성과 '국익'의 개념들은 힘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힘의 사용을 합리화하고 제한하려는 시도를 의미했다. 군대는 여러 세대 동안 보편적인(동시에 모순되는) 도덕적 요구를 내걸고 유럽 전역을 행진해 왔다. 예언자와 정복자들은 개인의 야망, 왕조 및 제국의 야망, 종교적 야망이 뒤섞인 야망을 위해 총력전을 촉발했다. 이론적으로 논리적이고 예측가능한 각국의 국익이 서로 맞물리면서 유럽 대륙의 구석구석에서 전개되는 무질서를 극복해 줄 것이었다. 계산 가능한 사안들 때문에 벌어지는 국지전은 보편주의가 서로 경쟁함에 따라 추방과 개종을 강요하고 전면적으로 민간인을 희생시키는 시대를 대체할 예정이었다.
세력 균형은 애매모호한 특징을 지녔지만 강제적인 종교 전쟁에 대한 개선책을 간주되었다. 하지만 세력 균형을 어떻게 달성할 수 있을까? 이론적으로 세련 균형은 현실에 기초했다. 따라서 그 체제에 참여하는 모든 국가들은 세력 균형을 똑같이 생각해야 한다. 하지만 각 사회의 인식은 국내 체제나 문화, 역사에 영향을 받고, 아무리 객관적이라고 해도 힘의 요소들이 끊임없이 변화하는 중요한 현실에도 영향을 받는다. 따라서 세력 균형은 이따금 재조정되어야 한다. 세력 균현은 전쟁을 야기하지만, 그 균형이 전쟁의 규모를 제한하기도 한다.
p.90
메테르니히(오스트리아의 외무장관)에게 오스트리아의 국익은 유럽 전체의 이익을 의미했다.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다양성은 물론 공동의 유산과 믿음, 관습까지도 존중하는 체계 안에서 여러 인종과 민족, 언어를 통합하는 방법이 중요했다. 그 관점에서 보면 오스트리아의 역사적 역할은 다원주의, 따라서 유럽의 평화를 지키는 것이었다.
반대로 비스마르크는 프로이센의 지방 귀족 후손이었다. 그들은 독일 서부 출신 귀족들보다 훨씬 더 가난하고 훨씬 더 국제적이었다. 메테르니히가 연속성을 지지하고 유럽 사회의 보편적인 이념을 회복하려고 애쓴 반면, 비스마르크는 자기 시대의 모든 통념에 이의를 제기했다. 그가 정치가로서 모습을 드러내기 전까지 독일 통일은 민족주의와 자유주의의 결합을 통해 일어날 것이라는 생각이 당연시되고 있었다. 비스마르크는 이 두 가닥을 분리할 수 있음을 증명하는 일에 착수했다. 다시 말하면 질서를 지키는 데 신성 동맹의 원칙이 필요하지 않으며, 보수주의자들이 민족주의에 호소하면 새로운 질서를 수립할 수 있고, 유럽의 질서라는 개념은 전적으로 힘의 평가에 기초할 수 있음을 입증하는 데 주력했다.
p.93
빈 회의에서 새롭게 조정한 베스트팔렌 체제의 특성은 그 체제가 지닌 유동성과 실용주의였다. 보편적인 계산법을 갖춘 베스트팔렌 체제는 이론적으로는 어떤 지역에든 확장할 수 있고 어떠한 국가 조합도 받아들일 수 있었다. 하지만 독일이 통일되고 프랑스가 적대국으로 고정되면서 그 체제는 유연성을 잃고 말았다. 재임 기간 동안 전면 충돌을 미연에 방지하는 거장과도 같은 성과로 균형을 유지하고 잡아 주는 임무를 지속하려면 비스마르크 같은 천재가 필요했다. 그러나 한 세대마다 천재를 배 출하는 데 따라 안보가 좌우되는 국가는 어떠한 사회도 충족시키지 못한 과제를 떠안는다.
1890년에 비스마르크가 어쩔 수 없이 자리에서 물러난 이후(새로이 황제가 된 빌헬름 2세와 권한 범위를 놓고 충돌한 이후), 서로 중복되는 동맹들로 이루어진 그의 체계는 미약하게만 유지되었다. 비스마르크의 뒤를 이어 수상이 된 레오 폰 카프리비는 공 5개를 동시에 공중에 던져 놓은 비스마르크와는 달리 공 2개를 관리하는 것도 힘이 들다고 불평했다. 1891년 러시아와의 재보장 조약은 그 조약이 오스트리아와의 동맹과 부분적으로 양립할 수 없다는 이유로 갱신되지 않았다. 사실 비스마르크는 바로 그 점에서 그 조약이 유용하다고 생각했다. 프랑스와 러시아는 다른 동맹 관계를 알아볼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재조정은 변화무쌍하게 달라지는 유럽의 질서 속에서 전에도 여러 번 시도된 적이 있었다. 이 경우에 달라진 점은 그것이 제도화된 작업이었다는 사실이다. 외교는 이미 복원력을 상실했다. 외교는 점진적인 조정이라기보다는 생사가 걸린 문제가 되었다. 동맹 관계가 바뀌면 버림받은 국가 입장에서는 국가적인 재앙을 겪을 수 있기 때문에 각 동맹국은 가장 바람직한 신념에 구애받지 않고 동맹국으로부터 지원을 뺏어 낼 수 있었다. 그 결과 모든 위기가 확대되었고 서로를 위기에 끌어들일 수밖에 없었다. 외교가 각 진영의 내부 결속을 다지는 노력이 되면서 모든 불만이 영구화되고 강화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영국이 "영광의 고립(splendid isolation)" 정책을 포기하고 1904년 이후 프랑스, 러시아와의 평화 협정에 가담하면서 유연성의 마지막 요소가 사라지고 말았다. 영국은 공식적인 평화 협정을 맺은 게 아니라 참모 회담을 통해 사실상의 협정을 맺었다. 그렇다하더라도 영국에게는 상대 국가들 편에서 싸워야 하는 도덕적 의무가 생겼다. 영국은 균형을 잡는 국가로서 행동한다는 자국의 안정된 정책을 접었다.
p.97
빈 협정이 체결된 이후 40년 동안 유럽의 질서는 갈등을 완화시켜 주었다. 독일 통일 이후 40년 동안 그 체제는 모든 분쟁을 악화시켰다. 어떠한 지도자도 다가올 대참사가 어느 정도일지 예측하지 못했다. 근대적인 군사 무기의 지언을 받은 일상화된 대립 체계는 조만간 그 범위가 어느 정도일지 확실하게 알려 줄 터였다. 그리고 그 지도자들 모두는 자신들이 국제 질서를 해체하고 있다는 사실은 의식하지 못한 채 그 대참사의 발생에 기여했다. 프랑스는 알자스로렌 지방을 되찾겠다는 확고한 신념으로 전쟁이 필요했고, 오스트리아는 국가로서의 책임과 중유럽 국가로서의 책임 사이에서 주저하는 모습을 보여 줌으로써 전쟁에 기여했다. 독일은 자신들이 영국의 탁월한 해군력을 위협할 생각이 있는 것처럼 행동하면 영국이 유럽 최대의 지상 병력을 저지할 게 분명하다는 역사으 교훈을 모르는 척하며 해군력을 강화하고, 프랑스와 러시아와의 연속된 눈싸움에서 승리를 거둠으로써 포위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한 게 문제였다. 또한 러시아는 사방을 지속적으로 철저히 탐색함으로써 오스트리아와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남은 영토를 동시에 위협하며 전쟁에 일조했다. 그리고 영국은 연합군 측에 꾸준히 헌신할 것인지 헷갈리게 만드는 모호한 태도로 모든 방책의 결점을 한데 합쳤다.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영국의 지지로 프랑스와 러시아는 견고해졌지만, 그들과 거리를 두는 영국의 태도에 혼란스러워진 독일 지도자들은 영국이 유럽 전쟁에서 중립을 지킬 수도 있다고 믿게 되었다.
다른 역사적 시나리오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났을지 생각해 보는 것은 대체로 소용없는 짓이다. 그러나 서양 문명을 뒤집어 놓은 그 전쟁은 결코 피할 수 없는 필연성을 갖고 있지는 않았다. 그 전쟁은 자신들이 세운 계획이 가져올 결과는 물론, 대체로 평온한 시기로 간주된 해에 발생한 테러 공격이 어떤 대혼란을 안겨 줄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주요 지도자들의 연이은 판단 착오에 의해 발생했다. 결국 군사 작전은 외교 행위에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이는 이후 세대들이 절대로 잊어서는 안되는 교훈이다.
p.124
어떤 단일한 사회도 권력을 가진 적이 없고, 어떤 지도부도 복원력을 가진 적이 없고, 어떤 종교도 전 세계에 지속적으로 자신들의 경전을 강요할 활력을 갖지 못했다. 보편성은 이슬람교를 비롯하여 어떠한 정복자도 손에 넣을 수 없는 것임이 드러났다. 초기에 세력을 넓히던 이슬람 제국도 결국에는 권력의 중심지가 여럿으로 분할되었다. 마호메트가 죽은 뒤 발생한 계승권 위기는 수니파와 시아파로 이슬람교가 분열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이는 현대의 이슬람 세계를 규정하는 분열이기도 하다. 신생 국가에는 계승권 문제가 따르기 마련이다. 그 국가를 세운 지도자가 "예언자들의 봉인", 즉 신의 최후의 전달자로도 여겨지는 경우에는 그 논쟁이 정치적인 문제인 동시에 신학적인 문제가 된다. 632년 마호메트의 서거 이후 부족 연장자들로 이루어진 협의회는 마호메트의 장인인 아부 바크르를 그의 뒤를 이을 칼리프로 선출했다. 신생 이슬람 사회의 합의와 조화를 가장 잘 유지할 수 있는 인물로 인정받은 것이었다. 소수파는 그 문제를 투표에 부쳐서는 안 됐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인간의 불완전성을 의미하는 투표가 잘못된 행위였을 뿐 아니라 마호메트의 기장 가까운 혈족인 그의 사촌 알리에게 권력이 자동적을 넘어갔어야 했다고 생각했다. 마호메트의 사촌 알리는 일찍이 이슬람교로 개종한 중요한 인물로, 마호메트가 직접 선택했을 것으로 생각되는 영웅적인 전사였다.
두 파벌은 결국 이슬람교의 주요한 두 분파를 형성했다. 아부 바크르와 그의 뒤를 곧바로 이은 계승자들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마호메트와 신의 관계가 유일하고 궁극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이 보기에 칼리프의 주요 임무는 마호메트가 보여 주고 세운 것을 지키는 것이었다. 그들은 "전통과 합의를 따르는 사람들"을 줄여 말한 수니파가 되었다. 반면 알리시트 알리(시아)파에게 새로운 이슬람 사회에 대한 통치 작업은 비전의 요소가 수반된 영적인 임무이기도 했다. 그들은 예언자 마호메트와 알리의 직계 자손으로서 영적인 재능을 가진 사람들이 이끌어 주어야만 이슬람교도가 마호메트의 계시가 제대로 된 관계를 맺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예언자 마호메트와 알리는 이슬람교의 숨겨진 내밀한 의미를 '맡아 관리하는 사람들'이었다. 마침내 네 번째 칼리프로 집권하게 된 알리가 모반의 대상이 되어 폭도에 의해 살해당하자, 수니파는 이슬람 세계의 질서 회복을 가장 중요한 과제로 취급하면서 안정을 회복한 분파를 지지했다. 시아파는 새로운 정권이 불법적인 강탈자라고 비난하면서 저항하다 죽은 순교자들을 치켜세웠다. 이러한 일반적인 태도는 여러 세기 동안 지속되었다.
p.205
아시아의 전통적인 국제 체계를 구성한 원칙은 주권의 평등성이 아니라 위계질서였다. 힘은 지도상에 표시된 구체적인 국경선이 아니라 통치자와 통치자의 지배력을 인정하는 권위 구조에 대한 복종에 의해 드러났다. 제국들은 더 작은 정치 단위들의 지지를 얻으려고 애쓰면서 교역과 정치적 지배권을 퍼뜨렸다. 두 개 이상의 제국 질서가 교차하는 지점에 존재한 민족들에게는 종종 독립에 이르는 길이 하나 이상의 제국에 명목상 속국으로 등록하는 것이었다. (일부 지역에서는 오늘날에도 기억되어 실행되는 방법이다.)
중국의 모델에 근거하든 인도의 모델에 근거하든, 아시아의 전통적인 외교 체제에서 군주제는 신성함의 표현으로 간주되거나 적어도 일종의 가부장적 권위의 표현으로 간주되었다. 명확한 찬사의 표현은 열등한 국가들이 우월한 국가에게 바쳐야 할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론적으로 이로 인해 지역 권력 관계의 본질에 모호함이 남을 여지는 없었고, 수직적 협력 관계가 연이어 형성되었다 그러나 현실에서 이러한 원칙들은 놀라울 정도로 창의적이고 유동적으로 적용되었다.
p.219
유럽에서였다면 서로 다른 종교로 정의되었을 법한 독특한 신들과 철학적 전통까지 모두 포함되어 있어서 그 자체로 다양하고 정의 내리기도 힘든 힌두교는 "모두를 아우르고 무한한 것을 반영하는 동시에 현실을 추구하는 인간의 변화무쌍한 긴 역사를" 반영하면서 여러 우주 만물이 궁극적으로 일치함을 입증한다고 알려졌다.
기원전 4세기에서 기원전 2세기까지, 그리고 4세기에서 7세기까지의 기간처럼 통일되었을 때의 인도는 거대한 문화적 영향의 흐름을 발생시켰다. 인도에서 버마, 실론, 중국, 인도네시아까지 전파된 불교와 힌두교 예술 및 국정 운영 기술은 태국과 인도차이나 반도를 비롯하여 그 너머까지에도 영향을 미쳤다. 종종 그랬듯이 분열되어 있을 때의 인도는 침략군과 무역업자, 영적 탐구자들의 미끼가 되었다.(가끔은 한 번에 여러 가지 역할을 수행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대표적인 사람들이 포르투갈인들로, 1498년에 '기독교인과 향료를 찾아' 인도까지 왔다.) 인도는 그들의 약탈을 견뎌 냈고 결국 그들의 문화를 흡수하여 자신들의 문화와 혼합했다.
근대까지 중국은 자신들의 관습이나 문화 기반을 침략자들에게 아주 성공적으로 강요했다. 그 결과로 침략자들은 중국인들과 구분하기 힘들 정도가 되었다. 반대로 인도는 외국인들을 인도 종교나 문화로 전향시키는 게 아니라 그들의 야심을 최고의 평정심으로 대함으로써 외국인들을 초월했다. 인도는 한 번도 특별히 경외심을 느꼈다고 고백하지 않으면서도 외국인들의 업적과 다양한 원칙을 인도 사회의 구조 속으로 통합시켰다. 침입자들은 지독한 무관심에 맞서 자신들의 위대함을 스스로에게 재확인시키듯 자신들에게만 중요한 특별한 기념비를 세울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인도 민중들은 외세에 영향을 받지 않는 핵심 문화로 견뎌냈다. 인도의 기초를 이루는 종교들은 구세주의 실현에 대한 예언적 비전에 영감을 받은 게 아니다. 그보다는 인간의 존재가 허무함을 증명해준다. 인도의 종교들은 개인의 구원을 제공하는 게 아니라 빠져 나갈 수 없는 운명을 위로해 준다.
힌두교 우주론에서 세계 질서는 상상할 수도 없을 정도로 엄청난 규모의 불면의 주기, 즉 수백만 년의 주기에 의해 지배되었다. 왕국이 망하고 우주가 파괴되지만, 다시 만들어지고 새로운 왕국이 다시 등장할 것이었다. 침략자들이 올 때마다(기원전 6세기에는 페르시아, 기원전 4세기에는 알렉산더와 그의 그리스 박트리아인들, 8세기에는 아랍인, 11, 12세기에는 투르크와 아프칸, 13, 14세기에는 몽골, 16세기에는 무굴, 그리고 곧이어 여러 유럽 국가들이 침략해 왔다.) 그들은 이 영원한 행렬에 맞게 변화했다. 그들의 노력이 혼란을 줄 수도 있었지만 무한의 관점에서 평가해 보면 무의미했다. 인간 경험의 진정한 특성은 이 덧없는 격변을 견뎌 내고 초월한 사람들만 알 수 있었다.
p.228
1857년에 동인도회사 군대의 이슬람교, 힌두교 병사들이 폭동을 일으키자 런던은 영국의 직접 통치를 선언하며 폭동에 대응했다. 당시 영국은 이 조치가 다른 나라에 영국의 통치권을 수립하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영국은 자신들을 중립적인 감독자이자 가지각색의 민족과 국가를 문명화하는 사회 사업가가라고 생각했다. 뒤늦게 1888년에 한 대표적인 영국 관리는 다음과 같이 선언할 수 있었다.
인도라는 나라는 과거에도 지금도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유럽적인 관념에서 볼 때 물리적으로,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혹은 종교적으로 통일된 인도라는 국가도 존재하지 않는다. (중략) 따라서 그러한 인도가 존재할 가능성은 유럽에서 다양한 나라들을 대신해 단일 국가가 출현할 때를 기대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폭동 이후에 인도를 단일한 제국으로 다스리겠다고 결정한 영국은 그러한 인도를 탄생시키기 위해 온 힘을 다했다. 다양한 지역들이 철도와 공통 언어인 영어로 연결되었다. 고대 인도문명의 영광을 조사하고 정리했고, 인도의 엘리트드릉ㄹ 영국식 사고와 제도로 훈련시켰다. 그 과정에서 영국은 인도가 외국의 통치를 받는 단일한 독립체라는 의식을 다시 일깨웠고, 외세를 물리치려면 스스로 하나의 국가 되어야 한다는 정서를 불어넣어 주었다. 따라서 영국이 인도에 미친 영향은 나폴레옹이 독일에 미친 영향과 비슷했는데, 이전에 독일의 여러 국가들은 국가가 아니라 하나의 지리적 독립체로만 간주되었다.
p.243
중국은 아시아의 모든 세계 질서 개념들 중에서 가장 오래도록 지속되고, 가장 명확하게 규정되며, 베스트팔렌 이념과 가장 거리가 먼 개념을 운용했다. 또한 중국은 고매 문명에서 출발하여 전형적인 제국과 공산주의 혁명을 거친 뒤 현대에 열강의 지위에 오른 가장 복잡한 여정을 겪었다. 그리고 그 과정은 인류에 심오한 영향을 미칠 것이다.
기원전 221년에 단일한 정치 체제로 통일된 때부터 20세기 초까지 중국이 세계 질서의 중심에 있다는 생각이 중국 엘리트층에 뿌리 깊이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에 중국어에는 그런 중국의 위치를 의미하는 단어가 없었다. 학자들이 과거로 거슬로 올라가 "중국 중심의" 조공 제도를 규정했을 뿐이다. 이 전통적인 개념에서 중국은 어떤 의미로는 스스로를 세계에서 유일하게 주권을 가진 정부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중국 황제는 우주 차원의 인물이자 인간과 신 사이에서 중핵을 이루는 인물로 취급되었다. 중국 황제의 권한 범위는 '중국'이라는 주권 국가, 즉 그의 직접적인 통치 대상인 영토가 아니라 '하늘 아래 모든 것'이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중국은 중앙의 문명화된 '중화(中華)'를 형성하면서 나머지 인간들을 격려하고 고양했다.
이 시각에서 세계 질서는 서로 경합하는 주권 국가들의 균형 상태가 아니라 일반적인 위계질서를 의미했다. 모든 알려진 사회는 부분적으로 중국 문화와 얼마나 가까운가에 따라 중국과 일종의 조공 관계를 맺는 존재로 간주되었다. 어떤 사회도 중국과 동등한 위치에 도달할 수 없었다. 다른 군주들은 대등한 주권자가 아니라 개화되려고 노력하면서 통치 기술을 배우는 성실한 문화생이었다. 외교는 여러 주권국들의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과정이 아니라 외국 사회가 세계적인 위계질서에서 할당받은 위치를 확인할 기회를 얻은, 신중하게 구상된 일련의 의식이었다. (중략)
조공 제도의 목적은 경제적 이익을 얻거나 외국 사회를 군사적으로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복종을 촉진하는 것이었다. 최종 거리가 8000킬로미터가 넘는, 중국의 가장 두드러진 건축 업적인 만리장성 건설은 진시황이 시작했는데, 그는 모든 경쟁자들을 군사적으로 물리치면서 전국시대를 끝내고 중국을 통일했다. 만리장성은 군사적 승리뿐 아니라 약점에 대한 의식과 결부된 엄청난 힘을 의미하는 중국의 본질적인 한계까지도 증명하는 장대한 증거였다. 천 년 동안 중국은 무력으로 상대를 제압하기보다는 구슬리고 유혹하려고 했다. (중략)
중국 외교 의례의 특징인 중국식 절 고두는 황제의 우월한 권위를 인정하는 의미로 무릎을 꿇고 이마를 땅에 대는 절이다. 이는 확실히 굴욕적이기 때문에 근대 서양 국가들과의 관계에 장애물로 드러났다. 그러나 고두는 자발적인 행동을 상징했다. 그것은 정복당했다기보다는 경외심을 느낀 민족이 복종을 표시하는 전형적인 행동이었다. 그러한 경우에 중국이 받은 조공은 가치 면에서 황제의 답례 선물보다 떨어졌다.
가끔 반항적인 야만인들에게 '교훈'을 가르치고 복종을 이끌어 내려고 군사적인 습격을 가하기도 했지만, 전통적으로 중국은 자신들의 업적과 처신을 통해 심리적인 지배를 꾀했다. 이 전략적 목표들과 무장 충돌에 대한 심리적인 접근법은 다른 이웃 국가들과 비교한 핵심 이익을 확인하는 방식뿐 아니라 1962년 인도와의 전쟁, 1979년 베트남과의 전쟁 같은 최근의 사건에서도 명확히 드러났다.
그러나 중국은 서양에서 사용하는 의미로서의 선교 국가는 아니었다. 중국은 개종이 아니라 존중을 유도하려 했다. 그 미묘한 경계선을 결코 넘을 수는 없었다. 중국의 사명은 중국의 성과였고, 외국 사회들은 그것을 일전하고 알아볼 것으로 기대되었다. 다른 나라가 중국의 친구, 심지어 오랜 친구가 되는 것은 가능했지만, 중국의 동료로 대우받을 수는 없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이러한 지위와 비숫한 지위를 얻은 유일한 외국인들은 정복자들이었다. 역사적으로 문화 제국주의가 보여 준 가장 놀라운 위업 중 하나를 소개하면, 중국을 정복한 두 민족, 즉 13세기의 몽골족과 17세기의 만주족이 중국 문화의 핵심적인 요소들을 받아들임으로써 문화적으로 우월하다는 많은 수의 고집 센 민족을 쉽게 다스릴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정복자들은 패배당한 중국 사회에 크게 동화되었는데, 그들 본국의 상당 부분이 전통적인 중국 영토로 취급될 정도까지 동화되었다. 중국은 자신들의 정치 체제를 퍼뜨리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중국은 다른 국가들이 자신들에게 다가오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런 의미에서 중국은 정복이 아니라 흡수를 통해 세력을 확대해 나갔다.
p.257
미국과 중국은 세계 질서에서 없어서는 안 될 두 기둥이다. 놀랍게도 두 나라 모두 역사적으로 자신들이 현재 안착한 국제 체계에 대해 양면적인 태도를 보여 주었다. 체계 설계의 여러 속성에 대해 판단을 유보할 때도 그 체계에 대한 의무를 인정하는 모습을 보여 준 것이다. 중국은 21세기 질서가 요구하고 있는 식의 핵심 국가 역할을 해본 적이 없다. 미국 역시 자국과는 명백히 다른 국내 질서를 채택하고 땅덩어리나 영향력, 경제력 면에서 미국에 필적할 만한 국가와 지속적으로 상호작용을 해본 경험이 없다.
양측의 문화적, 정치적 배경은 중요한 부분에서 현저히 다르다. 정책에 대한 미국의 접근 방식은 실리를 중요하게 여기지만, 중국의 접근 방식은 개념을 중요시한다. 미국은 한 번도 자신들에게 위협이 되는 강력한 국가를 이웃으로 둔 적이 없었다. 반대로 중국은 국경선 주변에 강력한 상대가 없었던 적이 없다. 미국은 모든 문제에는 해결책이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중국인들은 모든 해결책은 새로운 문제의 입장권이라고 생각한다. 미국인들은 당장의 상황에 맞는 결과를 추구하지만, 중국인들은 발전적인 변화에 집중한다. 미국인들은 실질적으로 '얻을 수 있는' 항목들로 의사 일정을 세우지만, 중국인들은 일반 원칙을 찾아낸 뒤 그 원칙들이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분석한다. 중국식 사고는 부분적으로 공산주의에 의해 형성되지만, 전통적인 중국식 사고방식 또한 중요하다. 하지만 이 두 사고방식 모두 미국인들에게는 쉽게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익숙하지 않다.
p.266
미국의 외교 정책은 자신들의 국내 원칙이 명백하게 보편적이고 그 원칙들을 적용하면 항상 유익하다는 확신을 반영해 왔다. 다시 말하면 미국은 자신들이 해외에서 하는 활동이 전통적인 의미의 외교 정책이 아니라 다른 모든 민족이 복제하고 싶어 할 가치를 퍼뜨리는 사업이라고 확신했다.
이 원칙에는 놀라울 정도로 독창적이고 매력적인 비전이 내재되어 있었다. 구세계는 신세계가 부와 힘을 끌어 모을 수 있는 정복을 위한 무대라고 생각했지만, 아메리카 대륙의 신생 국가는 신념과 표현, 행동의 자유를 자국의 경험 및 특징의 핵심이라고 단언했다.
유럽의 질서 체계는 정치적 활동에서 도덕적 절대 원리를 조심스럽게 제기한 상태 위에 세워졌다. 이는 어떤 신념이나 도덕 체계를 유럽의 다양한 민족에게 강제하려던 시도가 너무나도 비 참하게 끝났기 때문일 수도 있다. 미국의 개종 정신에는 기성 제도와 위계질서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이 채워져 있었다. 따라서 영국의 철학자이자 국회의원인 에드먼드 버크는 식민지 이주자들이 유럽에서 제약받던 다양한 국교 반대 종파들('신교의 개신교')과 함께 "영국의 사상과 일치하는 자유"를 수출했다는 사실을 동료들에게 일깨우곤 했다. 바다를 건너며 서로 섞인 이 세력들은 독특한 국가 모습을 탄생시켰다. "미국 국민들의 자유에 대한 사랑은 전체를 눈에 띄게 만드는 주된 특징이다."
1831년에 미국을 다녀온 뒤, 미국 국민의 정신과 태도를 다룬 책들 중에서 지금도 가장 통찰력 있다고 손꼽히는 책을 쓴 프랑스 귀족 알렉시스 토크빌은 자신이 '미국의 출발점'이라 생각한 미국의 특징을 추적해 나갔다. 그는 뉴잉글랜드 지역에서 "지금도 미국식 자유의 원동력이자 활력소인 독립성의 탕생과 성장을 본다."고 지적했다. 또한 청교도주의가 "단순한 종교 교리가 아니라 여러 가지 점에서 가장 절대적인 민주정체와 공화정체의 이론을 공유하고 있다."고도 했다. 그러면서 그는 다음과 같이 결론 내렸다. "이것이야말로 완벽히 다른 두 요소의 산물이며, 다른 곳에서는 그 두 요소들이 서로 다툼을 벌이는 경우가 흔했지만 미국에서는 어쩐 일인지 서로 통합되어 놀라운 결합체를 형성하는 게 가능했다. 그 두 요소란 종교의 정신과 자유의 정신을 말한다."
p.282
루스벨트가 생각한 외교 정책은 미국의 국익에 유리하게 사건을 유도하면서 전 세계적으로 신중하고 결연하게 세력 균형을 유지하도록 미국의 정책을 변경하는 기술이었다. 그는 미국이 경제적으로 활력이 넘치고 주변에 위협적인 경쟁국이 없는 유일한 국가이며, 독특하게도 대서양 열강이자 태평양 열강이기 때문에 "동서양 대양의 운명을 결정하는 데 발언권을 가질 수 있을 정도로 유리한 입장을 확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미국이 외부 열강으로부터 신대륙을 지키고 다른 모든 전략적 지역에서 세력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개입한다면, 전 세계적인 균형을 지켜 주고 이를 통해 국제 평화까지도 지켜 주는 결정적인 국가가 될 것이었다.
이는 그때까지만 해도 자국의 고립이 자국의 본질을 규정하는 특징이고 자국 해군은 기본적으로 연안을 지키는 도구라고 생각하던 국가로서는 놀랍도록 야심찬 비전이었다. 그러나 루스벨트는 놀라운 외교 정책을 펼침으로써 적어도 일시적으로는 미국의 국제 역할을 다시 규정하는 데 성공했다. 루스벨트는 아메리카 대륙에 대한 외세의 간섭을 반대하는 먼로주의를 뛰어넘었다. 그는 베네수엘라에 침입하려는 독일을 저지하기 위해 전쟁을 치르겠다고 직접적으로 위협하면서 미국이 신대륙에 대한 해외의 식민지 계획을 물리칠 뿐 아니라 실제로 그 께획을 선점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는 미국이 다른 신대륙 국가들의 국내 문제에 에방적인 차원에서 간섭하여 "부정한 행동이나 무능한" 명백한 사건을 처리할 권리가 있다는 취지로 "루스벨트 추론"을 선언했다.
p.303
윌슨의 원칙은 침투력이 대단했다. 그리고 스스로에 대한 미국의 인식과도 크게 관련되어 있었다. 그 때문에 20년 두에 세계 질서라는 문제가 다시 등장했을 때, 두 대전 사이에 실패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그의 원칙들은 개선장국처럼 되돌아왔다. 미국은 또 한 번 세계 전쟁을 치르면서 본질적으로 윌슨의 원칙에 기초한 새로운 세계 질서를 구축하는 작업에 다시 착수했다.
미, 영 지도자로서는 처음으로 1941년 8월, 뉴펀들랜드에 정박 중이던 프린스 오브 웨일스 호에서 만난 프랭클린 델라노 루스벨트(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사촌이자 세 번 임기를 지낸 역사적인 대통령)와 윈스턴 처칠은 8개 조의 '공동 원칙'으로 이루어진 대서양 헌장을 통해 공동의 비전을 설명했다. 영국 수상을 지낸 정치인이었다면 그 모든 조항에 불편했을 테지만, 윌슨이었다면 8개 조 전부를 지지했을 것이다. 대서양 헌장에는 다음과 같은 조항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모든 민족이 자신들이 살아갈 정부 형태를 선택할 권리가 있다.", "관계 주민의 의사에 어긋나는 영토 획득은 인정하지 않는다.", "공포와 결핍으로부터의 해방", "궁극적인 무력 사용 포기에 앞서 국제적인 군축 계획을 실시한다.", "더욱 광범위하고 영구적인 안전 보장 체계를 확립한다." 등이다. 윈스턴 처칠이 패배를 피하려면 영국의 유일한 희망이자 최고의 희망인 미국의 협력을 얻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면, 이 모든 조하들, 특히 탈식민지화에 관한 조항을 제안하지도, 인정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p.304
루스벨트는 윌슨을 뛰어넘어 국제 평화의 토대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상세히 설명했다. 학자 출신인 윌슨은 본질적으로 철학적 원칙 위에 국제 질서를 구축하는 작업에 의존한 반면, 속임수가 난무하는 미국 정치계에서 살아남은 루스벨트는 사람 관리에 크게 의존했다.
따라서 루스벨트는 새로운 국제 질서가 개인적인 신뢰를 토대로 세워진다는 확신을 표현했다.(중략)
루스벨트는 1945년 네 번째 취임 연설에서도 이 주제를 다시 끄집어 냈다.
우리는 에머슨이 이야기한 "친구를 얻는 유일한 방법은 친구가 되는 것이다."라는 단순한 진리를 배웠습니다. 의심이나 불신을 품거나 두려워하며 평화에 다가간다면 영속적인 평화를 얻을 수 없습니다.
p.323
한국 전쟁은 결론 없이 끝났다. 그러나 이 전쟁이 야기한 논쟁은 10년 뒤 어떤 문제가 한국을 괴롭힐지 미리 알려 주었다.
1945년 일본의 식민지였던 한국은 승리를 거둔 연합국 측에 의해 해방되었다. 소련이 한반도 북쪽을, 미국이 한반도 남쪽을 점령했다. 양측은 점령 지역 철수를 앞두고 각각 1948년과 1949년에 자기들 식의 정부를 세웠다. 1950년 6월 북한은 남한을 침략했다. 트루먼 정부는 이 침략이 제2차 세계대전 전의 독일과 일본 침략을 모델로 삼은 중소 침략의 전형적인 사례라고 간주했다. 트루먼은 앞서 몇 년 동안 미국 군사력이 급격하게 축소됐는데도 불구하고 주로 일본에 주둔 중이던 미군을 이용하여 침략에 맞서겠다는 용기 있는 결정을 내렸다.
최근 연구 결과에 따르면 공산주의 측의 동기는 복잡했다. 북한 지도자 김일성이 1950년 4월에 스탈린에게 남침 승인을 요청하자 스탈린은 그를 독려했다. 스탈린은 2년 전 티토의 배신을 통해 1세대 공산주의 지도자들이 러시아의 국익에 없어서는 안 되는 소련의 위성국가 체계에 잘 적응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스탈린은 중화인민공화국이 선언된 지 3개월도 지나지 않은 1949년 말에 마오가 모스크바를 방문했을 때부터 위압적인 특징을 지닌 마오라는 사람이 이끄는 중국의 기분 나쁜 잠재력을 불안해했다. 남한 침략은 중국의 주의를 자국 국경선에 대한 위기 상황으로 돌리고 미국의 관심 또한 유럽에서 아시아로 돌리면서 미국의 일부 자원을 소모시킬 수 있을 듯했다. 소련의 지지로 침략이 성공한다면, 소련은 평양의 통일 사업으로 한국에서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국가들이 역사적으로 서로에 대해 품고 잇는 의심을 생각해 보면 아시아에서 중국에 대한 일종의 평형추가 생길 수도 있었다. 마오는 김일성이 아주 과장된 표현을 자신에게 전달했을 게 분명한 스탈린의 주도적 계획을 정반대의 이유로 따랐다. 그는 소련에 의해 고립되는 상황을 두려워했다. 한국을 차지하려는 소련의 관심은 여러 세기를 통해 이미 입증되었고 스탈린이 중소 동맹에 대한 대가로 요구한 이념적 종속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일찍이 한 탁월한 중국 인사는 결국 한국 전쟁을 계기로 미국이 대만에 전념하게 되면서 중국의 통일이 100년이나 연기되었기 때문에 한국전쟁을 승인하는 과정에서 마오가 스탈린에게 주도권을 내준 것은 마오의 유일한 전략적 실수였다고 내게 말한 적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전쟁의 기원은 미국을 상대로 한 중국과 소련의 음모라기보다는 공산주의 국제 질서 내부에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한 삼자 간의 작전이었다. 여기서 김일성은 남침 계획에 대한 지지를 얻기 위해 호가를 높였고, 그의 정복 계획은 모든 주요 관계자들에게 놀라움을 안기는 결과를 가져왔다.
공산주의 세계의 복잡한 전략적 고려 사항들은 미국 측과 일치하지 않았다. 실제로 미국은 공격을 물리치면서 원칙을 위해 싸웠다. 그리고 그 원칙을 실행하는 방법은 유엔을 통하는 것이었다. 유엔 주재 소련 대사가 유엔에서 중국 공산당을 제외시킨 데 대해 계속 항의하느라 안전보장이사회의 중요한 투표에 참석하지 않았기 때문에 미국은 유엔의 승인을 얻을 수 있었다. "공격을 물리친다."는 표현이 무슨 뜻인지는 명확하지 않았다. 그것은 완벽한 승리를 의미했을까? 그보다 덜 완벽하다면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한마디로 그 전쟁은 어떻게 끝나야만 했을까?
공교롭게도 경험은 이론을 앞질렀다.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이 1950년 9월에 감행한 기습적인 인천 상륙 작전은 남한에 북한군을 가두는 결과를 야기하면서 북한군에 상당한 패배를 안겼다. 승리를 거둔 미국은 38선을 따라 정해진 과거의 경계선을 넘어 북한으로 진격하여 통일을 달성해야 할까? 만약 그렇게 한다면 미국은 집단 안보 원칙에 대한 문자 그대로의 해석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공격을 물리친다는 법적 개념은 이미 달성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정학적 관점에서 보면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었을까? 만약 침략국이 이전 상태로 돌아가는 것 외에 다른 어떤 결과도 필요 없다면, 어딘가 다른 곳에서 침략이 재발할 수 있지 않았을까?
여러 가지 대안이 제시되었다. 중국 국경선에서 240킬로미터 정도 떨어져 있는, 한반도의 가장 좁은 부분인 평양에서 원산을 잇는 선까지만 진격하는 방안 등이었다. 이 방안을 추진했다면 중국 국경선에는 가까이 가지 않으면서 북한의 전쟁 수행 능력을 대부분 파괴하고 북한 인구의 90%를 통일된 한국에 흡수했을 것이다.
이제는 미국 입안자들이 어디서 진격을 멈출까라는 주제를 꺼내기 훨씬 전에 중국이 개입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다들 알고 있다. 일찍이 1950년 7월에 중국은 한국과의 국경선에 25만 명의 군대를 집결시켰다. 8월에 중국의 최고 입안자들은 우수한 미국군이 전쟁터에 전부 배치되고 나면 계속 진격 중인 동맹국 북한은 무너지게 될 거라는 전제하에 움직이고 있었다. (실제로 그들은 맥아더의 기습적인 인천 상륙을 정확히 예측했다.) 8월 4일 마오는 부산 주변에 전선이 형성되어 있는 와중에도 중국 공산당 정치국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미국 제국주의자들이 승리를 거두면 성공에 도취되어 분별력을 상실한 그들이 우리를 위협할 수도 있다. 우리는 조선을 도와야 한다. 그들을 지원해야 한다. 지원은 의용군의 형태로 우리가 선택하는 시기에 이루어질 수 있지만 일단 준비를 시작해야 한다." 그러나 그는 저우언라이에게는 만약 미국이 평양에서 원산을 잇는 선을 따라 남아 있다면 중국군은 곧바로 공격할 필요가 없으며 강화 훈련을 위해 멈춰야 한다고 말했다. 그렇게 잠시 멈춘 동안이나 그 이후에 어떤 일이 일어났을지는 추측만 가능할 뿐이다.
그러나 미군은 멈추지 않았다. 워싱턴은 맥아더의 38선 이북 진격을 승인했고 중국 국경선을 제외하고는 그의 진격에 제한을 두지 않았다.
마오 입장에서 미국이 중국 국경선까지 이동하는 것은 한국에 대한 지분 그 이상의 것과 관련되었다.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트루먼은 중국 내전의 양쪽 당사자들을 보호하는 것이 아시아 평화에 대한 미국의 공약을 이행하는 것이라는 주장을 들어 대만해협에 제7함대를 파견했다. 이러한 조치는 마오가 중화인민공화국을 선언한 지 9개월도 되지 않은 시기에 이루어졌다. 만약 미군이 중국 국경선을 따라 주둔하고 대만과 본토 사이에 미군 함대가 버티고 있는 상황으로 한국 전쟁이 끝났다면, 북한의 남침을 승인한 행위는 전략적 재앙으로 전락했을 것이다.
세계 질서에 대한 서로 다른 두 개념이 마주치자, 미국은 베스트팔렌 원칙과 국제법적 원칙을 따르면서 현 상태를 지키려고 애썼다. 현 상태를 보장하는 것만큼 마오의 혁명 임무에 대한 인식에 역행하는 것은 없었다. 마오는 중국 역사를 통해 한반도가 중국으로의 침략 루트로 여러 차례 이용된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의 혁명 경험은 내전이 교착 상태가 아니라 승리 아니면 패배로 끝난다는 명제에 근거했다. 그는 미국이 중국과 한국의 경계선인 압록강을 따라 안전하게 자리 잡고 나면 다음 안계로 베트남에 진출함으로써 중국을 고립화하는 과정을 마무리 지을 거라고 확신했다. 저우언라이는 1950년 8월 26일 중앙군사위원회 회의에서 "한반도는 실제로 세계에서 벌어지는 여러 투쟁의 중심지이다. (중략) 한반도를 정복한 미국은 분명 베트남을 비롯한 다른 식민지 국가들로 관심을 돌릴 것이다. 따라서 한반도 문제는 적어도 동아시아의 상황을 해결하는 열쇠와도 같다."는 설명으로 자신의 분석 내용을 밝히면서 중국의 전략적 사고에서 한반도가 맡은 중대한 역할을 입증했다.
이러한 생각들 때문에 마오는 1593년에 중국 지도자들이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이끈 일본 침략군에 맞서 추진한 전략을 반복했다. 실제로 초강대국과 싸우는 일은 쉽지 않은 과제였다. 적어도 두 명의 중국군 육군 원수가 미군과 상대할 부대에 명령을 내리기를 거부했다. 마오는 강력히 공격을 주장했고, 결국 중국의 기습 공격은 미군을 압록강에서 몰아냈다.
그러나 중국이 개입한 뒤에 그 전쟁의 목적은 무엇이 되었을까? 그리고 그 목적은 어떤 전략에 의해 실행될 수 있었을까? 이러한 의문은 이후 미국이 벌이는 전쟁에서 더욱 쓰라린 갈등이 빚어질 것을 예시하는 격렬한 논쟁을 야기했다.
공공의 논쟁은 현장 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와 합동참모본부의 지지를 받는 트루먼 정부 간에 벌어졌다. 맥아더는 과거 미국의 모든 군사 개입의 기초였던 전통적인 사실을 주장했다. 즉 전쟁의 목적은 중국에 대한 공습을 포함하여 필요한 방법을 모두 동원하여 승리를 성취하는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교착 상태는 전략적 차질이었고, 공산주의 세력의 공격은 그 공격이 발생하고 있는 아시아에서 물리쳐야 했다. 미국의 군사력은 멀리 떨어져 있는 지역에서 발생할 수 있는 만일의 사태를 위해 아낄 것이 아니라 필요한 만큼 모두 사용해야 했다. 여기서 멀리 떨어진 지역이란 서유럽을 의미했다.
트루먼 정보는 두 가지 방식으로 대응했다. 우선 트루먼 대통령은 1951년 4월 11일에 군부에 대한 문민 지배를 입증하기 위해 맥아더를 해임했다. 정부 정책을 부인하는 발언을 했다는 이유였다. 본질적으로 트루먼은 봉쇄 개념을 강조했다. 미국을 위협하는 주요 국가는 유럽 지배를 전략적 목표로 삼은 소련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독일을 상대로 한 전쟁에서 전투를 지휘한 바 있는 오마 블래들리 합동참모본부 의장의 표현에 따르면 한국 전쟁에서 군사적으로 끝장을 볼 때까지 싸우고 중국으로까지 전쟁을 확대하는 것은 "잘못된 곳에서, 잘못된 시기에, 잘못된 적과 싸우는 잘못된 전쟁"이었다.
500년 전에 그랬던 것처럼 몇 달 뒤인 1951년 6월부터 전쟁이 시작된 38선 근처에서 전선이 고착화되기 시작했다. 그 시점에 중국은 협상을 제안했고, 미국은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2년 뒤에 체결된 협정은 몇 차례 격렬하지만 단기적인 충돌로 중단되기는 했어도 이 책을 쓰는 지금까지 6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지속되고 있다.
이 전쟁의 기원과 마찬가지로 협상에서도 전략에 접근하는 두 가지 다른 방식이 대립했다. 트루먼 정부는 힘과 정당성의 관계에 대한 미국식 견해를 여실히 보여 주었다. 이 견해에 따르면 전쟁과 평화는 정책의 각기 다른 단계였다. 즉 협상이 시작되면 무력 사용은 중단되고, 외교가 주도권을 차지한다는 시각이었다. 각 활동은 각자의 원칙에 따라 작동되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무력은 협상을 이끌어내는 데 필요하지만 협상이 시작되면 한쪽으로 물러서야 했다. 그리고 협상 결과는 친선 분위기에 의해 좌우되는데, 군사적 압력은 좋은 분위기를 해칠 수도 있었다. 그런 의도로 회담이 진행되는 동안에는 방어적인 조치만을 취하고 대규모 공격은 시작하지 말라는 명령이 미국에 내려졌다.
중국의 시각은 정반대였다. 전쟁과 평화는 동일한 동전의 양면이었다. 협상은 전쟁터의 연장선이었다. 고대 중국의 전략가 손자가 쓴 <손자병법>에 따르면 가장 중요한 싸움은 심리전이다. 즉 상대의 계산에 영향을 미치고 성공에 대한 자신감을 떨어뜨리는 것이다. 적의 단계적 축소는 자신의 군사적 이점을 압박하여 이용할 수 있는 약점의 징후였다. 공산주의 측은 교착 상태를 이용하여 결론이 나지 않는 전쟁에 대한 미국 대중의 불편한 심기를 키웠다. 실제로 협상 중에 미국은 공격에 치중하던 단계만큼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면서 고통을 겪었다.
결국 양측은 각자의 목적을 달성했다. 미국은 봉쇄정책을 유지하면서 동맹국의 영토를 지켜 주었다. 이 동맹국은 이후 아시아의 핵심 국가로 발전했다. 그리고 중국은 자국 국경선에 다가오는 세력을 방어하겠다는 결의를 지켜 냈고, 자신들은 아무런 선택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만들어진 국제 원칙을 경멸하고 있음을 보여 주었다. 이 전쟁은 무승부로 끝났다. 하지만 한국 전쟁의 결과는 전략을 외교에, 그리고 힘을 정당성에 결부 지으며 자신들의 가장 중요한 목표를 규정하는 미국의 능력이 크게 부족할 수 있음을 여실히 드러냈다. 마침내 한국은 20세기에 한 획을 그었다. 그것은 미국이 승리가 목적이 아니라고 분명히 밝힌 첫 번째 전쟁이었고, 그 점에서 다가올 사태의 전조가 되었다.
나중에 밝혀진 것처럼 최대 실패자는 소련이었다. 소련은 애초의 침략 결정을 격려하고 동맹국들에게 대규모로 보급품을 제공함으로써 전쟁의 결말을 지탱해 주었다. 그러나 소련은 동맹국들의 신뢰를 잃었다. 중소 분열의 씨앗은 한국 전쟁에서 뿌려졌는데, 소련이 지원에 대한 대가 지불을 요구하면서 전투 지원 제공을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이 전쟁으로 미국이 신속하고도 방대한 규모로 재무장에 돌입하면서 서유럽이 불균형 상태로 되돌아가는 상황이 발생했다. 이는 미국의 봉쇄정책이 요구한 힘의 상황에 도달할 수 있는 엄청난 발전이었다.
양측은 좌절을 맛보았다. 일부 중국 역사가들의 주장에 따르면 중국은 불확실한 동맹국을 지지하려다 본토에 대만을 통합시키는 기회를 잃고 말았다. 그리고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로 미국을 따라다닌 무적의 기운과 방향 감각을 잃어버렸다. 아시아의 다른 혁명가들은 전쟁을 지지하고자 하는 미국 국민의 의지를 꺾을 수 있는, 결론 없는 전쟁에 미국을 끌어들였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교훈을 얻었다. 미국은 전략과 국제 질서에 대한 생각에서 격차가 있음을 깨달았고, 이는 베트남의 정글에서도 미국을 괴롭힐 예정이었다.
p.399
질서는 자유에 우선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자유에 대한 찬성은 전략에 대한 태도로부터 끌어올려져야 한다. 인간의 가치를 추구하는 과정에서는 고상한 원칙을 내세우는 것이 첫 번째 단계이다. 그 다음에 모든 인간사에 내재한 모호함과 모순을 헤쳐 나가면서 그 원칙들을 실행해야 하며, 그것이 바로 정책의 임무이다. 이 과정에서 정보 공유와 자유로운 제도에 대한 대중의 지지는 우리 시대에 등장한 중요한 새 일면이다. 기본적인 전략적, 정치적 요인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단독으로 약속을 이행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p.405
세계 질서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등장하는 핵심적인 문제는 그 질서의 통합적인 원칙들과 필연적으로 관련이 있다. 그리고 그 원칙들 속에 질서에 대한 동서양의 접근법의 기본적인 차이가 존재한다. 르네상스 이후로 서양은 현실 세계가 관찰자의 외부에 존재하고, 지식은 데이터를 기록하고 분류하는 과정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정확할수록 더 좋으며, 외교 정책의 성공 여부는 기존의 현실과 추세를 어떻게 평가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생각에 크게 전념해 왔다. 베스트팔렌식 평화는 현실, 특히 힘과 영토의 현실에 대한 판단을 종교의 요구에 우선하는 일시적인 질서 개념으로 설명했다.
동시대의 다른 위대한 문명에서 현실은 관찰자의 내부에 존재하며 심리적, 철학적, 종교적 신념에 의해 규정된다고 간주되었다. 유교는 중국 문화에 가까운 정도에 따라 정한 위계질서상의 속국들로 세계를 분류했다. 이슬람은 평화의 세계, 즉 이슬람의 세계와 이슬람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사는 선쟁의 세계로 세계를 나누었다. 따라서 중국은 자신들이 이미 질서 정연하다고 생각하거나 도덕성의 함양 정도에 따라 내부적으로 가장 훌륭하게 정돈된 세계를 찾으러 해외에 나갈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반면, 이슬람은 이론적으로 정복이나 전 세계적인 개종을 통해서만 세계 질서를 수립할 수 있었다. 실제로 두 방법을 위한 객관적인 조건이 존재한 것은 아니었다. 한편 역사의 순환과 형이상학적 현실이 현세의 경험을 초월한다고 생각한 힌두교는 자신들의 믿음 세계가 정복이나 개종으로는 새로운 입회자에게 열릴 수 없는 완벽한 체계라고 생각했다.
그러한 차이는 과학과 기술에 대한 태도 또한 좌우했다. 경험적 현실을 지배하는 데서 성취감을 느낀 서양은 세계의 먼 곳까지 탐험했고 과학과 기술을 발전시켰다. 다들 자기 문명이 그 자체로 세계 질서의 중심이라고 간주해 온 다른 전통적 문명들은 서양과 같은 추동력을 느끼지 못하면서 기술적으로 뒤처졌다.
이제 그 시대는 끝이 났다. 전 세계의 나머지 지역도 과학과 기술을 추구하고 있다. 그리고 적어도 중국이나 '아시아 호랑이들' 같은 국가들은 기존의 유형에 얽매이지 않기 때문에 서양보다 더 힘이 넘치고 유연성이 뛰어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