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환의 부엌

Day12

by 이지선

미역국이 끓는다.
맛은 없다.

핏빛 고기가 산처럼 쌓여있고, 내 손은 그것을 만진다. 차갑다. 아니다, 뜨겁다.

온도가 손가락마다 다르게 전해진다. 검지는 얼음을, 중지는 불을 만진다.

바닥에 흩어진 채소와 마늘 조각들. 파뿌리에서 실처럼 가는 흙이 자란다. 흙은 바닥을 타고 올라와 내 발목을 감는다. 나물을 삶았는데 채반이 없다. 물은 빠지지 않는다. 나물이 물속에서 다시 살아난다. 잎이 돋고, 뿌리가 손가락처럼 움직인다.


부엌 창문 너머로 누군가 들여다본다. 얼굴이 없다. 아니, 있는데 계속 바뀐다. 어머니, 시어머니, 딸, 나. 문고리가 돌아간다. 잠긴 문이 스스로 열린다. 그러나 아무도 들어오지 않는다. 빈 공간만이 문턱을 넘는다.

국이 넘친다. 뚜껑을 열 때마다. 넘친 국물이 바닥에 글씨를 쓴다. 읽을 수 없는 처방전. 고기는 언제 볶지? 프라이팬을 들자 손잡이가 뱀처럼 구부러진다. 기름이 하늘로 솟구친다. 떨어지지 않는다. 공중에 매달린 기름방울들이 샹들리에가 된다.


머릿속이 흩어진다. 잡채는 이미 완성되어 있다. 언제 만들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당면이 실핏줄처럼 투명하다. 안에 무언가 흐른다. 빨간색, 파란색, 투명한 것. 젓가락으로 집으면 심장박동이 느껴진다.

싱크대가 깊어진다. 바닥이 보이지 않는다. 설거지를 하려고 손을 넣으면 다른 부엌이 만져진다. 그곳에도 누군가 설거지를 한다. 우리의 손이 물속에서 스친다. 차가운 손. 떨리는 손.


누구의 생일인가

김장철인가
명절인가
장례식인가


말하는 건지 생각하는 건지 그저 허공을 보는 건지. 손만이 끊임없이 움직인다.


칼질을 한다. 썰리는 것은 채소가 아니다. 시간의 단면들. 어제의 양파, 내일의 당근, 10년 전의 무. 도마 위에 세월이 나란히 놓인다.

음식이 나를 앞질러 쌓인다. 쌓인 음식이 탑이 된다. 나는 그 꼭대기에 서 있다. 아래를 보니 모든 층이 다른 시간이다. 신혼의 된장찌개, 첫 아이 백일의 잔치국수, 시어머니 생신상, 아직 오지 않은 누군가의 미역국.


내 손인데 내 손이 아니다. 할머니의 손, 어머니의 손, 딸의 손이 겹쳐진다. 관절마다 다른 세월의 주름. 완성된 잡채가 다시 날것으로 흩어진다. 끓던 국물이 찬물로 돌아간다. 찬물이 얼음이 되고, 얼음이 수증기가 되고, 수증기가 눈물이 된다.


부엌이 회전한다. 천장과 바닥이 바뀐다. 나는 천장에 거꾸로 서서 요리한다. 중력이 반대로 작용한다. 모든 것이 위로 떨어진다. 떨어지는 나를 누군가 받는다. 텅 빈 부엌에서 나 혼자, 나를 받는다.


끝났다가 시작되고
시작했다가 끝난다
요리했다가 날것이 되고
날것이었다가 썩는다
썩었다가 다시 씨앗이 된다


나는 그저 반복의 물결에 떠내려간다.

아니다. 물결이 나를 통과한다.

부엌도, 음식도, 시간도 모두 나를 통과하는 파도다.

마지막으로 가스레인지의 불꽃을 본다. 파란 꽃잎처럼 하늘거린다.

그 속에 또 다른 부엌이 있다. 무한히 작아지는 부엌들. 그 모든 부엌에서 나는 미역국을 끓이고 있다.


현실

오늘 병원에 환자가 없다. 일요일. 적막하다.

차트는 비어있는데 몸은 이미 지쳐있다.

밤새 진료하고 처방하고 상담하고 시술한 것처럼.

하루의 일정은 분명한데 모든 것이 이미 지나간 듯하다. 시작하지 않은 하루가 벌써 끝나버렸다.

진료실 펜은 제자리에 있는데 내 손은 수십 번 처방전을 쓴 듯 무겁다.

빈 대기실 의자들이 누군가 앉았다 간 자국처럼 희미한 그림자를 남긴다.

집도 비어있다. 아이들은 각자의 일정, 남편은 골프. 혼자 앉아 식은 국을 한 숟가락 뜬다.


경계 노트

우리는 매일, 있지도 않은 것을 위해 움직인다.

그것이 희망인지 관성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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