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글보글 물 끓기 3분 전
이름, 나의 이름, 나의 친구의 이름, 나의 가족의 이름,
내가 사는 동네의 이름, 내가 사는 도시의 이름...
우리나라는 비교적 이름이 단순하다.
절대 나쁜 의미가 아니다.
어쩌면 그저 내가 우리나라 사람이기 때문에,
쉽게 생각하는 게 아닐까? 하고 객관적으로 고민해 봤지만,
다시 생각해도 역시 우리나라의 이름은 단순하다.
우리나라 역시 한자 문화권이기에
때로는 한 이름이 여러 의미를 내포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나라의 이름은 단순하다.
무척이나 대단하고 멋진 일이다.
뜬금없이 이름 타령을 하는 이유는 최근 읽고 있는 책 때문이다.
나는 과거에도 이 이름 때문에 굉장히 괴로워하며 읽은 책이 있었다.
그것은 일본 역사소설 <대망>이다.
과거 워낙이 <삼국지>를 좋아하던 나로서는 일본 역사 소설 <대망>에
관심을 안 가지려야 안 가질 수 없었다.
<대망>역시 <삼국지>가 그러하듯 전쟁이 끊이지 않던 전란의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렇기에 무수히 많은 등장인물들이 스쳐 지나간다. 세어 보진 않았으나,
채감상 <대망>의 등장인물이 훨씬 많게 느껴지며, 그뿐만 아니라
<삼국지>의 등장인물의 이름은 한자의 음을 우리나라 식으로 그대로 읽는 방식이기에,
등장인물들의 이름이 길어야 4자 이내로 끝난다.
(물론 대망도 이러한 방식으로 쓰여진 버전이 존재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대망>은 아니다.
쉽게 매우 잘 알려진 등장인물들만 살펴봐도
오다 노부나가, 도쿠가와 이에야스, 도요토미 히데요시... 등등
발음도 어려울 뿐만 아니라, 무려 10자에 가까운 이름들이 빈번하다.
더군다나 <대망>은 <삼국지>와 달리 쇼군의 딸, 즉 공주에 대한 얘기도 중요하다 보니,
등장인물들의 서사 및 관계가 더욱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그렇게 이게 누군지, 저게 누군지 한참을 책장을 뒤적이며 읽었던,
그렇기에 이 <대망>이라는 소설은 내게 있어 그다지 좋은 기억은 아니다.
그저 지금 생각해 보면 이 <대망>을 한 번 다 읽은 것만으로
나 스스로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을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아마도 그때부터 등장인물들이 많은 타국의 역사소설들을 좀 멀리 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렇게 잊고 지내던 <대망>의 악몽을 요즘 다시 겪고 있다.
그 시작은 최근 지인으로부터 책한 권을 선물 받게 되면서였다.
이 작품은 중앙 유럽 체코를 비롯한 폴란드, 오스트리아에 관련된 작품이었으며,
정확한 시대적 배경이 나와 있지는 않지만, 내용으로 봐서는 대충
1차 세계대전 전후 일 것 같아 보였다. (아무래도 그때의 오스트리아가 가장 시끄러웠을 테니...)
책의 한 문장만 예를 들어 보자면,
[게오르크 카프리르시 폰 술라비체는 그 남자를 모이세스 혹은 에이시크라고 불렀다.]
<대망>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
등장인물의 이름과 지명만으로 책의 한 줄을 거뜬히 채울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울 따름이었다.
가령 A 가문의 아들 AA 가 B 가문의 딸 BB와 결혼한다고 치면,
이 단순한 내용만으로도 이미 3~4줄은 거뜬히 넘길 수도 있다.
하물며 이런 등장인물들의 행적까지 기억하며 책을 읽는 것은 굉장히 머리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덕분에 책을 읽으면서도 여러 번 앞장을 들춰 가며 읽어 나아가고 있다.
이 작품을 읽으며,
나의 친구들의 이름이 '게오르크 카프리르시 폰 술라비츠'아니라는 것에,
또 나아가 내가 대한민국에 태어났다는 것에 새삼 감사함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