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찬 기운 속에서 골목길, 개 짖는 소리가 멀리 들려옵니다. 아침 해는 점점 늦잠 자고 풀벌레 우는 소리가 매미 소리를 대신하는 것이 익숙해지는, 시나브로 낭만과 우울이 고개 들기 쉬워지는 계절이 왔습니다. 사람들은 얇은 겉옷을 옷장에서 꺼내 털어 입고 한여름을 버틴 나무들은 고생했던 옷을 하나, 둘 벗어 내립니다. 사이사이 내리는 가을비의 탓으로 기온이 뚝하고 떨어졌다 낮이면 다시 오르는, 큰 일교차에 부쩍 날이 추워졌다며, 일교차가 커서 감기 걸리지 않도록 조심하라며 멀리서 사는 가족들에게 안부를 묻고 괜히 잊었던 첫사랑을 떠올려 보고 싶은 밤은 길어지는, 아, 그러게요. 가을이 왔네요.
뭐든지 빠르고 쉽게 얻어지는 세상입니다. 손가락 몇 번이면 몇 시간 뒤 문 앞에 원하는 식료품이 배달되고 연락처를 주고받는 것은 마음이 너무 적나라하게 드러나니까 서로를 알아가는 노력 이전에 SNS 계정을 교환하여 염탐을 먼저 하기 쉬워진 세상입니다. ‘내 사랑에 유통기한이 있다면 만년으로 하고 싶다.’라는 1994년작 중경삼림의 대사도, ‘당신의 눈동자에 건배’라고 멋지게 번역된 흑백영화 카사블랑카의 대사도 더 이상 나올 것 같지 않은, 우리는 낭만 실종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어디선가 낭만은 부로, 찾아야 얻어지는 일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왜 우리는 더 이상 서로를 생각하며 애써 편지를 쓰지 않고 확신 없는 고백을 하지 않게 된 것일까요. 밤이 오는 것은 사멸, 다음 날의 생을 또 맞이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죽은 시간을 애도하고 마무리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낮의 우리를 잘 살아내는 일이겠지요. 우리는 시간을 잘살고 있는 것일까요. 삶에 대해서 고뇌하고 고심하는 사람들을 미련하다, 너무 무겁다고 치부하는 생각의 끝에 걸린 일들에 대해서 생각해 봅니다. 죽어있는 것들에 집착하는 것 대신 부딪히고 사랑하고 또 상실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방법을 나는 택하고 싶습니다.
언젠가 이별했던 가장 현실적인 애인이 가장 낭만적인 이별을 가져다주기도 하고 늘 원망했던 부모가 아이같이 보이는 날이면 끝끝내 참아 낸 울음을 터트려 봅니다. 나는 참았던 눈물을 터트리고 마는 일에 대해서 알고 싶습니다. 나는 틈을 더 자세히 관찰하려는 사람, 그 틈 사이에 낀 이끼의 냄새를 맡고 활달해져서 독이라도 삼키고 싶은 사람입니다.
오늘은 산에서 달리는 끝에 안개가 자욱한 것을 보았습니다. 거대한 운무가 산 전체를 삼키고 내린 안개의 습기로 나무의 축축한 향기가 팔의 솜털을 타고 코끝으로 전해져 왔습니다. 추워진 밖의 공기와 달리느라 열이 난 나의 몸의 분리로 몸에서 하이얀 연기가 올라오는 것을 보았죠. 나는 부쩍 늙어가는 것도 같았습니다. 이렇게 산속에서 이끼가 되어 커다란 바위에 붙어서 바람결에 나를 내어주고 말면 좋겠다고. 지나가는 모든 등산객을 짝사랑해 보다가 짝사랑하는 마음이 아려서 펑하고 꽃을 틔워내고 마는 싹이 또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어제 만난 친구에게 내가 한 시절 사랑을 받았던 일과, 그 사랑을 받았던 일이 죽어가던 나를 다시 호흡하게 한 일과, 살아서 또 누군가를 살려보려고 한 일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나는 여전히 너무 많은 말을 하지 싶었지요. 그러나 친구가 너는 낭만적이네.라는 말을 하는 순간 나의 많은 말이 주는 머쓱함은 조금 사라졌지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고개를 힘껏 젖혀서 하늘을 보고 하늘이 어두워져서 잘 보이지 않는 달을 찾아보았습니다. 낭만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다가 아리게 보내고 싶어도 보낼 수 없는 편지들을 가지고 사는 마음 같은 것 같기도 또 그저 부재중 전화에 쌓여있는 ‘엄마’라고 적힌 목록 같기도 한 귀갓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런 귀갓길을 가진 삶을 살면 그만이겠거니 하고 띠리릭, 하고 혼자 사는 자취방 문을 열고 들어옵니다. 이런 사유적인 생각의 끝에 나를 헤집고 물어뜯는 것만으로 괜찮다고. 또 저마다 어딘가 숨은 은둔 고수처럼 낭만을 품은 채 끝끝내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거취를 나는 믿고 있으니까, 그것으로 아예 낭만 실종은 아니라고. 우리들은 다 각각의 철학자로서 살아간다고. 어제는 그래요, 나는 낭만이었나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