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시인에게서 사과 한 알을 훔치는 방법을 배웁니다. 방 안 가득 쌓여있는 책에서 다양한 발자국을 수집합니다. 모호해져서 사라지고 싶은 날이면, 읽었던 글들이 자꾸만 생기를 불어넣습니다. 나는 가느다래지고 싶었다고 생각했는데 문득, 짙어지고 싶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고개를 들어보면 어느새 명암만 있는 세상의 내가 됩니다.
오늘은 이른 아침부터 비소식이 있었습니다. 언젠가부터 우리나라도 일기예보와 관계없는 돌발성 비가 내리곤 합니다. 집을 나서기 전, 일기예보를 알려주는 어플을 세 개정도 비교해 봅니다. 셋 중 둘은 비소식 없었고 하나는 약한 비소식이 있었습니다. 산을 갈까 하다 비가 와 어두워진 산은 조금 위험한가 싶어 집 근처의 생태공원 쪽으로 발걸음을 돌립니다. 지금의 동네로 이사 온 지 사 년 만에 나는 이 동네를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계기는 달리기 때문입니다.
우리 집에서 30분 정도면 높지 않은 산으로 향하는 데크길에 들어설 수 있고, 20분 정도면 낙동강을 끼고 조경이 잘 되어있는 생태공원에 갈 수 있습니다. 올초, 힘든 마음을 집 안에서 어찌할 수가 없어 뛰쳐나가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덕분에 집 주변의 좋은 장소들을 많이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동네에서 살 게 된 것이 처음으로 운이 좋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적당한 곳에서 달리기를 시작하게 되어 다행입니다.
요즘 이삼십 대 사이에서 ‘러닝’이 붐입니다. ‘러닝코어’, ‘러닝크루’ 등 러닝 관련된 수많은 용어 및 상품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지역별로 ‘러닝’을 취미로 하는 사람들이 모여 ‘크루’를 만들어 다 함께 뛰는 문화도 활발하다고 들었습니다. 이제 갓 달리기에 취미를 붙이고 있는 나로서는 다들 멋있어 보이고 대단해 보입니다. 하지만 오늘도 나는 혼자 달립니다. 혼자 달리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나는 과연 러닝 훈련을 통해 러닝 실력을 늘리고 싶은 걸까 하고요. 그래서 하프 마라톤을 참가해 보고 풀코스를 완주해 보고 싶어 질까 하고요. 하지만 전 역시 그러고 싶지는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냥 조금 느리더라도, 가다가 멈추더라도 풍경이나 보고 바람이나 맞으며 좋아하는 노래를 듣는, 이런 유유자적한 달리기가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거든요. 나는 달리기를 하러 나가기 전 집에서 소포장되어 있는 냉동떡과 전날밤부터 얼린 아메리카노를 러닝조끼에 넣어서 나옵니다. 그렇게 살뜰히 챙겨 40분 정도를 달리면 간식들이 알맞게 녹아 있습니다. 그러면 나는 적당한 자리를 찾아 시원하게 얼려온 아메리카노와 떡을 야금야금 먹습니다. 흠뻑 땀으로 젖은 채 호흡을 가다듬으며 먹는 그 순간이 너무 행복합니다. 행복이 여기 있지 뭘 더 바라 싶습니다. 이런 ‘한량 러너’인 나를 열심히 훈련하는 러닝 크루가 받아줄 것 같지 않습니다. 나는 내 속도대로 혼자 산에 가서 달리고 날씨를 살펴 집 근처 공원에서 달리는 것이 맞는 사람 같습니다. 그리고 생각합니다. 휩쓸리지 않고 좋아하는 것이 명확한 ‘한량 러너’라서 다행이라고요. 그래서 앞으로도 오랜 시간 혼자 달리기를 하고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집으로 돌아오니 침대 위에 책들이 너저분하게 펼쳐져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전날 밤에 읽다 잠에 든 채 늦잠을 자버려 허겁지겁 운동을 갔기 때문입니다. 책을 치우다가 침대 옆 책 산을 건드려 책들이 와르르 무너집니다. 그 상태로 책을 정리하다 손에 잡힌 시집을 펼쳐 읽었습니다. 문보영 시인의 [모래비가 내리는 모래 서점]이라는 시집이었습니다. 나는 여긴 책비가 내리는 침실 서점인가 싶어 그 상태로 책을 읽다가 샤워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좋아하는 게 많아서 자꾸 멈추고 마는, 어쩔 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그래도 자꾸 멈춤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앞을 향해 가다가도 목표를 향해가다가도 자꾸 멈춰 서서 나를 돌아보고 어디가 불편한지, 무리하고 있지는 않은 지 잘 확인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생각보다 자신이 어디서 어떻게 멈춰야 하는 지를 모르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무리하게 자신을 이끌고 운전하다 끼익, 사고를 내곤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차가 퍼지고 나면 한참 다시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나는 아주 오랫동안 큰 사고를 빈번히 내면서 자주 멈춰 서 있곤 했습니다. 앞으로는 되도록 그런 일이 발생하기 전에 ‘딴짓’ 많이 하면서 나를 돌아봐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자꾸 내가 딴 짓을 하게 만들어 준 것이 책들인 것 같습니다. 독서를 하면서 시인과 책 주인공들을 흉내 냈습니다. 그들의 감정과 방법을 훔쳐서 써보곤 했습니다. 아주 도움이 되었습니다. 나는 지치면 종종 그런 일들을 나도 알게 모르게 해 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고 돌아보니 문득, 내가 짙어져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내 세상이 명확하면 풍경이 변해도 나는 오롯할 수 있겠다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예를 들면 열심히 달리기 실력을 늘리는 것보다 적당히 녹은 떡에 더 관심 있는 오늘 아침처럼 말입니다. 앞으로도 달리기를 하면서도 떡을 먹기 위해 멈추고 열심히 살더라도 한 번씩 멈추며 나를 잘 돌아보아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