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끝내는 누군가와 유대하고 사랑하고 싶어 하는, 함께하려는 본능을 지닌 약한 존재 같으면서도 또 지치지도 않는 마음을 계속 일으켜 세우고 또 주려 하는 강한 존재이기도 한 걸까. 언제나 보는 풍경이어도 늘 사랑하는 사람이 마음 한편에 뜬다. 달처럼 환하게. 당신과 아름다운 것들을 보고 싶다는 마음이 어제 졌어도 오늘 또 뜨고 만다. 다짐은 속절없고 다정을 헤프게 쓰고 싶은 시절은 누구에게나 오고 마는 운명이다.
어제는 요가 수련을 받다가 눈물이 났다. 꾹꾹 눌러 담느라고 얼굴이 홍시처럼 붉어졌다. 나는 종종 요가하다가 울음이 나곤 한다. 홍시처럼 말랑하고 달고 싶은 마음이 약함을 대리한다는 착각을 했던 시간도 있었다. 요가는 각자가 지닌 신체의 특성이 다르기 때문에 접근 가능한 아사나의 범위 또한 다른데, 선천적으로 전굴에 있어서 유연함을 타고 난 내가 늘 수련에 애를 먹는 것들은 후굴을 이용한 동작들이다. 아나하타차크라, 가슴과 마음을 펼 수 없어서 그런가라는 생각도 해보았지만 그냥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흉추를 펴내고 가슴을 들어 올리라는 조언도 아주 오랫동안 굽어있던 신체에는 듣지를 않았는데, 어제는 후굴을 이용한 동작인 라자카포타아사나에 접근하며 처음으로 자력으로 나의 발끝을 잡았다. 늘 손발이 아주 찬 나다. 숨이 쉬어지지 않고 요통은 극한에 달하는 데, 조금씩 아주 조금씩 손가락을 움직여 나의 발 쪽으로 고통과 두려움을 안고서 이동하다 문득, 차갑고 작은 내 발가락이 내 손에 닿았다. 평소에는 쉽게 만질 수 있는 발가락이 낯설고도 반가웠다. 그리고 나는 갑자기 눈물이 날 뻔했다. 1년 동안 후굴의 접근을 수련하느라 요통을 달고 있는데,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았다. 잘하는 것을 계속하는 것보다 힘들고 두렵지만 잘되지 않는 것을 멈추지 말자고, 공포와 고통을 마주하자고 늘 다짐했던 마음이 보답받는 것 같아서 나는 눈물이 조금 났다. 내가 요가를 하면서 배운 것은 이런 것이었다. 자기 자신을 믿는 일 같은 것들.
오늘 아침에도 언제나와 같이 달리기를 하러 갔다. 여섯 시 반이 넘어도 12월의 새벽은 캄캄하다. 밤이 긴 계절이다. 오늘은 빠른 페이스로 짧게 달려 보기로 했다. 6분 페이스로 늘 7-10킬로 사이를 뛰는 데, 오늘은 5분 페이스로 5킬로를 달렸다. 호흡이 턱 까지 찼다. 숨이 차는 데 공기는 차가워서 코가 막히니 더 힘들었다. 하지만 멈추지 말자고, 끝까지 달릴 수 있다고 나를 다독이며 결국 5킬로를 달려냈다. 어느새 추워서 움츠렸던 몸은 없고 머리카락 끝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문득 내가 달리기를 시작한 지 얼마나 되었는지 생각해 보았다. 마음의 힘듦을 극복하려고 헬스장에 가서 4월에 처음 러닝머신을 인터벌로 뛰었고 당시에는 러닝머신 속도를 7로 두고도 5분을 달리지 못했다. 그런 내가 지금 5분 페이스로 30분을 뛸 수 있다. 조금 천천히 달리면 10킬로쯤은 달리고도 힘들지 않다. 무엇이든 늘 쉽게 실증내고 싫은 것은 죽어도 못하는 불성실한 나지만, 그런 나에게도 장점이 있다면 좋아하는 것에는 늘 최선이고 꾸준하게 한다는 것이다. 벌써 달리기를 시작한 지도 9개월이 지나고 있다. 올해 가장 잘한 일이 있다면 요가와 달리기를 내 평생 함께 할 친구로 만들었다는 점이다.
올 연말에는 요가원에서 만난 또래 분들과 우리 집에서 작은 파티를 하기로 했다. 요가와 달리기를 시작하고 그렇게 좋아하던 술을 거의 하지 않게 되었다. 작년까지만 해도 습관적으로 퇴근 후에 맥주를 한두 캔 하거나 지인들을 만나면 늘 술을 마셨는데, 지금은 회식이나 특별한 일이 없으면 한 달에 한두 번 정도만 술을 마신다. 그것도 예전처럼 많이 마시지도 않고. 술을 마시는 일보다 달리는 것과 요가를 수련하면서 오는 기쁨이 더 크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술을 마시고 난 뒤에는 늘 몸이 무거워서 어떤 것도 제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는 평소에는 거의 술을 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술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보는 것이 부담스러워졌다. 친했던 사람들 중 술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저절로 멀어지게 되었고 요가원에서 만난 동생들과 친구와 부쩍 가까워졌다. 우연히 알게 된 나와 동갑인 J군과 어제는 함께 러닝을 했는데, 러닝을 마치고 커피를 마시러 이동하던 중 그 친구의 차에서 ‘니체와 불교’라는 책이 나와서 깜짝 놀랐다. 올해 불교철학에 관심이 많았던 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우연일까,라고 생각해 보면 우연이라고는 할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걸어온 길이 나의 족적을 만드니까. 그리고 그 족적을 보고 따라오는 누군가가 또 있기는 할 테니까. 이십 대엔 나는 언제나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라도 된 것만 같았다. 대학교를 다니면서도 늘 가방 안에 책을 네다섯 권씩 넣고 다니며 날이 좋을 때면 교정벤치에 누워 책을 읽었고 관심사가 맞지 않는 대학원 친구들과 다니는 것을 포기하고 수업이 시작하기 전에도 혼자 책을 읽었다. 나에게는 책만이 유일하게 나를 위로하고 이해해 주고 또 길을 알려주기도 하는 친구였던 것도 같다. 때로는 인간의 실존에 대해서 고민하고 인간 존재의 본성과 또 변하지 않는 사랑의 지고함에 대해서 파헤치는, 나만 이런 유난한 생각을 하면서 사는 걸까.라는 생각으로 힘들었던 때도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같은 관심사를 가진 친구도 요가원에서 만나는 이런 날도 생겼다. 삶은 당신을 언제나 보고 있다는 말이 이런 일들을 말하는 걸까. 때때로 찾아오는 무더운 여름날 속의 미풍처럼 그런 귀한 순간들이 언제나 나를 다시금 일으키고 내가 살아가는 방향이 맞다는 것을 안심시켜주곤 했다. 그러면 계속하기만 하면 되는구나, 하고서.
잘 되지 않는 일, 성과 없는 일에 열중했던 한 해였다고 여겨지면서도. 돌아보면 전부 남는 것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아사나를 잘하는 것보다 나를 믿고 또 언제나 사람들에게 다정하고 친절함을 잃지 않는 것이 수련의 더 큰 목적이라는 것을 아는 것, 그리고 누군가에게는 이해받지 못하더라도 조금 더 삶의 이유에 대해서 고민하고 또 사랑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는, 그런 깨달음들을 얻는 한 해였으니까. 가장 현실적인 애인이 사랑으로 낭만타령을 하는 것을 보기도 하는 기적 같은 순간도 보았고, 좋은 인연들이 내 곁으로 모여들고 있다는 기분 좋은 기운을 느끼는 일들도 많았다. 더 많이 울었지만 더 행복했고 많이 힘들었지만 더 큰 기쁨을 누렸다. 그렇다면, 2024년, 꽤 성공적인 한 해가 아닌가. 통각은 언제나 나를 탈피하게 하는 것이니, 앞으로도 잘 아파봐야지. 아프느라 즐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