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를 긍정하면서 사는 것보다 더 나은 미래를 상정하면서 살고 싶고,
지켜내는 것만 생각하는 것보다는 앞으로 지켜져야 할 것을 더 생각하고 싶다.
왜 지금에서야, ‘사랑’이 져가는지 많은 담론이 오고 간다. 나는 사람들이 왜 애써 시를 짓거나 사랑하는 사람에게 편지를 쓰거나 돌아오지 않는 대답을 위한 고백을 하지 않는지 생각해 본다. 촌스럽고 무용하다는 말들 아래 나의 진지함은 구시대적 발상이 되어버리고, 쓸쓸해진 방구석 시인들은 홀로 조용히 꿈과 낭만을 적은 노트를 베갯잇에 숨기고 살아간다.
그럼에도 불의, 쓰러져 가는 행인, 가난한 자와 상처받은 사람들의 최전방에 서 있게 되는 것은 언제나 그런 사람들이다. 무용하고 아름다운 것들을 좇는 ‘꿈’을 꾸는 사람들. 나는 그런 사람들의 ‘집단 지성’이 아닌 ‘집단 낭만’을 믿는다. 그리고 언제나 자력으로 일어날 수 없이 무너졌을 때 나를 구해내는 건 그런 낭만이다. 한여름의 모과향, 추운 계절에 어머니가 담가 주신 김치, 술 한잔을 기울이며 함께 울어주는 친구의 눈물, 계절이 추운데도 여전히 살아남은 단풍나무 한 그루 같은.
나는 혼자 있는 사람이 눈에 밟힌다. 그들의 생이 궁금하다. 누군가를 바라본다는 것은 애정이 시키는 일 아닐까. 어떤 사람이 물을 따르고 마시고 눈가의 주름이 늘어가고 걸어가다가 문득 노을을 한참 동안 바라보는 뒷모습을 보면서 그 사람의 사연이 듣고 싶은 것, 그런 것은 다 애정이 시키는 일이 아닐까. 애정은 내 속에서 또 다른 자아로 존재해 언제나 불쑥 나를 넘어서 나온다. 그럴 때면 심심하고 피로한 삶에도 영화 같은 장면들이 종종 생겨나 나도 내 삶 속에서는 주인공이 되기도 하는 것 같고.
나는 그런 것을 좋아하고 믿어서 겹겹이 층을 쌓는 사람이다. 올해는 ‘애써’라는 말을 참 많이도 썼다. 애써 사랑해 내고 애써 이야기를 듣고 애써 눈물을 참아도 또 흘려도 보는 한 해였다. 애쓴다는 말의 애가 사랑 애 愛자 인가라는 착각이 들 만큼, 누군가를 또 삶을 사랑하는 일은 애써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 일들이 많았다. 현실이 잘 현실로 굴러가기 위해서는 낭만이 때때로 미풍처럼 불어주어야 한다. 그래야 사람들은 자신의 생을 바람결에 흘려내고 적당한 곳에서 뿌리를 내려가게 되는 것 아닐까.
모든 것이 아름답고 의미롭다고 생각하면서 살면, 좋다. 얼마 전 요가 수련에서 들었던 노래에서 슬퍼도 행복해요.라는 가사가 나왔다. 선생님께서 슬퍼도 행복하다는 것은 모순이 아니냐는 말을 하셨는데, 아니요, 선생님 슬퍼도 행복할 수 있어요. 인간은 진흙 속에서도 꽃을 바라볼 줄 아는 존재거든요. 하고 생각했었다.
날을 세우고 살던 태도를 뒤로 하고 조금 더 친절하려고 노력하니 때때로 좋은 일들이 생기는 것 같다. 아니면 좋은 일이 생겼을 뿐인데 내가 의미부여를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순서가 어떠하든 간에 나는 그런 일들로 내가 사는 방법에 대한 확신을 얻고 또 나아갈 힘을 얻는다. 그래서 매일 바쁘지만 피로하지 않다. 시간은 넘쳐났지만 마음이 여유가 없어서 늘 힘들다고 늘 여유가 없어 피곤하다고 투정 부리던 때와는 확연히 나르다. 내가 내 인생의 주인으로서 나를 이끌고 간다는 느낌으로 살고 있다. 그러다 보니 지옥에서 사는 것 같은 마음이 져버린지도 또 알 수 없는 불안에 시달리며 불면의 밤을 보내던 때도 오래다. 나는 나로서 온전히 살아내고 있다.
연말이 얼마 남지 않았다. 몇 주뒤면 또 한 해가 바뀌겠지. 내일과 다음 달 그리고 내년에 기대가 된다. 또 많은 것들을 잘 품에 안아 들고 키워내는, 그런 헌신적인 태도로 내 삶을 살아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