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꽃이 피는 날 눈을 마주 보면서도 아무것도 보지 않았다 아무것도 보지 않았으므로 이별도 하지 않았다 슬픔은 푹푹 익어가는 한 여름의 닭죽 같아서 먹어 치워 버리기로 했다 어떤 미래에 이미 도착한 사람을 사랑했던 일이 있어서 눈물도 저장해 두었다가 나중에 흘릴 수 있다는 것을 알았고 저 멀리서 개 짖는 소리만 유일하게 들리는 것이 안식이 되는 날도 있었다
밤하늘의 별을 보지 않으려고 사는 사람들을 다 모아 홀딱 벗기고 싶어 나는 세상의 왕이야 파렴치한이 되어 볼까 내가 뻔뻔함을 자처하면 권력에 따라올 수밖에 없을 테니까 부끄러움도 법으로 잊으라고 말해야지 그런 세상을 만들어서 당신들을 유채꽃밭에 세워두고 꽃구경이나 하라고 명령해야지
어떤 날이든 내가 자는 나를 볼 수 있겠지만 보지 않기로 해 그건 괴로운 일이니 민낯을 보는 건 당신들의 열린 문이고 돌아설 수 없는 길이겠지 먹먹해지다가 다시 태어나는 일 그런 일은 없도록 하고
눈꽃 진 자리에 당신의 자해흔을 묻어봅니다 종종 일부러 나는 우는 척을 한 일도 있고 당신의 울음을 모르는 척을 한 일도 있습니다 태반이어서 세상은 돌아가겠지만 부디 막막한 사과를 받아봅시다 그건 아마도 누구나가 염원하는 긴 천국일 테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