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산가족 상봉기
아들찾아 떠난 가족의 서울 상경기
오랜만에 가족상봉 계획을 잡았다.
상봉이라 해봤자 기껏 서울에 있는 작은 아들 얼굴 한 번 보고 오는 것인데 왜 이렇게 스케줄 잡기가 어려운지...
자식들이 성년이 되고 보니 달랑 네 명인 가족이 함께 식사 한 번 하는 것도 일 년에 다섯 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로 요원한 일이 되어버렸다.
올해는 그마저도 조율이 싶지 않아 생각지도 못하고 있다가 때마침 남편의 퇴사가 우리가 계획한 마지노 선내에서 가까스로 마무리되는 바람에 용케 시간을 맞출 수 있었다.
이렇게 되고 보니 날짜를 따로 정하고 말고 가 없었다. 남편의 스케줄을 신경 쓸 필요가 없어지니 공부로 바쁜 공대생 큰아들의 시간에 전적으로 맞추면 끝날 일이었다.
맞벌이 부부였다면 타지에 사는 성년이 된 자식들과 얼굴 한 번 보는 것을 어디 언감생심 꿈이라도 꿀 수 있었을까?
어떻게 보면 자식 얼굴을 며칠이나마 마음 편하게 보기 위해
우리를 끈질기게 부여잡고 있던 끈을 하나 잘라냈는지도 모른다.
시간은 정해졌다. 큰아들 기말고사가 끝나는 6월 22일 수요일부터 계절학기가 시작되기 전 날인 6월 26일 일요일까지, 단 5일. 큰아들이 흔쾌히 자신의 휴일을 내어주었기에 우린 이것저것 잴 것도 없이 그 5일을 온전히 다 쓰기로 했다.
서울을 한 달음에 달려가기엔 너무 먼 여정이라 일단 우린 그 중간 지점인 군산에서 하룻밤을 쉬어가기로 했다.
가는 길에 진주에 있는 큰아들을 태우고 가는 것이 빠를 것 같아 우리 부부는 여행 당일 아침부터 서둘렀다.
앞으로 근 5일 동안은 바깥 음식으로 배를 채워야 할 텐데...
밥을 잘해 먹지 않는 큰아들이 안쓰러워 나는 진주에 도착하자마자 준비해온 재료들로 간단한 밥상을 차려 점심 한 끼를 해결하고 군산으로 차를 몰았다.
이전에 한 번 가려다가 멀어서 엄두를 못 냈던 곳, 군산.
그곳에서의 1박 2일은 선유도와 군산시내를 돌며 맘껏 먹고 즐긴 시간이었다. 평소 생활비를 최대한 아끼며 살고 있는 우리도 우리지만 빠듯한 용돈으로 하루하루를 잘 버텨내고 있는 아들도 이번만은 돈 걱정 없이 재충전하면서 먹고 싶은 것은 마음껏 먹게 해주고 싶었다.
내심 차후에라도 부모 만나는 것을 꺼리지 않게 하려는 우리 나름의 포석이 깔려있기도 했다.ㅎㅎ
다음날, 군산에서 점심으로 짬뽕을 먹고 2시가 넘어 서울로 출발했다. 어중간한 시간이어서 그런지 차가 막히는 바람에 2시간 예상 거리를 4시간 만에 도착했다.
거기다 목적지에 거의 다 와서 갑자기 앞을 볼 수 없을 정도로 심한 폭우가 쏟아지는 바람에 난감한 상황을 헤치며 겨우 도착한 서울의 숙소는, 아뿔싸, 두 명이 겨우 누울 수 있을 정도로 좁았다. 취사시설이 갖춰졌다길래 앱 상의 화면만 보고 덜컥 2박을 예약한 나의 불찰이었다.
각자의 생활로 바빠 거의 밖에서 식사를 해결하는 것이 늘 맘에 걸렸는데 오랜만에 4명이 모인 김에 숙소에서 한 두 끼라도 해 먹고, 이참에 작은 애 먹일 밑반찬도 좀 해줄 생각이었는데 계획이 틀어져 속도 좀 상했다.
둘째 녀석은 연일 입시 준비로 바빴다.
가족과 오롯이 하루를 보낼 수 있는 시간은 금요일 단 하룬데
그날도 오전부터 학원에 가서 6시가 넘어서야 귀가한다니...
그렇다고 부모 체면에 입시를 앞두고 있는 수험생에게 학원을 빼먹고 같이 놀자고 떼를 쓸 수도 없는 노릇이고...
어쩔 수 없이 금요일 저녁에라도 4명이서 오붓하게 외식이라도 하자고 차선책을 내놓았더니 이번엔 큰아들이 눈치를 보며 조심스레 딴지를 걸었다.
조금 전에 근처에 사는 군대 선임한테서 한 번 보자고 연락이 왔다고... 그것도 금요일 저녁시간에...
못 볼 땐 그리워도 막상 보고 나면 원수가 되는 현실 가족...
우리가 딱 그 짝이었다.
아들 둘을 키우면서 한두 번 겪은 일도 아니고 멀리까지 좋은 마음으로 와서 굳이 얼굴 붉힐 상황을 만들고 싶진 않았다.
최종적으로 아빠 생일이기도 한 토요일, 점심을 함께하는 걸로 하고 우리는 쿨한 부모인 척 깔끔하게 상황을 매듭지었다.
금요일인 다음날, 작은 애를 학원에 보내고 우리는 늦은 아침을 해 먹고는 대중교통을 이용해 경복궁이라도 한 번 둘러보기로 했다.
경복궁이 문을 닫는 저녁 6시까지 큰아들과 함께 있다가 지하철에서 각자 헤어진 우린 둘째의 세간살이라도 좀 채워줄 요량으로 근처 마트에서 한 보따리 장을 보고 작은 애 원룸으로 향했다.
저녁을 해먹이고 보니 어느새 파김치가 된 내가 안쓰러웠는지 남편과 막내가 설거지며 뒷정리를 했다.
우리의 숙소까지 걸어서 10분도 안 되는 거리, 밖에선 잠을 잘 자지 못해 피곤해진 나는 남편의 옷소매를 잡아끌며 숙소로 가서 쉬자고 재촉했다.
습도는 높았지만 제법 시원한 밤거리, 호텔까지 걸으면서 우린 자식에 대해 은근슬쩍 뒷담화를 했다.
정말이지 1도 보탬이 되지 않는 자식들을 왜 낳을까?
종족보존이니 국가에 충성이니 우스갯소리를 나누다가 나는 문득 자식을 낳아봐야 그때 비로소 어른이 된다는 옛말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렇게도 이기적이던 내가 때론 몸과 마음이 힘들면서까지
이렇게 아낌없이, 계산 없이 무한정으로 주고 싶어 하는 이 감정을 과연 자식이 없었다면 느낄 수 있었을까?
아무리 잘난 사람도 제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게 있다는 걸 깨닫게 하기 위해 보낸 게 자식이라는데...
그렇게 자꾸 내려놓는 연습을 하도록 하는 유일한 존재.
몸만 나이가 들었지 여전히 자기중심적 사고를 벗어나지 못하는 우리가 좀 더 성숙한 어른, 진정한 어른으로 거듭나는 법을 자식을 통해서 배우는 건 아닐까?
그러면서 생각했다.
우리 부모님도 힘드셨게구나... 많이 섭섭하셨겠구나...
딸이지만 결코 지금의 아들들에 뒤지지 않게 무심했던 나.
호텔에 다달을 때쯤 자식에서 시작한 담론이 어느새 나에게로 옮겨와 있었다.
다음날 남편의 생일은 간단한 케이크로 변죽만 울리고 둘째가 먹고 싶다던 소고기를 먹으러 갔다.
끝나는 데까지 채 한 시간도 걸리지 않은 가족 식사 시간.
목요일 힘들게 올라와 급하게 시킨 배달음식으로 때운 저녁식사 이후 4명이 함께한 두 번째이자 마지막 식사가 되어 버렸다.
이제껏 3박 4일의 모든 일정이 이 식사를 위해 존재한 것 같았지만 그런 것치곤 너무 짧은 시간이었다.
우린 식사를 끝내고 급하게 자리를 떴다.
어제 사다 놓은 식자재로 둘째가 먹을만한 반찬이라도 몇 가지 만들어 주고 가려면 시간이 빠듯했다.
부랴부랴 요리를 끝내니 오후 2시. 토요일이라 차가 막힐까 봐 커피 한 잔 마실 새도 없이, 마치 옆동네에 마실이라도 다녀올 것처럼 짧고 쿨한 작별인사를 나눴다.
큰아들이 나를 위한 배려랍시고 뒷좌석을 양보해 주어 덜컹거리는 차 안에서나마 잠시 몸이라도 누일 수 있었다.
이건 가족여행인지 오히려 돈을 써가며 노동을 하러 온 건지 분간이 안 갔다.
아 , 내리사랑이라고 했던가? 부모에게 받은 것을 이렇게 갚는구나 하며 너스레를 떨면서도 힘든 몸과 달리 마음은 왠지 뿌듯해지는 건 또 뭘까?
그래도 각자의 자리에서 씩씩하게 잘 살고 있는 것으로 됐다 싶었다.
추억이란 희미해질수록 좋은 기억만 남고, 그래서 시간이 지날수록 더 그리워지는지는 게 아닐까.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3박 4일의 가족 상봉이 한바탕의 꿈처럼 아련해져서 그런지 벌써부터 그 추억들이 그리워지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