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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현미 Mar 19. 2023

진정한 영웅의 성장 스토리 [일리아스]

트로이 전쟁 중 가장 핫한 50일간의 기록


일리온의 노래 [일리아스]

기원전 8세기, 맹인 시인으로 알려진 호메로스에 의해 쓰인 [일리아스]는 동일 작가의 [오디세이아]와 함께 현대 유럽 문학의 근간을 이루는 작품이다.

 영어식 표기로 [일리아드]라고도 하지만 그리스식으로 더 많이 통용되는 [일리아스]라는 제목은 그 당시 트로이의 또 다른 별칭인 일리온, 또는 일리오스에서 유래했기에  '일리온의 노래', '일리오스의 이야기'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우리가 흔히 트로이 전쟁을 다룬 서사시로 알고 있는 [일리아스]는 사실 전쟁의 처음과 끝, 전체를 다루고 있지는 않다. 서로 밀고 밀리는 지리멸렬한 전쟁이, 그  끝을 예상하지 못한 채 한 여름 엿가락 늘어지듯 늘어진 지 10년째 되던 해의 약 50일 동안에 일어났던 사건을 1만 5000행의 서사시 형태로 기록하고 있다.


아가멤논과의 불화로 아킬레우스, 전쟁을 보이콧하다.

샤를 앙투안 쿠아펠 <아킬레우스의 분노>

전쟁이 시작된 지 10년째 되는 어느 날, 오랜 전쟁으로 지친 병사들의 불평불만을 해결할 방법을 찾기 위해 소집된 그리스 진영의 회의 장소로 한 노인이 찾아온다. 그는 트로이 인근 도시인 크리세의 아폴론 신전 사제로, 얼마 전 그리스 군에게 침략을 당하면서 그의 외동딸 크리세스를 그리스 총사령관인 아가멤논에게 빼앗겼다.

 당시엔 타 도시나 국가를 점령하면 공을 세운 장군이나 영웅이 재물이나 여자등을 전리품으로 취할 수 있었는데 그때 아킬레우스는 아가멤논에 이어 브리세이스라는 여자를 전리품으로 얻은 바 있었다.


 아가멤논이 딸을 찾으러 온 사제를 모욕하며 돌려보내자 화가 난 아폴론 신이 퍼부은 저주로 그리스 진영엔 전염병이 돌게 된다. 아가멤논은 신의 분노를 잠재우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사제의 딸을 돌려보내면서 대신 아킬레우스의 브리세이스를 요구한다.

 어느새 브리세이스를 사랑하게 된 아킬레우스는 평소에도 아가멤논과 사이가 좋지 않은 데다 전장에서 혁혁한 공을 세우고 얻은 전리품을 뺏어가는 것을 큰 치욕으로 여겨 더 이상 전쟁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선언을 하고 만다.


절친 파트로클로스의 죽음으로 다시 전장에 선 아킬레우스

조지 도우  <파트로클로스의 죽음에 좌절하여 테티스의 위로를  거절하는 아킬레우스>

그때까지 올림포스의 여러 신들은 서로에 대한 질투와 사사로운 탐욕등으로 각각 그리스와 트로이 편에 서서 그때그때 전쟁에 개입하며 승패를 좌지우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킬레우스의 어머니 테티스의 부탁을 받은 제우스가 모든 신들의 전쟁 참여를 제지하고 나서자, 결국 전쟁의 양상은 아킬레우스의 바람대로 트로이에게 유리하게 돌아간다.


 전세가 그리스에 불리하게 돌아가자 아가멤논은 많은 재물과 함께 브리세이스를 돌려보내며 화해를 청하지만 분노를 삭이지 못한 아킬레우스는 고집을 꺾지 않는다.

이러한 아킬레우스를 대신해 그의 절친인 파트로클로스가 아킬레우스의 갑옷과 전차를 빌려 대리 출전을 하게 되고

진짜 아킬레우스로 착각한 트로이 병사들이 두려움을 느끼며 앞다투어 퇴각하면서 수세에 몰렸던 그리스는 겨우 전세를 회복한다. 그러나 승리에 들뜬 나머지 평정심을 잃은 파트로클로스는 무리해서 적진 깊숙이 들어가는 바람에 그만 트로이의 명장 헥토르에게 목숨을 고 만다. 


 친구의 부고를 들은 아킬레우스는 비통해하며 헥토르에 대한 분노로 아가멤논과의 불화를 종식시키마침내 출전을 결심하게 된다. 친구의 원수를 갚을 때까지 먹지도 자지도 않으면서 적군을 궤멸시키던 아킬레우스는 마침내 헥토르의 목숨을 빼앗게 되고 그것으로도 성에 차지 않았는지 헥토르의 시신을 전차에 매달아 파트로클로스의 무덤을 몇 차례나 돌며 시신을 훼손시킨다.


프리아모스왕의 부성애에 감동받은 아킬레우스

알렉산드르 이바노프  <아킬레우스에게 헥토르의 시신을 돌려달라고 애원하는 프리아모스>

 한편, 사랑하는 아들 헥토르의 죽음으로 실의에 빠진 트로이의 왕 프리아모스는 아들의 시체라도 건네받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적진인 그리스진영을 찾는다. 늙은 왕은 아들을 죽인 원수인 아킬레우스 앞에서 자식을 잃은 아비의 고통을 절절이 토로하며 서슴없이 무릎을 꿇고 읍소한다. 프리아모스왕에게서 자신의 아버지 펠레우스를 떠올리던 아킬레우스는 그의 간청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헥토르의 장례가 치러지는 동안에는 전쟁을 하지 않겠다며 휴전을 선포하기까지 한다.


모든 트로이인들의 사랑과 존경을 한 몸에 받았던 헥토르의 장례가 11일 동안 성대하게 치러지며 [일리아스]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아킬레우스, 진정한 인간영웅으로 거듭나다.

프란츠 폰 마치 <아킬레우스의 승리>

 [일리아스]는 책 분량방대함을 너머 그 속에 등장하는 신과 영웅을 포함한 수많은 인물들과 그들 하나하나가 보여주는 다양한 인간 군상 형들로 이후 이어지는 유럽 문학에 큰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이쯤에서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호메로스는 10년이라는 그 기나긴 전쟁 기간 중에서 왜 하필 짧디 짧은 한 순간에 불과한 그 50일 남짓을 떼어내어 이렇듯 웅장한 서사시로 엮었을까?


 그 답은 주인공이기도 한 아킬레우스에게서 찾을 수 있었다.  이전 글에서 불화의 여신 에리스를 초청하지 않아 이 전쟁의 빌미를 제공한 테티스와 펠레우스의 결혼식을 언급했었다. 여신과 인간의 결합으로 태어난 영웅 아킬레우스는 어머니 테티스에 의해 스틱스강에 담가짐으로써 어느 정도 불사의 힘까지 얻은, 가히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용맹스러운 영웅으로 성장한다. 하지만 그에겐 세상 모든 사람이 알고 있는 약점이 하나 있었다. 발꿈치가 강에 담가지지 않음으로써 생긴 신체의 치명적인 약점과 더불어 성격적으로도 아직 완벽하지 못했으니... 오만하고 고집스러워  다른 이들을 곤경에 처하게 만드는 다소 까칠한 면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한 아킬레우스가 사랑하는 친구의 죽음을 겪고, 아들의 죽음에 비통해하는 프리아모스왕의 모습을 보면서 심경의 변화를 일으키게 되고... 마침내 그는 불완전한 인간에서  진정한 영웅으로 거듭나게 된다. 

 호메로스는 이 지점에 주목한 듯하다. 인간적인 고통을 겪으며 진정한 영웅으로 거듭나는 성장 스토리를 좀 더  극적으로 만들고, 마음의 변화를 이끌어내기에 앞서 그의 단점을 좀 더 부각하는 데 있어서 '아가멤논과의 불화'는 아주 적절한 갈등 장치가 아니었을까?


신들보다 훨씬 더 인간다운...

루벤스 <아킬레우스의 죽음>

 [일리아스]읽다 보면 서로의 이권다툼을 위한 인간들 간의 전쟁 같아 보이지만 그 배후에는 또 다른 치열한 전쟁이 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들 역시 편을 짜서 수시로 끼어들어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는 신들의 모습이 바로 그것이다.

'어차피 죽을 운명인 인간들'이라고 끝없이 외치면서 어쩌면 그들보다 더 열심히 전쟁에 임하는 신들의 모습은 초능력을 행사하는 것 외에 인간들보다 딱히 나아 보이는 건 없었다.


 이미 운명 지어진 자신의 삶을 인식하면서도 그에 굴하지 않고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 싸우는 인간들... 하지만  패했을  자신의 운명을 스스럼없이 받아들이며 편안하게 눈을 감는 인간들의 모습에서 시인은 위대한 무엇인가를 본 듯하다. 어쩌면 호메로스는 인간이 진정한 인간다운 모습을 발현했을 때 신보다 훨씬 더 인간다워 보인다는 지극히 당연한 진리를 위대한 인간승리로 구현해 보고 싶었던 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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