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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현미 Oct 08. 2023

잃어버린 명절의 시간을 찾아서...

다시 설레는 명절로...


 매번 명절 제사를 없애겠노라고 나 자신과 주변 사람들에게 으름장을 놓긴 했지만 막상 실천에 옮기기까지는 요원한 일이었다.

 거대 담론엔 항상 목소리를 높였지만 얼마나 많은 시간을 인고해야 할지 사실, 나 자신조차 쉽게 예측할 수 없었다.

그 누구도 섣불리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지 못한 채 주저하는 사이, 엉켜진 실타래는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풀렸.



 

 남편과 함께 전혀 낯 선 곳에 터를 잡아 학원을 오픈하기까지 두 달 남짓, 앞뒤 잴 것 없이 일에 매진하느라 어느새 몸과 마음이 지쳤는지 난 덜컥 장염에 걸리고 말았다. 그동안 일이 바빠 찾아뵙지 못한 친정 엄마를 부랴부랴 만나고 온 직후였다.


 앞으로 더 바빠져 찾아올 날을 기약할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요양원에 계신 엄마는 외출하는 김에 그동안 마음먹었던 일을 다 처리하고 들어갈 요량이셨는지 하루종일  딸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다. 

 염색과 파마, 장보기까지... 급기야 피곤한 몸에 점심 식사 후 짧은 간격으로 먹은 저녁이 사달이 났는지 그날 저녁부터 설사와 구토로 곤욕을 치러야 했다.

 

 다음날은 일요일이라 병원에도 가지 못하고 아픈 배를 부여잡고 식음을 전폐한 채 하루종일 누워있었다.

몸이 아프면 마음 또한 약해지는 법, 건강한 신체에 건전한 마음이 깃든다는 말이 괜히 생긴 게 아니었다.

난 의지대로 안 되는 몸상태 때문인지 하루종일 앞  일이 막막하게 느껴지고 우울감이 더해갔다.


 그동안 바쁜 일정을 소화하느라 몸까지 챙길 여유가 없기도 했거니와 이제 막 벌여놓은 모든 일의  향방이 막상 내 손에 쥐어졌다  생각하자 날이 갈수록 가중되는 중압감에

하루하루가 살얼음 위를 내딛는 듯 조심스럽고 가슴 졸였다.


 집에 있던 상비약 중 겨우 찾은 지사제로 버티며 하루종일 잠을 청했더니 그래도 저녁 즈음엔 복통도 좀 나아지고 입맛도 돌았다.

남편이 해 준 미음을 한 술 뜨며 몸과 마음을 추스르려 애를 썼지만 몸이 회복하지 않는 한, 마음 또한 갈피를 잡기 쉽지 않았다.


 

 다음 날 일찍 병원을 찾아 주사도 맞고 약도 지어먹으며  몸회복에 집중했다. 그러고 보니 추석도 2주 남짓 남겨두고 있는 시점이었다.

 이제 막 인테리어가 끝난 학원 정비에 치중하느라 집은 완전 엉망이었다. 집에 있는 물건을 학원으로 옮기기도 하고 필요 없는 물건은 방 한구석에 쌓아 두는 것은 물론, 만들다 만 홍보물 더미들로 가득한 집은 단기간에 손을 쓸 수도 없을뿐더러 나에겐 손가락 하나 까닥할 여력도 남아 있지 않았다.

 2~3일 미음으로 연명하고 있던 나는 이 상태로는 이번 추석을 낼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남편에게  몇 번 푸념 삼아 얘길 해봤지만 장남의 고집스러움을 꺾기엔 다소 무리가 있었다.


 난 어쩔 수 없이 비장의 카드를 꺼냈다. 남편 몰래 시동생에게 전화를 건 것이다. 시동생과는 평소에 말이 좀 통하는 편이라  내 마음과 현재 상태를 허심탄화하게 털어놓았다.

 몸과 마음이 너무 지쳐있는 상태라 추석을 준비하고 차례상을 차릴 엄두가 안 난다고. 미안하지만 이번 추석은 당일 모님 묘소에만나 차례를 지내고 근처 식당에서  사를 하자고.

 시동생도 늦은 나이에 힘들게 일을 시작하는 우리의 입장을 알기에 충분히 배려해 주었고 형에게 직접 전화까지 해줘서  모종의 합의를 이끌어 낼 수 있었다.

 제사 음식 준비를 하지 않는 명절이라... 실로 25년 만의 기적이 아닌가 싶었다.



 

 명절 연휴 전 날까지 일을 하고 산소에 가져갈 과일과 음식을 사려고 부랴부랴 시장에 들렀다.

명절 대목으로 넘쳐나는 음식과 사람들...

지금까진 그 무리 속에 섞여있었기에 생각이 없었는데 이번엔 너무나 낯 선 풍경들이었다.

분주히 움직이는 사람들 틈에서 어색해진 나는 필요한 음식들과 저녁으로 때울 간단한 요깃거리를 산 후 집으로 발길을 옮겼다.


 문득 그동안 지난했던 나의 명절 나기가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생업에 종사하는 입장에선 쉽게 누릴 수 없는 모처럼의 연휴가 나에겐 더 높은 강도의 노동으로 다가왔던 나날들..

정신노동을 더하자면 그 보다 훨씬 긴 세월이었음을 말해 무엇하겠는가? 마치 잃어버린 25년의 회한이 한꺼번에 밀려와 억울한 심정이 들기도 했지만 나는 이내 마음을 고쳐먹기로 했다.

 

 이미 과거로 흘러간 시간들... 그러한 날들이 있었기에 앞으로 맞이할 명절의 여유는 더 값질 거라고... 이제야 비로소 명절을 손꼽아 기다리는 어린아이의 마음으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에 살짝 설레기도 했다.




 하지만 서두르지 않기로 했다. 내가 넘어야 할 몇 개의 산이 아직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 산 너머 있는 희망을 현실로 쟁취하기 위해선 나 자신이나 내 주위의 사람들에게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너무 늦진 않으리라.

그것을 누릴 수 있는 나의 시간 또한 알 수 없으므로 너무 늦게 닿지는 않으리라.

번잡한 군중으로 가득 찬 시장을 벗어나며 장바구니를 쥔 나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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