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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현미 Aug 13. 2022

사오십대, 가치를 논하다.

중년의 흔들리는 가치관

 

 지난주 일요일, 전주에 는 시누이 집을 문했다. 

위로 아들 둘(남편, 시동생) 막내딸로 이루어진 시댁 식구들과는 코로나가 터지기 전까진 최소한 1년에 한 번, 1박 2일로 정기모임을 가졌었다.

이번 모임은 코로나 제한이 풀리고 마침 도래한 아이들 방학도 겸해서, 시동생이 얼굴 한 번 보자며 시누이의 집들이를 빙자해 급하게 조율한 자리였다.

나 못지않게 장남에게 시집가 맞벌이에, 남의 집 맏며느리 노릇까지 하느라  명절 때도 볼 수 없었던 시누이 가족을 다시 보게 된 건 실로 5년 만의 일이었다.



 

 시어머니가 살아계실 때는 그래도 명절이면 한 번씩 얼굴을 보곤 했는데 어른들이 돌아가시고 나서는 명절 때 제 식구 건사하기도 힘들뿐더러 사는 동네까지 멀어지다 보니 특별히 따로 시간을 내지 않고는 얼굴 보기가 여의치 않았다.

시댁 삼 남매는 같은 부모 하에서 태어났다기엔 성격이 사뭇 달랐지만 우애는 있는 편이어서 바쁜 와중에도 시간을 조정해 각자의 가족을 대동한 채 서로 간의 안부를 확인하는 만남매년 가졌었는데 그마저도 코로나로 소원한 상태였다.


우리는, 코앞에 닥친 수시 일정 때문에 서울에서 재수하는 작은 애는 대동하지 못하고 다행히 시간이 난다는, 진주에 있는  큰애를 태우고 전주로 향했다.


 새 아파트로 이사한 지 벌써 3년째라는 시누이는 우리를 아주 격하게 환영했어느새 군대까지 마치고 어엿한 성인이 되어 나타난, 자신의 첫 조카 이기도 한 큰애를 보자마자 반가움에 울먹이기까지 했다.

곧이어 도착한 시동생네 식구들과 포옹을 나누며,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고 서로를 향해 덕담을 주고받긴 했지만 이미 부모 키를 훌쩍 넘어버린 조카들을 보면서 세월의 흔적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과를 하며 그동안의 일상적인 안부를 묻던 여느 가족의 평범한 대화가, 가까운 당에서 저녁을 해결하고 다시 모인 자리에선 어느새 부부간의 문제로 옮겨와 있었다.

이제 모두가 40대 중 후반에서 50을 넘어선 나이이르고 보니, 저마다 부부간의 소통에 있어서 나름의 문제들을 고 있었다.


 결혼 후 너무 다른 성장환경과 성격 때문에 힘들었다는 시누이 부부에서부터, 주고받는 대화에 항상 날이 서있어 서로 상처를 받고 있다는 시동생 부부, 추구하는 가치가 너무 달라 합의점을 찾기가 어려운 우리 부부에 이르기까지 소소한 일상을 나누던 자리는 어느새 부부 문제의 성토장이 되었다.


 결혼초 몹시 힘들어하던 시누이는 세월이 가르쳐준 지혜와 함께 마음을 고쳐먹고는, 비록 자신이 낳진 않았지만 아들 하나 더 키운다(?)는 생각으로 그때 그때 자신의 감정을 차분히 이해시키마음공유하고자 애쓴 결과, 20년쯤 지난 지금은 그런대로 남편과 교감하 산다며  다소 편안해진 얼굴로 이야기했다.

되려 아직도 부인 말에 뾰족하게 대처한다는 시동생을 나무라며 무조건 언니 말에 공감하고 위해주라고 마치 누나 인양 제법 엄하게 꾸짖기도 했다.

나이와 함께 남성호르몬이 증가한 탓인지 우리 여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남편들을 하나씩 재판대 위에 세우며 다그치기에 바빴고, 남자들은 그동안의 세월을 알기에 허허거리며 때론 장단을 맞추기까지 하니, 다소 예민한 주제에도 불구하고 분위기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



 

 한땐 수줍음 많은 새댁이었던 우린, 어느새 세계시장 어디에 내놓아도 전혀 꿀리지 않는, 그 유명하다는 대한민국의 용감한 아줌마들이 되어있었다.

부침 많은 세상에서 바깥일밖에 모르던 남편을 대신해 경제 활동과 함께 내 가족을 지켜내느라 강해질 수밖에 없었던 그 시절, 가족 건사하느라 한껏 뜨거워진 몸 위로 내리 꽂히는 세상 풍파라는 망치를 견디며 우린 그렇게 여성에만 머무르지 못하고 엄마라는 강철로 단련되어왔다.


 4,50대는 낀세대라 했던가?

부모를 부양하되 부양받지 못하는 마지막 세대.

부모 세대 관습으로 부모를 모시되 우리와는 너무 다른 자녀세대 방식을 인정하며 살아가야 하는 첫 세대.


 특히 여성들의 경우, 몸은 기존의 가부장제 문화 속에서 자라고 교육받았지만  머리와 가슴은 양성평등지향하기에, 자신이 놓인 환경이 무엇인가 불합리하고 억울하다는 생각에 항상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었 종래는 그 화살이 남편을 향한다는 것을 이 나이가 되어서야 어렴풋이 인지할 수 있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우리 시대의 남자들 또한 시대 산물의 피해자였다.

가부장제 하 부모에게서 남아선호 사상으로 귀하게 키워졌지만 이제 더 이상 그런 가치를 따르지 않는 부인과 자식들... 몸에 밴 그 가치를 고수하자니 가족들로부터 소외되고, 그렇다고 따르자니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고..

어떻게 처신하든 그저 눈 가리고 아웅 한다고 비난받기 일쑤이니 남자들 또한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래서인 우리 세대의 부부 문제는 그렇게 단순하지가 다.

남녀 성역할 문제뿐만 아니라 과거의 관습에서 비롯해 현재 너무 한쪽으로 치우친 역할분담과 부모 봉양 문제, 그리고 미래 자신들의 노후 문제와 자녀 세대와의 가치관 충돌 문제 등 급변하는 다양한 가치관의 혼란 속에서 그 양상이 훨씬 더 복잡해질 수밖에 없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생각했다.

그날 우리가 나누었던 담론에 대한 나름의 해결책은 그저 괴로운 현실을 무마하고자 하는 미봉책에 지나지 않았음을.

현재의 우리 문제를 너머 자녀세대와 소통하기 위해선 더 철저한 현실인식과 고민이 필요할 터, 그것은  아마 우리 세대의 몫일 것이다.


 문득 현인으로 통하는 어느 스님의 말씀떠올랐다.

낀 세대라서 괴로워할 일이 아니고  오히려  둘 다를 경험할 수 있어서 좋은 일이 아닌가?


우리 부모와 자식 세대, 둘 사이의 첨예한 문화적 간극을 조율할 방법 또한 우리 세대에서 비롯될 것임을 안다.

스님 말씀처럼 좋든 싫든 우린 둘 중 하나를 이미 겪었고, 앞으로 나머지 하나도 겪을, 억세게 운 좋은 세대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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