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기 입도 삐뚤어진다는 '처서'를 하루 앞두고조석으로 확연히 달라진기온에슬슬 몸이 먼저 반응을 해온 까닭이다.
올 3월,시작은 소소한 동네 한 바퀴부터였다.일전에 나의 상태도 헤아리지 않고욕심을부렸다가 그만 허리병이 도져 고생한 이후론 서두르지 않았다.
하루하루, 천천히 거리를 늘여갔다. 그렇게 2달 정도 워밍업을 한 후 본격적으로 만보에도전한 건 신록이 푸르른 5월이 다되어서였다.
건강 때문에 시작한 운동이었지만, 걷기를 하면서 난 편안하고 안락한 실내에서는결코 느낄 수 없었던 다양한체험을 할 수 있었다.
우선,계절을 온몸으로느꼈다.
사방이 막힌 공간에서 피부에 와닿는 온도로 그저 춥다, 덥다 라는 식의 짤막한 몇 마디로, 기껏 덧붙여봤자 '덜' '조금'이라는 부사몇 개로 계절의 변화를인지하는 게 전부였던 내가 한발 한발 땅을 내디디며두 눈으로 지켜본 자연은 확연히 달랐다.
자신이 갖고 있는 모든 것을 한껏 드러내며온 몸으로 계절을 맞이했고, 남의 눈치 보지 않고 저마다 자신이 좋아하는 계절에 마음껏 구애하는 걸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한두 달 상간으로 바뀌는 계절의 추이에 맞춰 그렇게 많은 꽃과 나무들이 일제히 화려한 변신으로 그 흐름에 따라나서는현장을직접 목격한다는 건 놀라움을 너머 하나의 경이로움으로다가왔다.
그리고 걷기를 시작하면서 깨달은 또 한 가지는,다소 늦은 감이 있지만 내가 사는 곳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비로소 알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하루에 만보정도 걸으려면 적어도 6~7km, 약 2시간 정도 소요되는거리가 필요하다. 걷기에 활력을 더하기 위해 매일 새로운 코스를 둘러보기로 작정한 나는 집 주변, 때로는 내가 사는 도시를 샅샅이 뒤져야 했다.
스마트폰으로만보 거리에 있는 목표물을 정하고 산책하듯 유유히 걷노라면 차를 타고 갈 때 오직 목적지만을 향하던 나의 협소한감각이, 여태껏 생략했던 그 사이 여백을 향해 활짝 열리고,그동안 익숙해서 몰랐던 거리 자체의 아름다움은 물론 그 위의 가로수, 조형물 하나하나에까지 애정이 생기면서 내가 적을 두고 있는 이 도시가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가 없다.
20년이상을 친구로 지낸 이와 뒤늦게사랑에 빠지는 경우가 이와 흡사하지 않을까? 이제야 비로소 그 진가를 알아본 것이다.
누가 뭐래도 만보 걷기의 최대 장점은 단연코함께 걷는 이와의 격의 없는소통이다.
일상의 자잘한 일들로 다툼이 잦은 날, 억지로라도 남편과 함께 걷기에 나서면,우리를 둘러싼 싱그러운 자연과 발끝에서 올라오는 에너지의 기운이 어느새 아집이란 갑옷으로 방어막을 친나를 무장해제시켜버린다. 그동안 숨이 막힐 것같이 옥죄어 오던 갑갑함이 사라지면서 본래 좁았던 본새가 갑자기 너그러워지기라도 한 것처럼 잔뜩 날이 선 마음이저절로 풀리는 신비한 경험을 하게 된다.
마치 수백, 수천 년을 버텨온 산과 나무들이채 100년도 살지 못하는 숱한 인간들의 옹졸함을꾸짖는 것 같다. 한낱 찰나를 살면서도그깟 사소한일이 너희의 아까운 시간과 에너지를 소진시킬 정도로 그렇게 가치 있는 일이냐고...
때론 남편이 아닌 가까운 지인과 발길닿는 대로 걷다 보면 그 길은 어느새인생의 해우소가 된다.
여태껏 살아온 이야기, 아직도 나를 붙잡고 놓지 않는 딜레마와 앞으로 펼쳐질 미래에 대한 생각들을 서로주고받노라면그 길은 말 그대로 노상 토론장을 방불케하기도 한다.
어느덧 만보의 끝에 다다르면 한 뼘쯤은 달라진 각자의 모습으로 길동무에게 아쉬운 작별을 나누고 설레는 다음 여정을 기약하기도 한다.
만보를 걷는다는 건, 이젠 나에게 육체적 건강을 회복하는 의미를 너머 끊임없이 타인과 나를 돌아보며 더 나은 인생을 향해 나아가는 것에 다름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