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용하고 있는 만보 걷기 앱에서 주최하는 이벤트 중 하나로, 자기 고장의 명소를 찾아가 인증을 하면 소정의 캐시로 보상해주는 프로그램에 재미 삼아 참여 중이었는데 오늘은 진해의 명소인 진해루와 해양공원, 이 두 군데를 돌아보기로 한 참이었다.
간 김에 진해 칼국수 맛집에서 점심을 해결하고 평소 자주 찾곤 하는, 첫 번째 목적지이기도 한 진해루에 도착해서 인증을 했다. 그런데 연이어서 해양공원으로 가기엔 날씨가 너무 더웠다. 마치 이방인의 뫼르소처럼 무슨 일을 저지를지 알 수 없을 정도로초가을 햇살치곤 너무 눈이부셨다.
다음 목적지 부근에서 잠시 태양을 피할 수 있는 장소를 검색하던 중 우연히 카페 '더 삼포'를 찾게 되었다
카페 '더 삼포'
해양공원 근처는 바닷가다 보니 군데군데 경치를 감상할 수 있는 화려한 카페들이 많았다. 카페 '더 삼포'는 진해 끝자락에 간신히 매달려 있는 듯 중심에서 한참 떨어진 한적한 외곽에 자리 잡고 있었다.
카페를 들어서기 전까진 사실 친근하면서도 왠지 촌스럽기도 한 그 이름을 아무 연고도 없이 그저 유명 노래나 소설에서 차용한 줄 알았다.
밖이 훤히 내다 보이는 창을 마주하고 앉아 고즈넉한 풍경을 바라보고 있자니 마치 시간여행을 떠나온 듯 너무나 작고 한적한 시골 어촌 마을이 한눈에 들어왔다.
호기심에 검색을 해보니 그 마을명이 '삼포'란다. 이름은 익숙했지만 실제 존재한다고 생각조차 하지 않아서인지 그 위치를 궁금해 본 적도 없었던 그 마을이 떡하니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화려한 도시에서 카페 '더 삼포'라는 문을 통과해 과거의 어느 시점으로 타임리프 한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비현실적인 느낌의 작고 소박한 어촌마을이었다.
삼포마을은 여행하다 우연히 들른 이가 고즈넉한 분위기에 반해 만들었다는 80년대 히트곡 '삼포 가는 길'의 배경지이기도 하다. 이를 예부터 내려오는 가보처럼 기념하려는 듯 마을 인근엔나름 세련된 노래비도 있었다.
하지만 나에게 '삼포'라는 이름이 더 친숙하게 느껴진 건 아무래도 황석영의 동명 소설, '삼포 가는 길' 때문이었을것이다.
카페에서 바라본 삼포마을
소설 ' 삼포 가는 길 '은1970년대, 급격히 진행된 산업화에서소외당한 채 떠돌이 건설 노동자 신세가 된 '영달'이라는 인물과 감옥에서 출소한 뒤 그 또한 뜨내기 노동자였지만 그 생활을 청산하고 그의 고향 삼포로 돌아가려는 정씨, 그리고 군부대 술집 작부로 일하다 도망친 백화, 이렇게 근대화 과정에서 삶의 근거지를 잃고 떠도는 세 인물 군상들의 잠깐 동안의 동행기를 담은 소설이다.
겨울이 닥치면서 일하던 공사판의 일도 끊겨 밥값마저 치르지 못하고 줄행랑을 쳐야 했던 영달은 뚜렷한 목적지 없이 일이 있을 만한 바다 근처로 가려던 중이었고 소위 큰집(?)에서 배운 기술로 연명하다 이제는 지쳤는지 10년 전 떠나온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정씨에게 '삼포'란 '비옥한 땅이 남아돌고 고기도 얼마든지 잡을 수 있는' 그런 풍요의 땅이었다. 가는 길에 우연히 마주쳐 동행에 합류한 창녀 백화의 사정은 또 어떤가? 열여덟에 가출해서 이제 갓 스물이 넘은 그녀의 발걸음 또한 고향을 향하고 있었다. 하지만 왠지 그녀 앞의 삶도 그리 녹록지만은 않을 것 같다. 그녀의 과거를 둘러싼 주변의 따가운 시선과 그 많은 동생들의 뒷바라지가 눈앞에 그려지는 건 나만의 노파심 때문일까?
카페에서 바라본 삼포항
그 시절, 가난한 사람들도 잘 살게 해 준다는 근대화 과정에서조차 소외된 계층들은 삶의 터전에서 쫓겨난 채 이 소설에서처럼 공사현장을 전전하는 뜨내기 건설 노동자나 창녀로 전락했다.
하지만 그 어디서도 제 한 몸 쉴 곳은 없었기에 그들은 또다시 초라한 짐을 꾸리며 부표 같은 생활을 지속할 뿐이다.
떠돌이 생활을 청산하고자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이에게도 삶은 그리 만만찮음을 마지막 장면의 정씨의 경우에서 엿볼 수 있었다. 한창 개발 중에 있다는 고향 근황을 접한 정 씨에게 삼포는 더 이상 그가 생각했던 풍요로운 곳이 아니었다.
아니, 어쩌면 '삼포'는 작가의 의도대로 애초에 이 세상에 실재하지 않는 정씨의 머릿속에서만 존재하는 가상의 장소였는지도 모른다.
치열했던 작가의 삶의 궤적에서 모티브를 얻은 이 소설은70년대를 배경으로 한 그의 다른 소설들과 더불어 그 당시 우리네 모습들을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마지막에 헤어지면서 영달이 꼬깃꼬깃 쟁여놓은 노잣돈을 백화에게 내미는 장면이나 백화가 이제껏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자신의 본명을 더듬거리며 내뱉는 장면에선 볼품없고 초라하게만 여겨졌던 그들의 모습에서뭉클한 감동과 함께 숭고함마저 느껴졌다.
힘든 삶의 여정 속에서 그 짧은 동행의 순간에서조차 자신의 마지막 가진 것을 내어주며 서로를 향한 측은지심의 끈을 놓지 않았던 영달, 정 씨, 백화...
점점 산업화, 물질화로 치닫는 암울한 세상을 통렬하게 비판했던 작가였지만 그 또한 정작 세상을 보는 따뜻한 시선만은 거두지 않았던 것 같다. 작가가 그들의 모습 속에 은근슬쩍 숨겨놓은 작은 희망의 씨앗을 설핏 눈치챈 까닭이다.
비록 소설 속 공간 '삼포'는 실존하지 않는 곳이지만 카페
'더 삼포'에서 바라본 삼포마을은 마치 그 시대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한 듯 무척 정겨워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