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마지막 기차역'
한동안 열을 올리다 지금은 소원해진 블로그에서, 생각나면 한 번씩 찾아가서 읽곤 하는 이웃 블로거님의 글을 통해 알게 된 소설이다.
세월 탓인지, 계절 탓인지 요즘 들어 부쩍 무미건조한 이론서 류의 글에 집중하지 못하고 늘 같은 페이지 언저리를 헤매는 나, 잠시 나를 잊고 깊어가는 가을의 틈 사이로 왠지 좀 빠져들고 싶은 기분에 선택한 책이기도 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목적은 달성했다.
읽기 시작한 후로 단숨에 빨려 들어가 거의 하루 만에 독파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 못지않게 먹먹한 여운과 더불어 나와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관계에 대해 뭔가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기도 한 책이었다.
배경은 일본의 가마쿠라시, 어느 날 일본 도힌 철도회사의 가마쿠라 상행 열차가 맹렬한 속도로 궤도를 이탈해 근처 신사의 기둥을 스치며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 사고가 발생한다. 승객 127명 중 68명이 사망하는 대형사고였다.
소설은 이 사고로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네 사람의 이야기를 각각의 에피소드로 엮은 옴니버스 형식을 취하고 있다.
약혼자를 가슴에 묻은 여자.
아버지를 떠나보낸 아들.
짝사랑하는 여학생을 잃은 한 소년.
그리고 이 사고의 피의자로 지목된 기관사의 아내.
그런데 사고 발생 두 달 후, 사고를 수습하는 동안 기차가 다니지 않는 가마쿠라선 선로 위로 심야의 유령 열차가 달린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한다. 우연히 이 소문을 접한 네 명의 주인공들은 각자 한 밤중에 역을 찾게 되고 그들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탑승한, 사고가 나기 전의 열차에 오르게 된다.
하지만 그 열차에 승차하려면 반드시 지켜야 하는 네 가지 규칙이 있었는데 차장 역할을 하는 '유키오'라는 여고생 모습을 한 유령이 그 규칙을 매 스토리마다 상기시킨다.
하나, 죽은 피해자가 승차했던 역에서만 열차를 탈 수 있다.
둘, 피해자에게 곧 죽는다는 사실을 알려서는 안 된다.
셋, 열차가 사고 현장에서 가장 가까운 니시유이가하마 역을 통과하기 전에 어딘가 다른 역에서 내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도 사고를 당해 죽는다.
넷, 죽은 사람을 만나더라도 현실은 무엇 하나 달라지지 않는다. 아무리 애를 써도 죽은 사람은 다시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 만일 열차가 탈선하기 전에 피해자를 하차시키려고 한다면 원래 현실로 돌아올 것이다.
소설은 서두에서 위의 사항을 명시하고 이어서 각자 주인공의 스토리 속으로 독자를 안내한다.
각 에피소드에선 사고를 당한 사람과 주인공과의 관계를 알 수 있는 이야기들이 사고 전과 후를 기점으로 순차적으로 전개되다가 주인공들이 유령 열차에 탑승하면서부터는 그들의 안타까운 상황과 맞물리면서 이야기의 긴장감은 최고조에 달한다. 각각의 등장인물들은 그 사건을 겪으면서 그리고 그 이후 변화된 삶 속에서 서로 씨줄과 날줄처럼 엮여 이야기 속에서 만나기도 한다.
서로의 아픔과 상처를 보듬으며 세월과 함께 영글어진 사랑, 가족이란 미명 하에 서로에 대한 이해 없이 오해만 쌓인 관계 등, 사고소식을 접한 당사자들은 자신이 처한 여러 가지 상황과 제한된 탑승 조건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유령 열차에 몸을 싣는다.
시간을 되돌릴 수도, 생명을 구할 수도 없는데 주인공들은 왜 기차를 타지?
소설에 관한 이 이야기를 전했을 때 한 지인이 반문했었다. 극히 수동적인 규칙을 듣고서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무력해하고 때론 절망하던 그들이 유령 열차에 탑승한 궁극적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지인의 질문을 듣고서야 그들은 채 1시간도 안 되는 짧은 시간 동안 각자의 방식으로 사랑하는 이와의 힘겨운 이별의식을 치렀음을 비로소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의식이 힘들었던 만큼 살아남은 자들이 나머지 인생을 지탱하며 살아갈 수 있는 큰 원동력이 되었음은 두 말할 나위가 없었다.
이 책을 쓴 무라세 다케시는 우리에겐 다소 생소한데 일본에서 방송작가로 활동하며 주로 현실과 판타지를 오가는 몰입도 높은 SF소설을 많이 썼다고 한다.
이 소설 '세상의 마지막 기차역'이 처음으로 한글로 번역되어 우리나라에 소개된 작가의 첫 작품이라고 하니 그 의미가 더 새롭게 느껴지기도 했다.
고전이나 정통 문학과 비교하면 깊이면에서는 아쉬움이 없진 않겠지만 이 소설을 읽고 나서 나와 나를 둘러싼 소중한 사람들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 계기를 마련해 준 책인 것만은 분명하다.
너무나 평범하고 당연해서 우리가 쉽게 망각하고 있던 진리,
이 책을 통해서나마 반드시 고민해 봐야 할 중요한 문제는
책 서두에서 작가가 분명하게 밝히고 있는 주제와 일맥상통한다.
사람은 누구나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나서야 깨닫는다. 자신이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아름다운 나날을 보내고 있음을.
만일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나게 된 사랑하는 사람을 다시 한번 만날 수 있다면, 당신은 그에게 무슨 말을 전하겠는가.
그 어떤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오늘 이 글을 접한 모든 사람들이 소중한 가족이나 지인들에게 사랑한다고, 내 곁에 있어줘서 너무 감사하다고 고백하는 날이 되길 진심으로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