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에서 자취를 하는 큰아들을 보고 온 그다음 주, 우린 무슨 정해진 수순처럼 서울에 있는 작은 아들을 보러 가기 위해 짐을 쌌다.
네이버 앱에선 창원에서 서울까지 4시간 반이 걸린다고 안내했지만 휴게소에 들르는 시간과 서울 근교의 교통상황을 감안하면 넉넉잡아 6시간은 염두에 두어야 할 터였다. 결코 만만찮은 거리... 매번 갈 때마다 큰 맘을 먹고 의지를 다지는 이유다.
아들을 위한 짐을 주섬주섬 싸는 나를 발견하곤 단풍구경 가는 김에 들른다는 애초의 의도는 이미 무색해 버린 지 오래였음을 직감했다.
출발은 했지만 마음 같지 않게 한달음에 달려가기엔 여전히 부담스러운 거리였다. 우린 점심때 즈음, 중간 지점인 문경에 들러 가을빛이 완연한 문경새재를 잠시 둘러보며 산책하는 걸로 단풍놀이를 갈음하며 서둘러 서울로 차를 몰았다.
서울 인근, 경기도에서부터 꽉 막힌 상황, 너무 안일한 시간 배분으로 그만 퇴근시간과 딱 맞물려 버린 것이다. 가까스로 교통체증을 뚫고 아들의 원룸에 도착한 시각은 8시를 훌쩍 넘어있었다.
미리 언질을 주어 아들은 이미 저녁을 먹은 상태였고 식당들도 문을 닫는 시간이라 우린 급한 대로 밥만 해서 부랴부랴 준비해 온 반찬으로 저녁을 때우는 것으로 호된 서울 입성 신고식을 치렀다.
지난 6월, 큰아들과 함께 왔을 때는 근처에 따로 숙소를 잡았었는데 이번엔 그냥 작은 애와 함께 지내기로 했다.
누가 봐도 셋이서 지내기엔 턱없이 모자란 공간이었지만 어쩌면 불편을 감수하고서라도 아들과 떨어져 있던 시간만큼의 부대낌을 만회하고픈 본능적인 모성의 발로였는 지도 모른다.
그런 연유로 저녁을 해결하자마자 우린 첫날부터 원룸 넓히기 작전에 들어갔다. 우리 부부가 잘 곳을 마련하기 위해 아들이 잘 침대 이외의 공간을 최대한 확보해야 했다. 평소 그곳을 점령하고 있던 빨래건조대를 치우고 바닥에 이리저리 널브러져 있던 물건들을 다른 장소로 옮기고 나니 다행히 두 명 정도는 너끈히 누울 만한 공간이 마련되었다.
그곳을 깨끗이 쓸고 닦은 후 우리가 가지고 온 이부자리를 펼치니 어디에 숨어 있었는지 몇 센티의 자투리 공간을 찾아낸 것만으로도 제법 그럴듯한 방 모양새가 드러났다.
그렇게 좁아터진 원룸에서 우린 서로 부대끼며 나흘간의 불편한 동거에 들어갔다.
상경 당일인 목요일과 귀가하던 월요일은 대부분 길 위에서 시간을 보냈기 때문에 정작 서울에서 지낸 기간은 금토일 단 3일이었다. 그마저도 아들과 오롯이 보낸 시간은 덕수궁을 함께 둘러본 토요일 반나절이 다였다. 그나마 저녁을 먹자마자 친구와의 약속을 잡는 녀석을 두고 남편은 속으로 못내 섭섭해했지만 아들의 생활에 지장을 주고 싶지 않아 내가 미리 허락한 약속이었다.
학원 생활로 바빴던 금요일과 하루 정도는 집에서 쉬고 싶다며 피곤함을 호소하던 일요일, 비좁은 집에서 셋이서 북적이느라 제법 피곤했을 아들을 생각해서 우린 저녁을 함께 하기로 하고 아들은 집에 남겨둔 채 남편과 둘이서 북촌마을을 다녀왔다.
일요일 저녁, 밖에서 만난 우리는 아들이 먹고 싶다는 스시를 먹으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즐거운 한 때를 보냈다.
돌아오는 길엔 원룸 근처 마트에 들러 아들이 필요로 하는 것들을 이것저것 사며 다음날의 작별을 준비했다.
드디어 월요일, 서울에서의 마지막 아침식사를 하고 학원가는 아들을 배웅한 뒤, 우린 짐을 챙기면서 이별의식을 치르듯 그동안 신세 졌던 방이며 부엌, 욕실 등을 청소하고 세간살이를 정리해 놓고는 다시 먼 길을 나섰다.
가족이란 무엇이고 또 자식이란 무엇일까?
한 집에서 서로 부대끼며 살 땐 사랑하는 만큼 밉기도 하고 때론 내 삶의 방해물인 듯 원망스럽기도 했는데...
떨어져 지낸 탓일까? 내 눈에는 아직도 부모의 손이 많이 필요한 녀석이 혼자서 제 살 길을 찾으려고 애쓰는 모습이 영 안쓰럽고 짠했다.
그럴 거면 예전처럼 부모 눈치라도 보지 말던지...
한순간도 자신의 공간을 내어주는 것을 용납하지 않던 녀석이 불편함을 참아가며 무려 4일씩이나 자신의 방을 부모에게 허락한 걸 보며 우린 철이 들었다고 칭찬했지만 왠지 마음 한 구석은 먹먹했다.
우리 부모님도 이런 마음이셨을까?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나는 부모님에 대한 원망은 없었지만 집으로부터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한 채 나 혼자 다 헤쳐왔다고 생각했었다.
자식을 품에서 내어놓고서야 어렴풋이 짐작해본다.
내가 지금까지 이렇게 별 탈 없이 살아온 데는 아마 남몰래 나를 걱정하고 안쓰러워 한 존재가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나름 자신의 삶에 고군분투하는 아들들을 보고 온 날, 자식을 품 안에 두었을 때와는 또 다른 감정들이 나를 휘감았다.
하지만 나의 이 복잡한 감정들을 감히 밖으로 내뱉진 못했다. 매번 자식들 앞에서 입 밖으로 쏟아지려는 나의 정제되지 않은 감정의 찌꺼기들을 마른침과 함께 꿀꺽 삼키곤 한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아이들이 자신의 감정을 추스르며 스스로 일어서는 성인이 되기 위한 성장통을 겪고 있듯 나 또한 진정한 부모가 되기 위한 나만의 고통을 감내하는 중이라고...
때론 아이들에게 상처만 줄 뿐, 나의 감정 배출 이외의 의미는 가지지 않는 입은 조용히 닫고 그저 믿음 실은 눈빛으로 묵묵히 바라보며 응원할 수밖에...
그렇게 나 또한 진정한 부모로 태어나기 위한 연습을 하고 있었다.
오래전 나의 부모가 나 몰래 그렇게 했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