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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맵다 쓰다 Sep 02. 2020

자해공갈단 엄마의 고백

다섯 살 난 딸아이와 둘이서 샤워를 하고 있었다. 

아이 먼저  씻겨놓고 물놀이하는 틈을 타서 서둘러 내 머리를 감는다.

의식하지 않아도 능수능란한 나의 아이 동반 샤워 신공!

엄마 7년 차쯤 되니  얻은 스킬 중 하나다. 


고개를 젖히고 샴푸질을 하는 나를 보더니 아이가 말을 건넸다.

"엄마,  눈에 물... 내가  수건으로 닦아줄까?"


머리를 감는 동안 샤워기에서 물 몇 방울 눈에 튀는 것쯤  느껴지지도 않는데  그 모습이  불편해 보였나 보다.

" 아니~ 엄마는 괜찮아, 눈 꼭 감으면 되는데? 그럼 하나도 안 들어가!"


하나도 안 들어가는 건지, 들어가도 어쩔 도리가 없다는 게  알아서 익숙해진 건지  몰라도  진짜 아무렇지 않다. 

눈을 슬쩍 떠서 아이를 보니  신기한 듯 나를 보고 있다.

세상 신기할 것도 많은  다섯 살 꼬맹이의 마음이 순수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다.


"왜? 엄마가 불편해 보였어? 엄마는 진짜 괜찮아, 엄마 생각해주는 건 우리 둘째밖에 없네~고마워!~"


그랬더니 나온 예상치 않았던  아이의 말,

"아~ 엄마는 어른이라 그렇구나. 그래서 잘 참을 수 있구나.. 나는 못 참는데"


얼음처럼 투명한 말이었다.

너도 알고 나도 아는 그런 말...

아이가 생각한 대로 표현한 그 말이 내 마음에  꽂힌다.


엄마는 어른이라.. 엄마는... 어른..



나도 머리를 감다 들어간 샴푸에 눈이 따갑던 꼬마를 지나왔을 거니까 이해하자 싶다가도

내  딸은 좀 유별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샴푸도 아닌 물 한 방울만 튀어도 꼭 마른 수건으로 눈을 닦아달라고 호들갑을 떤다.


매번 그러는 걸 알지만  어떤 날은 버럭 짜증이 솟구친다.

"원.래.  머리 감고 샤워할 땐 눈에 물도 들어가고 하는 거야! 좀 참을 줄도 알아야지!"

이를 꽉 깨물고 나오는 내 말에 눈치는 보지만 물이 들어가는 건 참을 수 없는지 기어이 닦아내고야 만다.


나는 당당히 말했었다.

참을 줄도 알아야 한다!


고작 눈에 물 들어간 걸 닦아내는 건데 그건 네가 좀 참으면 되는 거라고  빨리 씻기고 나가고 싶은 내 마음은 참지 않고 아이 눈에 물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엄마는 좋겠다. 그런 게 참아지고..' 하는 눈동자를 보니 느껴졌다.

아... 아이는 안 참는 게 아니라 아직 못 참는 것..


어른도 아닌  아이니까. 못 참는 게 당연하다.

또  정작 참아야 할 사람은 바로 나, 어른이다.


도대체 누구에게 참을 忍 을 요구하고 있는가..



며칠간 마음이 조금 힘들었다.

직장인으로 어른이 겪는 감정적 소모들, 어른인데도 친구와의 갈등은 여전히 어려운 마음들...

관계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내 마음에 동심원을 그리면서 퍼져나갔다.

꼬리를 무는 생각을 쿨하게 흘려보내지도 못했고 그저 속앓이만 하다 삭혀버렸다.


그 감정의 찌꺼기는 마음 어딘가에 가라앉아있다가 작은 충격에도 다 같이 흔들려서 떠올랐다.

주로 아이가 너무 아이다워서 날 더 피곤하게 하거나 인내를 요구하는 지점에서  잘 반응한다.

나도 안다. 그  선택적 반응은 비겁하게  가장 만만한 대상에게 돌아간다는 걸..


내 마음의 혼탁함을 잘 처리하지도 못하고 재어두면서 누군가 건드려주길 기다린 것처럼 터진다.

자해공갈단도 아니고 아이가 툭 건드린 사소함에  열폭이라는 감정의 오버액션을 취한다.

그리고 찌꺼기 가득한 내 감정의 물병을 통째로 흔들어버린다.


사람이 살면서 감정을 1급 청정수처럼 유지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냐만은.

그게 아니라면 최소한 적당히 무겁게 가라앉히고 또 흘려보내고 흔들리면 조심히 흘러넘치는 것만 닦아낼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게 어른의 마음 아닐까?  가지지 못했더라도 노력해야 할 어른다운  마음 말이다.


눈물이 핑 돌았다.

가장 만만하면서 또 가장 소중하기도 한 아이들에게 불똥이 튀는 못난 내 마음이 싫었고

어른인데 마음 하나 못 참는 내가 싫었다.

어른도 어려운 걸  아이들에게 요구한 내가 뻔뻔해서 염치가 없었다.


스치기만 했는데 뒷목 잡고 쓰러지는 사기꾼 같은 엄마의 정체를 알게 될 까  부끄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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