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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맵다 쓰다 Oct 06. 2021

가자미 알


알이 가득찬 가자미 2마리를 구웠다.

생선구이는 먹고 난 뒤 온 집에 냄새라는 여운을 오래 남기는 편이라 달갑지는 않지만 아이때문에 자주 하게 된다.

열심히 젓가락을 움직이며 가시를 발라내는 손길을 기다리는 아이들은 흡사  식탁 위 아기새 같다.

아기 새처럼 내가 발라주는 생선살을  집어 입에 넣는 모습은 언제나 엄마의 마음을 흐뭇하게 한다.


'먹는 모습만 봐도 배가 부르다'는 호랑이 담배 냄새나는 표현이 진부하지만 내 마음을 정확하게 대변한다.



팬에서 냄새가 피어오르자 아이가 쪼르르 달려온다.

" 엄마, 물고기 구워? 과자처럼 구워주세요~"

딸아이 주문이 구체적이다. 축축한 생선구이가 아닌 껍질이 바삭거리는 생선구이를 기대한다는 말이다.

생선구이 뒷 처리만큼이나 어려운 이 주문을 오늘은 성공했다.



"음~ 역시 엄마가 해주는 요리는 최고야!"

둘째가 선심아닌 진심으로 따봉을 날려준다.아이는 거짓이 없다. 짜면 짜다. 이상하면 이상하다.빈말은 없고 맛있으면 그냥 잘먹는다.

열심히 생선살을 발라 나르고 있는데  접시 한쪽으로 밀어둔 가자미 알을 보더니 아이가 물었다.


" 엄마? 근데 이건 못 먹는 거야?"

유난히 알이 두툼하게 박혀서 존재감이 컸는지 낯선 알의 정체가 갑자기 궁금해졌나보다. 자고로 잘먹는 아이를 만들려면 음식에 대한 편견이 없어야 된다는 말이 머리를 스친다.

그다지 좋아하지도 않는 가자미 알을 한쪽 떼서 내 입에 넣으면서 말했다.


"아니, 이것도 먹는 거야, 가자미 알인데 씹으면 고소해, 색깔도 분홍빛이고 예쁘지 않니?"

알이란 말에 혹시나 아이 머릿속에서 벌어질 상상을 미리 걱정하면서 전에 없던 가자미알 애찬을 했다.


"알이라니! 가자미가 불쌍해! 나 안먹을래!"

같은 불상사가 일어나지 말라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돼지가 불쌍해서 앞으로 삼겹살을 안먹겠다거나  과일이 조그맣고 귀여워서 도저히 못먹겠다는 전례가 떠올랐다.


먹는 리액션은 했지만 나도 사실 알을 좋아하지 않는다. 접시 위  알을 한참 쳐다보다 아이가 다시 물었다


" 엄마, 이건 가자미 마음인거야?"



"마음? 마음은 아니고 그냥 알이야.."라고 말을 했다.그런데 가자미에게는 그냥 알이 아닐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자미에게 그 알은 마음이고 전부이지 않을까 하는 모성애까지 생각의 꼬리가 이어졌다.

가자미에게는 전부였지만 내게는 쓸모없는....

알이 그냥 알이라고 생각했을 때는 아무런 감정이 없었는데, 가자미의 마음이라고 하니 부담스러워졌다.


이건 내 탓이 아니다.

나는 그냥 살만 가득 찬 가자미로도 충분한데 괜히 가자미 알이 들어있어서다. 알밴 가자미 때문에  갑자기 생선의 마음까지 생각하게 되었다고 제철 탓을 해본다. 




인간관계도 이런 것같다. 나는 알없는 가자미를 원했는데 누가 알까지 달랬나?하면서 더 준 상대를 탓한다.

내가 얼마나 잘해줬는데!라고 하면 누가 달랬나?하고 응수하면서 팽팽히 맞선다.


불혹을 넘겨 살고 있지만 진심은 다 통하는 건지, 적당한 것이 합리적인 것인지 잘 모르겠다.

이정도 관계에서는 여기까지만 보여주고, 얼마를 받으면 이만큼 해줄 수 있다는 것은 계산적이라고 나는 말했다.

나는 그런 계산을 잘 못해요~라고 했지만 진심이 매번 편하지는 않았다.


매사에 진심과 최선을 다한다고 말하지만 어찌보면 내 마음이 편하자고 하는 그럴싸한 포장이 아닐까 생각한다.

따지고 재는 기준을 세우는 일은 어렵고 불편한 느낌이 든다. 내 마음 불편하지 않고자 "일단 최선과 진심을 줄께. 판단은 니가 해!"하고 공을 넘겨버린다.

밀고 당기고 적절한 텐션을 유지하는 일도 연습과 노력이 필요한 것이란 생각이 든다.


만물상처럼 내가 줄 수 있는 것을 다 펼쳐놓은 건  내가 먼저 아닌가..어찌보면 애초부터 이상한 거래다.

그래놇고 너무 애정을 쏟았기에 더 서운하다던가 미리 상대 마음까지 헤아려줬는데 몰라줬다란 건 누구의 잘못일까?


두번째 직업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일을 하고 있다.

표면적으로는 글을 쓰게 하는 일이지만 글이 쓰고 싶은 마음을 들게 해야하기 때문에 나는 마음을 움직이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또 다른 방법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글쓰는 기술보다 중요한 건 마음을 먹는 거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여전히 그 마음을 만드는 데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본인도 모르는 그 마음을 타인인 내가 알아차리기 위해서 고도의 집중을 한다. 무엇을 건드려야 움직여줄 수 있을지 깊이 몰입한다. 물아일체라고 하면 과장이겠지만 때로는 그정도로 상대방의 마음에 깊이 빠졌다 나오기도 한다.

에너지가 많이 들어서 힘들다기 보다 약속된 기간과 일이 끝나면 날려버려야하는 헛헛함이 가장 힘들다.

사실, 내 진심의 크기만큼 상대가 알아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기 때문이다.

과거형으로 썼지만 지금도 내심 바라고 있다는 게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필요한 사람에게 가면 가치있는 진심이고 원치 않는 사람에게로 가면 생선살보다 알이 더 많네하고 핀잔을 듣는다.


접시 위에 남겨진 가자미 알이  마치 남겨진 내 진심과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혼잣말을 해본다.

'알의 가치를 알아주는 사람 식탁으로 갔으면 좋았을텐데, 몰라줘서 미안하다'



가치와 잉여

배려와 부담

공과 사

최선과 적정


살아가면서 정해야하는 수많은 기준이 봄철에는 암꽃게의 알, 가을에는 숫꽃게의 살처럼 명쾌하게 나눠지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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