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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맵다 쓰다 Jan 16. 2020

나는 중독자입니다.



중독이란 말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중독                              

intoxication, addiction.

                   

독으로 지칭되는 유해물질에 의한 신체적 중독과 알코올, 마약과 같은 약물 남용에 의한 정신적이고 의존적인 중독을 동시에 일컫는 말로 해석된다.



나는 믹스커피 중독자이다.

믹스커피 하나에 무슨 중독씩이나 말하냐고 할지도 모르겠다.

물론, 커피는 독으로 지칭될 만한 유해물질은 아니기는 하다.

하지만 나에게 독이 될 것 같음이 분명한데도 자꾸만 손이 간다는 의미에서 중독이 아닐까 싶다.


'아.. 커피 좀 그만 마셔야 하는데..'

하면서 속이 쓰려 위산이 내 위를 괴롭히는 게 느껴지면  위험신호로 받아들이고 참아내다가 조금만 괜찮아지면 또 슬금슬금 유혹에 빠진다.




 

정신의학과 심리학에는  중독에 빠지는 이유가 고통에 대한 회피라고 한다.

현재 고통을 주는 것에 대한 회피로 중독에 빠진다고 설명한다.


어떤 대상에 몰입하면서 회피하고 싶은 것을 잠시나마 잊는 것.


'나는 회피하고 싶어서 아닌데? 난 힐링으로 마시는 건데?'

라고 의문을 던질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커피를 마시면서 그 식상하지만 누구나 들어본 광고 문구, ' 커피 한잔의 여유'란 말을 떠올려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그 힐링에 끝엔 작은 회피가 숨어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커피 한 잔 마실 시간이 없네."

'일단, 커피부터 한잔 마시자!'

"우리, 인간적으로 밥 먹고 커피는 먹어야지!"


이런 말들을 한 적이 있다면 그 커피가 주는 의미를 생각해보라.


커피는 어쩌면 생활에서 나에게만 보이는 '잠시 멈춤' 버튼 같은 존재가 아닐까 생각한다.

복닥거리는 일상에서 벗어나 '커피와 나'만 존재하는 격리의 시간...

잠시지만 그 짧은  몰입감을 즐긴다.

다른 생각을 의도적으로 멈추어 놓고 내가 좋아하는 일, 커피를 즐기는 것에만 집중한다면 그것도 다른 의미의 회피라면 회피이지 않을까?



몇 해 전, '아이유'가 나왔던  드라마 '나의 아저씨'에서 '노란 커피믹스'는 주인공 '지안'의 마음을 보여주는 어떤 상징이었다.

사채업자, 병든 할머니, 살인자라는 오명.. 삶에 빛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지안'은 스스로에게 밥은 먹지 않아도 '커피'는 마실 수 있는 여유를 허락했다.


작은 단칸방에 돌아와서 전기포트의 버튼을 누르고 훔쳐온 노란 커피믹스 봉지를 2개 타서 마신다.

멋진 머그잔도 아닌 플라스틱 잔에 아무렇게나 털어 넣고 물을 부어 방 한쪽에 무릎을 껴안고 작게 웅크려 불도 켜지 않고 마시는 그 모습은 꽤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내 머릿속에 깊게 남아있다.


1개도 아닌, 2개... 멋진 잔도 아닌 뜨거운 물을 부으면 환경호르몬이 검출될 것 같은 취향이라고는 없는 잔에 어떤 감정도 실려있지 않는 표정으로 커피를 마시는 모습..


너무도 인생이 '지안'을 도와주지 않는 날이면 귀가 들리지 않고 거동이 불편한 유일한 혈연관계인 할머니가 누워계신 단칸방으로 꾸역꾸역 돌아와서 커피믹스를 3개 뜯어서 또 그렇게 마셨었다.

나는 그 '지안'의 커피믹스에 너무나 마음이 아렸다.

주인공 '지안'과는 고통의 온도 차이가 크게 있긴 하지만 나도 그런 느낌을 느낀 적이 있어서  주인공의 커피믹스에 그렇게 안타까웠는지도 모른다.


지안에게 커피믹스는 어떤 의미였을까? 커피믹스를 통해 위안의 시간을 가졌던 것 같다.

내 생각대로 해석하는 고통 회피로부터의 중독, 내게 주는 위안의 중독이 아닐까?






나는 커피를 매일 마시지만 1잔이 2잔, 2잔이 어느 때 3잔이 되는 날도 있다. 위가 그리 튼튼한 편이 아니라 그런 날은 카페인이 속을 긁는 듯한 느낌을 받을 때도 있다.

이쯤 되면..'아.. 커피 좀 그만 마셔야지..' 하면서도 또 다음날 여지없이 눈을 뜨면 커피 생각이 난다.

단순히 카페인에 중독되어서, 설탕의 단맛에 길들여져서만은 아니였을 것 같다.


중독이야 직장생활을 하면서부터 거의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만..

본격적으로 카페인이 나에게 좋지 않지만 끊을 수없다고 생각한 건 아이를 낳고부터였다.


뱃속에 있던 열 달은 어떻게든 참아졌는데. 아이가 백일쯤 지나서부터 너무나 먹고 싶었다. 그렇게 디카페인 커피. 반잔.. 한잔.. 초인의 힘으로 참아내던 시간들이 터져 나와 매일 아침 눈 뜨면 커피믹스 한잔이 그렇게 그리웠다.


아침에 일어나면 전기포트를 헹궈내고 물을 넣어 버튼을 누른다. 간절히 기다리는 내 마음에 호응을 해주듯이 한 잔 분량의 물은 자리를 떠나기도 전에  끓어오른다.

잠시 후면 틱! 소리와 함께 포트에 불이 꺼지면서 준비됐음이 들려온다.


그 사이에 나는 너무 크지 않은 자그마한 컵을 찾고 이지 컷팅이 쓰여있는 노란 커피 한봉을 찾아든다.

한 번에  똑 따서 컵 안에 털어 붓고 한껏 끓어오른 물을 조심히 따른다.

작은 찻스푼을 몇 번 젓지 않아도 금세 녹아드는 알갱이들..

물을 끓이는 순간부터 설레다 첫 한 모금을 마시는 그때가 가장 최고의 순간인 것 같다.

그 시간이.. 찰나지만 황홀경에 빠지는 듯 행복하다.


꼭 맛이나 향이 나를 끌어당겼을까?

사실  나는 그 찰나의 시간에서 어떤 위안을 느꼈던 것 같다..

그 잠시의 몰입은 금단의 열매처럼 자꾸 나를 유혹했고.. 낮에도 밤에도 새벽에도 나를 불러 세웠다.


내가 없는 것 같은 시간에 나로 잠시 멈춰있게 해주는 시간처럼 느끼기도 했고

어디 마음대로 나갈 수도 없는 나의 처지에서 가장 빠르게 내가 원할 때 나에게 위로를 주었던 것 같다.

힘든 육아의 터널을 지나면서는 밥도 거르고 점점 마시는 양을 늘려갔다.

주로 먹지 않아 애를 끓이는 아이들을 키워내면서 내 아이도 안 먹는데 내 몸하나 위해 차려먹을 생각도 시간도 없었기에.. 그렇게 나는 내 몸을 위안이란 말로 괴롭혔다.


그저 그렇게 텅 빈 칼로리만 내 몸에 채워갔다.

그렇게 하루에 한 번, 두 번... 현실을 멈추고 작은 위안으로 전환시키는 포트의 스위치를 몇 번이나 켜댔던 날들이 있었다..








프랑스 화가 빅토르 가브리엘 질베르'한잔의 커피'라는 그림이 가끔 떠오른다.

주방으로 보이는 공간에서 일을 하다 만 것 같이 앞치마도 채 풀지 못하고 등을 기대지 않고 몸을 기울여 의자에 걸터앉아 커피 한잔에 시선과 오감을 모두 집중해서 어떤 자의식도 없이 커피 한잔이 주는 쾌락에 빠져있는 그림이라고 설명하는 해설이 붙어있었다.

그 해설을 듣고 다시 그림을 찬찬히 살펴보니 커피잔을 휘젓은 차 스푼을 채 내려놓지도 못하고 한 손에 쥔 채로 새끼손가락을 아주 살짝 들고 미소를 머금은 듯 만듯하게  잔은 내려다보고 있는 여인의 모습이 너무 행복해 보였었다.


 

출처 :http://blog.naver.com/PostList.nhn?blogId=goldsunriver&categoryNo=0&from=postList



그래서 나는 지금 어떤 커피를 마시고 있는가 종종 생각했던 것 같다.


행복감을 느끼는 커피를 마시기도 했고

아무 생각 없이 들이키기도 했고

순식간에 마셔버려 아쉬움이 남은 적도 있었다.

또 내게 위로를 주고 싶어서 마시기도 했고

자의식이 잔뜩 들어간 채 어느 멋진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는 내 모습에 도취되어 마시기도 했다.


출근해서 마시는 아침 첫 커피는 나에게 보내는 어떤 신호 같은 의미를 주기도 했다.

일련의 의식처럼 이제 나는 '회사에서의 나'로 준비가 되었니?

시작을 알리기도 했다.

또, 잠시 회사원의 존재에서 '나'로 숨고 싶을 때는 또 커피를 찾아 마시면서 나를 잠시 피신시키고 위로했던 것 같다.





지금 나는 무엇에 중독되었을까?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은 어떤 의미의 커피를 지금 들고 있는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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