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살 좀 빼야 하지 않겠니?"
둘째를 낳고 원래 몸무게보다 8킬로쯤 더 나간채로 체중이 멈춰버린 내게 어머님이 말했다.
평소에 격 없이 잘 대해 주시는 시어머님이시지만 그 말을 서너 번째 듣자 마음에 앙금이 남기 시작했다.
'아니 출산하고 안 빠지는 걸 낸들 어쩌라고?'
'내가 안 빼고 싶어서 안 빼나?'
아무래도 고무줄 바지도 불편해지고 남편의 티셔츠가 몸에 맞는 상황이 되자 나도 내 모습을 거울로 비추기 싫었는데 악의 없는 걱정인걸 알면서도 그 말들은 꼬이고 꼬여서 내 안에서 머물렸다.
그날도 무관한 대화 끝에 이상기후처럼 어울리지 않게 어머님이 나의 체중감량을 언급했다.
마치 준비한 것처럼 나는 미처 거를 새도 없이
"어머님! 제가 그렇게 보기 싫으세요? 왜 볼 때마다 살 빼라고 이야기하세요?"
하고 말았다.
"뭐? 아니.. 내가 언제..."
깜짝 놀란 표정으로 당황해하는 얼굴을 보고 이미 쏟아진 물, 모르겠다는 마음으로 떨리는 목소리로 이어갔다.
이성에 맞지 않게 노여워하시거나 '어디 며느리가!'라는 잣대를 대지 않으실 분임을 알지만 그 말을 직접 하는 건 쉬운 일은 아니었다.
"저 볼 때마다 계속 그 말씀하시는 거 아세요? 제가 살찐 게 그렇게 흉하게 보이세요?"
쏟아내니 시원했다.
어머님은 볼 때마다 그런 말을 했는지 몰랐노라, 네가 서운했으면 미안하다고 하셨고 그 일로 일단락이 되었다.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서 그 남자의 가족을 가족으로 받아들인다.
날때부터 가족이었던 원가족도 이해가 안가는 게 투성인데 모르는 사람과 사람 어울려 살아가야 하는 가족은 당연히 크고 작은 불협화음도 생긴다.
며느리에게 큰 스트레스 안주시는 시부모님은 아마도 나같은 시부모없다 하실꺼고,
기본 도리를 지키는 며느리이니 나 역시 나같은 며느리 없다 하며 서로 맞추어 갔지만 그래도 조금은 서운한 일들도 생겼다.
결혼한 지 십 년쯤 지나서일까. 이제는 서운하고 말고 할 것이 없고 서로를 곡해하는 일도 점점 없어져가는 것 같다.
이번 추석에는 친정이나 시댁이나유난히 내게 간을 보라고 자꾸 부른다.
두 분 어머니 모두, 여전히 건재하게 주방에서 건강히 음식을 해내고 계시고 몇십 년 해오던 차례음식, 명절 별식인데도 말이다.
옆에서 돕는 시늉을 하니 그럴지도 모르지만 그 뒤에 붙이는 말에 어쩐지 입이 쓰다.
"이거 간 좀 봐라. 이제는 늙어서 간도 잘 모르겠네"
친정엄마의 단배추 나물은 싱거워 참기름 맛이 강하게 났고, 시어머니의 돼지고기 양념은 짜고 단맛과 비율이 살짝 부족했다.
사실, 의학적으로도 나이가 들수록 미뢰 세포의 민감도가 떨어진다. 동시에 여러 일을 생각하고 해내는 멀티 태스킹 능력도 떨어진다. 입맛부터 신체까지 전체적인 속도와 능력이 떨어진다.
그런 근거들이 내 부모의 모습위에 얹어지면 늙어가는 자식은 더 늙어가는 부모의 시간이 안타깝다.
해를 거듭하면서 수십 년 해오던 일들에도 조금씩 자신감을 잃는 모습에 마음 한켠이 서늘해진다.
두 손 그득하게 챙겨서 아들, 며느리, 손주들을 배웅하는 어머님께 말했다.
"어머님, 1박 2일 많은 식구 밥 해먹이시느라 고생 많으셨어요."
애교나 기교도 없는 짧은 말이었지만 어두운 주차장에서 어머니 눈이 반짝였다.
"그래, 너도 설거지하느라 고생 많이 했다."
나이가 들어서인지,가정을 꾸리고 나도 엄마가 되어서인지 엄마나 어머니를 여자로, 여자의 삶이란 궤적으로 조금은 이해하게 되는 것 같다.
어찌보면 모든 오해도 말에서 시작하고 말에서 풀리는 것 같다.
기꺼운 마음으로 음식을 준비하고 운전을 하고, 설거지를 하는데 내 속내를 몰라줄 때 불협화음이 시작된다.
단조로 흐르던 마음도 에두른 표현, 누군가와의 비교 같은 요소가 빠지면 장조로 변화 할 수 있다.
단조를 장조로 바꾸는 말.
장조를 단조로 바꾸는 말.
내가 지금 하는 말은 어떤 조바꿈의 말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