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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맵다 쓰다 Sep 28. 2022

쓰는 사람의 장비병

인생은. 쓰다

30대 초반에 다녔던 회사는 젊은 직원들이 많은 중견기업이었다.

맨손에서 시작해 지금의 회사를 만들었다는 사장님은 도전과 개혁, 열정으로 뭉친 스타일이었다. 신생회사가 그렇듯 여러 번의 격동기를 거치며  직원이 대거 이탈되던 때였다. 회사는  복지개선에 나섰다. 성과급제, 회식지원비, 무비데이, 체력단련실에 이어 동호회가 만들어졌다. 짐작하겠지만 회사에서는 변화와 시도는 곧 새로운 일의 시작 알린다.

열정 페이로 주말없이 제안서를 만들고 있는데 칼퇴근이나 시켜주면 좋겠다는 심정의 직원은 나뿐이었을까?


역시는 역시다. 팀장들은 등산동호회에 참여를 권유받았다. 왜냐면 사장님이 오실 거니까 인원을 채우란다.

'아,  이 복지는 누구를 위한 복지인가' 외치고 싶었지만   등산동호회 명단에 이름이 적혔다.

퇴근길, 마트에 들러 등산화를 하나 샀다. 신상 구두를 사도 모자랄 판에 쇼핑리스트에도 없던 등산화라니! 짜증이 밀물처럼 들어왔다. 그렇다고 돌맹이 모양까지 발바닥 느껴지는 캔버스 운동화를 신을 수 없었다.

옷은  대충 바지에 티셔츠같은  캐주얼한 차림이면 되겠지 싶었다. 2010년, 당시는 각선미가 있건 없건 다리에 딱 달라붙는 스키니진이 거리에 넘쳐나던 시대였다. 내 옷장에도 정장과 치마를 빼면 스키니 블루진, 스키니 블랙진.. 스키니가 안붙은 바지가 없었다.


이정도면 되겠지 싶은  스판기 좋은 스키니진을 입고 산에 올랐다. 제법 선선한 가을날이었는데도 땀을 흘리는대로 베어드는 청의 무게감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땀이야 흐르는 거라 쳐도 무릎을 들어 올릴 때마다 다리를 아래로 끌어내리는 검은 손, 아닌 청바지의 느낌은 어쩔 것인가!

나의 최신 유행 스키니진이 물귀신처럼 정상으로 향하는 다리를 붙잡았다. 바지의 반작용이 가뜩이나 추진력 떨어지는 나약한 하체를 비웃었다. 그렇게 바위와 체력과 스키니진과 사투를 벌이며  정상에 올랐다.

정신력때문이라고 하고 싶지만 아마도 동행한 사장님의 힘이지 않나 싶다. 꼴찌로 올라가는 내게 사장님은 컴퓨터앞에서 갇힌 사고를 하지 말고 산을 오르며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기르라고  다정한 격려를 건넸다. 사장님을 알았을까?그때 내게 필요한 건 크고 넓은 용기가 아니라 널찍한 바지였다는 것을..


한 달 뒤, 두 번째 산행을 가게 되었다. 호연지기(浩然之氣)의 가르침 덕에 이번에는 등산바지를 준비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 고작 두 번만에 지구력과 민첩성, 체력이 길러졌을 리는 없고 바위를 올라서는 다리의 느낌이 달랐다.

다리를 올릴라치면  못 잊은 님인양 붙잡던 바지는 어디 가고 내 다리가  자유를 외치고 있었다.

테니스복, 골프복, 등산복, 목적에 맞은 옷이 따로 있는 이유가 있구나!

수영선수가 신체가 받는 물의 저항을 0.01초라도 줄이려고 전신수영복을 택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흔히 말하는 장비빨, 장비병은 그저 허세가 아니었다. 상술만도 아니었다.

목적에 맞는 준비하고 시작하면 첫 발이 쉬워진다. 잘하는 것까진 몰라도 최소한 이거 못해먹겠다는 느낌은 방지할 수 있다.


글을 써야지 마음을 먹을 때도 무엇부터 해야 하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제대로 써본 적  없는데, 수사법부터 공부해야 하나? 아니 문학전집부터 섭렵해야 하나? 관련 책을 사야 할까? 알려주는 강의는 없나? 하는 시작 장비병이 도졌다.

사실, 장비라면 자유자재로 움직일 손가락과 노트북, 펜과 노트만 있으면 된다. 잘 알면서도 어딘가

미처 준비하지 못한 등산바지처럼 시작을 할만하게 도와줄 비법 같은 게 있을 것 같다.


오르고 쉬고를 반복하든, 꼴찌로 올라가든  일단 산에  가야 산에 오를 수있다. 글도 잘쓰고 못쓰기를 논하기 전에  써보면 된다. 잘 쓰는 것은 써본 다음 이야기이다.

그리고,  제대로 글을 써본 적 없다는 말은 제대로 핑계다.

초, 중, 고등학교 정규 교육을 받았다면 배우지 않았을 리 없다.우리가 졸았던 수많은 국어시간과 논술시간은 대체 무엇을 배웠단 말인가.

무엇을 배웠는지 기억나지 않더라도 철수와 영희 중 누구 대답이 왜 틀렸나 생각해서 주관식 답을 적었을 것이고, 5월이면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나라사랑, 효도에 관한 글 한번쯤 억지로 써봤을 거다.

개학을 하루 앞두고 20일 치 일기를 써내는 진기록도 세워봤던 6학년 2반 어린이였다는 걸 기억한다.

‘나는~’부터 시작해도 되고, ‘사실은~’부터 입을 떼도 좋다. 어떤 방법이 정해진 게 아닌 걸 아는데 첫 줄을 시작하기가 힘들었다.


대청봉을 오르는 사람이 있으면  금정산 상계봉부터 올라봐야하는 사람도 있다.

남문에서 시작해도 좋고 등산로에 가까운 도로까지  차를 타고 가다 중간에서 합류해도 좋다.

각자의 사정에 맞게 원하는 지점부터 가능한 만큼만 오르면 된다. 대청봉, 고단봉, 백록담을 오르는 사람들은

저마다의 이유, 모습으로 산을 즐긴다.

약수통을 든 구부정한  할아버지도 산에 갈 수 있고, 단풍 기죽이는 색감의 옷을 입은 아줌마도  산에 간다.

어떤 준비도 기술도 정해진 건 없다. 내가 산에 가고 싶다면 그저 오르면 된다.

산은 언제나 열려있고 그 시작이 어디라도 상관없다.


마음이 쓰라고 시키면 펜을 움직여 쓰면 된다.

오늘따라 거창한 일기를 써봐도 좋고, 짧은 인스타 시라도 지어봐도 좋다.

별 다른 준비가 필요한 것도, 필수로 거쳐야 할 관문이 있지도 않다. 누구에게나 산이 열려있는 것처럼 누구든 쓰는 사람이 되어도 좋다.

 몸도 마음도 가. 볍. 게.

안 될 이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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