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맵다 쓰다 Feb 04. 2020

효도도 대행이 되나요?

틀에 박힌 듯 식상한 표현이지만 차가 없이 텅 빈 시내 거리를 보니 '민족 대이동의 명절'이  맞긴 맞나 보다.


비 온 뒤 거리같이  싹 쓸려나간 연휴 아침 4차선 도로의 어색함은 어쩐지 며느리가 되어 명절을 맞는 마음을 닮은 것 같다.


잘  닦아놓은 도로가 있지만 아무도  달리지 않는  길의 풍경...

길고 긴 연휴지만 그 누구도 편히 쉬는 날은 아닌 듯 내 것인 듯  내 것 아닌 소유할 수 없는 휴일 같다.


나는 사실 차례 지내지 않는  집의 며느리이다.

또, 나의 직업의 특성, 시부모님의 일의 특성상 가끔씩 친정에 먼저 다녀오는 특수를 누리기도 했다.


이쯤 하면 지인들은 '와! 좋겠다!'라고 하나같이 말한다.


누군가가 부러워하는 명절의 모습이지만 진짜 나는 좋았을까?

누구에게나.. 다른 삶을 살다 만난 가족들 속에 들어가는 일은 어렵다.






어린 시절 기억 속 명절은 매일 놀아도 질리지 않는  빨간 날들의 연속이라 신났다.

세뱃돈으로 뭘 사지 미리 상상하던 마음,  때마다 얻어 입은 새 옷에 대한 기대...

 소풍 전 날, 방학 전 날을 합쳐놓은 듯한 설레는 기억이 떠오른다.


결혼을 하고 맞이하는 명절은 마치 '물건을 든 두 사람이 앞뒤로 계단을 오르는 느낌'이다.

두 사람이 한 개의 큰 물건을 같이 들고 가다가 계단을 만나는 순간, 누가 앞서는지 뒤에서 받치는지  위치와 입장이 달라지고 생각도 달라지는 것 같다.


위에 있는 사람이 더 무거울까?

아래 있는 사람이 더 무거울까?


위에서 힘껏 끌어올리면 나는 은근슬쩍 손을 가져다 대는 시늉만 해도 되나?

반대로 위에서 제대로 못 받쳐 내가 중력은 영향을 고스란히 받은 건가?


무게가 무거우면 무거울수록 자꾸 비교하고 살피게 된다.

둘 중에 하나가 손을 놓지 않고  균형을 잡아야 물건을 무사히 옮길 있는 판의 게임과 같다.

 

이미 기울어져서 시작하는 판임을 알지만 막상 들고 옮기다 보면 속에서 화가 치밀어 오르기도 한다.




명절 음식 준비는  많이 하지 않는다는 내 표현은  사실  여성의 가사노동에 이미 길들여졌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나의 엄마는  내가 널  낳았을 때  딸이라 시어머니가  미역국도 안 끓여줬다는 에피소드를  시집살이 대표로  풀어놓았었다.


엄마는 남녀의 차별의 억울함을 나에게 그렇게나 토로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저 참고 자라온 세대였다.

그러니 오빠와 나에게 용돈도 교육의 기회도 똑같이 줬지만 생활 속 남녀의 역할을 엄마는 몸소 보여주고 그렇게 유교적인 남자다운 일, 여자다운 일을 흡수시켜면서 나를 키웠다.

불만과 반항이 있지만 결코 내가 바꿀 수 없는 일임을 일찌감치 깨달은 나는 결혼을 하고도 별반 다르지 않은 시댁의 문화를 접하고 그저 그런가 보다 했다.

 불평등한 성역활에 대한 이해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음을..


그런 어쩔 수 없는 수긍도 나의 편이라 불리는(=남편)  물건을 같이 드는 사람을 보고 있자면 비교 본능들었다.


시댁에서친정에서나  잘 먹고 그저 있어주는 게 소임인 남편에게 시선이 가면  모른 체 잊었던 나의 엄마의 희생이 지금 내 모습과 오버랩되면 이 사회의 불합리함에 크게 소리치고 싶기도 했다.




사무치게 억울하고 고된 명절 노동이 있는 며느리가 아닌데도 그렇다.


시댁에 갔다고 24시간 일하는 것도 아닌데 나머지 시간도 사실 편하지 않았다.

편하게 대해 주시는 시부모님은 '누워라', ' 편히 있어라' 배려해 주셨지만 군기 바짝 든 신병처럼 분명히 앉아있지만 편하지 않은 상태였다.

어느 책에 나온 의학용어 '정좌 불능'의 상태처럼 이건 가만히 앉아있을 수도 없고  큰 소리로 흘러나오는 티브이 소리는 몰입감 제로인 상태로  응시하는 느낌이었다.


밥상을 물리면  당당하게 방에 들어가 컴퓨터 게임을 내리 몇 시간을 하며 연휴의 시간을 즐기는  남편의 뒤통수를 바라보면서

' 왜 나는 지금 여기 앉아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눈치 없이 자기의 여유만 즐기는 그 집에서 내가 제일 잘 아는 한 사람, 내 편은  남의 편이었다.


새로운 며느리가 부모님은 편하기만 했겠냐마는 한 남자라는 매개체로 만난 나머지 사람들만 대면한 시간들을 예전 티브이 프로그램 '친해지길 바라' 제목처럼 덩그러니 나를  두고 자유의 시간을 만끽하는 것처럼 보였다.



옆에서 자리를 지켜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부모님이 보시는 티브이 프로에 같이 맞장구를 치고 아주 생생하게 묘사하는 소싯적 이야기들을 들어드리고 있자면 나의 며느리 도리는 진심이었지만 한발  물러나는 남편의 모습이  나의 도리를 하기 싫게 만들었다.


게다가 퍽퍽한 사내만 둘 키운 시부모님은 딸 같은 며느리의 로망을 내게 풀어놓으셨다. 어디가 아프고 어디가 불편하고 아들들은 들어주지 않는 것들을 내가 해주길 바라셨고 들어주면 진심 좋아하시는 게 보였다.

 사랑이고 관심이었기에 감사하긴 했지만  저 계단 위에서 힘을 준 척만 하는 남편이 자꾸 눈이 거슬렸다.


'같이 가 아니라 왜 나만!'인가 하는 내 안의 억울함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치기 어린 생각이지만 그 당시에는 억울했다.


뭔가 '음... 내 와이프가 알아서 엄마, 아빠 기분을 잘 맞춰드리고 있군..'하고 흐뭇해하는 게 못마땅했다.

왜? 남편도 기억 못 하는  엄마, 아빠 생일을 내가 기억해서 온 가족 일정이면 식당 예약, 선물, 다시 확정 연락까지 다시 내가 해야 하는지에 대한 평소의 억울함까지 줄줄이 끌어올려졌다.



 '나는 효도 대행하러 여기 와있나?'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누구도 강요하지 않았고 나의 자발적인 행동이었지만 그 효도의 임무가 협업이 아니란 생각이 드니 대리인 같은 억울함이 생겼던 것이다.



아이가 생기고 역할이 바뀌면서 생긴  변화도 있겠지만 계단의 위도 아래도 온전히 편한 사람은 없다는 걸 조금 이해하게 되었다. 그런 것이 같이 살아온 세월의 힘인 건지 생소한 남이 가족이 되어 가는 과정인 건지는 모르겠다.


그렇게 명절만 되면 내 머릿속을 맴돌던 "효도 대행자"에서 "효도 동행자"로 생각의 지분이 커가면서 나의 명절은 조금씩 편안해져 갔다.



생각해보니 이번 명절은 낯선 환경에서 푹 못 자는 내 성격과는 달리 푹 자고 일어났던 것 같다.

그렇게 진짜 가족이 되어가나 보다.







'

매거진의 이전글 양준일이 내게 해 준 그 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