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부관리샵 대신 톱밥샤워!

혼수의 시작

by 맵다 쓰다


0.1초? 0.01초?


스크롤을 검지로 순식간에 굴린다.

눈동자가 쫒지도 못할 만큼 화면은 빠르게 전환된다.


남들이 몇 시간 걸려 작품을 만들고 정보를 보기 좋게 썼는지는 안중에 없다.

입에 딱 떠먹기 좋게 잘 차려낸 글과 사진, 그리고 경험에서만 나올 수 있는 꿀팁..


후루룩 관찰자의 시선으로 단숨에 읽어 내리다 보면 착각의 시간으로 들어선다.


'아~ 이렇게 해서~요렇게 하면 뚝딱! 별거 아니네!!'


친절한 설명을 여러 번 읽다 보니 그 경험이 내 것 같고 이론에 통달한 고수가 된 느낌이 든다.

D.I.Y란 말이 유행하던 때, 뚝딱 뭐든 만들어내는 능력자들이 차근한 어투로 설명하는 글을 자주 읽었다.

과정 샷과 설명을 본 것 만으로 내가 직접 해본 경험으로 나의 뇌가 오판을 시작한다.


스프러스, EO등급 합판, 레드파인 등

판재 이름과 18T, 12T, 스크루와, 비트 같은 외계어 같은 용어는 된장. 고추장 같은 말처럼 느껴지게 되었고 이론 만렙을 찍는 목공 전문가쯤 된 것 같았다.


종이에 연필로 디자인을 진중하게 임한다.

오로지 나만의 작품을 만들겠다는 각오로 그려봐도 사실, 세상에 처음인 것은 없다.


가로, 세로, 높이, 두께를 계산해서 전개도를 그려본다.

산수와 수학이 내가 살아가는데 쓸모 있는 학문이 될 줄이야.. 하는 생각을 하면서 설계도를 그려낸다.


하중을 견뎌야 하니 18T 두께

색이 예쁘게 발색되게 색이 연한 원목

가격도 비교적 저렴한 스프러스

판재 하나를 결정하는 단계도 사실 이렇게 여러 가지를 고려해야 한다.



좁은 집에 들어갈만한 폭만큼 주문해온 판재에 제도용 샤프로 0.1mm 오차 없이 그리고 몇 번을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하면서 나사를 조일 부분을 체크한다.

목공풀을 발라 임시 고정을 하고 목재가 쪼개지지 않게 이중 기리로 구멍을 내고 스크루를 쪼인다.

작업하기 편한 순서로 결합시키고 수용성 친환경 페인트를 바르고 말리고 사포로 결을 골라내고 다시 반복



가구를 만드는 과정이다.



혼수 리스트 1번

보쉬 전동드릴 세트와 직소기..

예비신부에게는 어쩐지 어울리지 않는다.


예쁜 그릇이나 이불 대신 제일 먼저 예비 신혼집에 입성한 물건을 보고 남자 친구는 할 말을 잃었다.

사지 않고 가구를 만들겠다는 '마음만 목수인 예비 신부'를 말려봐야 소용없다는 걸 긴 연애기간을 통해서 알았으리라..


몇 개월간 마우스 내공으로 갈고닦은 목공 이론과 소품 만들기 공방에서 고작 8회의 실전 경험..

소품에서 가구로 거침없이 건너뛰는 나의 무모한 도전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하지만 도전과 시작은 시련이 있는 법..

좁은 아파트 베란다에서 내 키만 한 무거운 판재를 들고 수평 맞추는 일은 작업대가 갖춰진 공방에서 소품을 가지고 해보는 것과 차원이 달랐다.

이리저리 수평을 맞춰가면서 적당한 깊이로 나사를 박는 것만으로도 진땀이 났다.

넓은 면적을 칠하고 사포질하는 것도'2~3회 반복'이란 짧은 글자와 달리 엄청난 시간과 노력을 요구했다.


글로만 배웠던 목공과 현실의 차이를 깨닫는데는 오래걸리지 않았지만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다.


수십만 원의 재료인 날것 그대로의 나무가 신혼집 베란다에 잔뜩 차 있었기 때문이다.

도와주지 않아도 된다고 큰소리친 내가 살짝 원망스러웠지만 물러날 곳은 없었다.

결혼식 전까지 남은 기간 한 달...

보통의 신부가 피부관리숍을 다닐 때, 나는 빈집에서 톱밥을 날리면서 가구를 만들어댔다.


그렇게 벽수납장, 티브이 선반, 신발장, 아일랜드 식탁이 탄생되었고 난 야매 목공인이 될 수 있었다.

그리고 무사히 결혼식을 하고 신혼집에 입성했다.



직접만들어서 집을 채우겠다는 나의 호기로운 계획에 가족과 친구, 예비 신랑도 뜯어말렸지만 꿈적하지않았다.

그들도 해보지는 않았으니까 후회할지 아닐지는 해봐야 알지 않을까?


처음 부모님 그늘을 떠나 꾸리는 독립의 시작을 다소 무모하더라도 내 결정으로 채워보고 싶었던 것 같다.


나에게 새로운 시작은 '사서 고생길로 들어섰다'는 걸 의미한다.


어떤 시작이든 짐작만으로 먼저 물러서지 않는다.

경험해보지 않고 머릿속으로만 알고있는 건 진짜 아는게 아니기에 조금 버겁고 후회를 동반하는 시작이라도 몸을 부딪혀 깨지면서 내 것으로 만든다.


그게 야매 목공인의 꿈을 접게 하는 계기이든 가구장인으로 재능을 확인하는 시작이든지 말이다.






Markus Spiske temporausch.com님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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