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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맵다 쓰다 May 10. 2020

양파의 정체

화려한 경력 소개와 함께 자신감 넘치게 등장한다.

박수갈채를 쏟아내는  청중들..

내가 생각하는  강연장의 모습이다.


누군가의 강연을 찾아 듣는다면 그 분야에서 성공을 거 둔 사람이었다.

뛰어난 인물의  삶만 감동을 줄 수 있다는 나의 믿음은 튤립 하나로 깨어졌다.



목적 없이 스마트폰 속  인터넷 포털사이트를 넘겨보던 어느 날이었다.

물속을 유영하듯 그저 정보의 바다에 몸을 맡긴 채 이리저리 떠밀려 다니면서 시간을 흘려보냈다.


관심을 끄는 사진이나 제목을 클릭해서 들어갔다, 뒤로 가기를 반복하면서 편하지만 영양과 성의는 없는 컵라면 같은 소비를 하다가 이런 제목의 글을 만난다.


'집에서 키우기 어려울 것 같은  튤립, 실제로 키워보니'

만개한 형태의 튤립만 알았는데 초겨울부터 구근을 심고 봄을 기다리며 꽃을 피우기 위해 정성을 다하는 모습이 이상하게도 마음을 흔들었다.

Burak K님의 사진

튤립을 키운다는 생각조차 한 적이 없는데 '이게 이렇게 멋진 일이구나!'라고 느껴졌다.


긴 글을 차분히 읽다 보니  꽃을 키운 사실보다 글과 사진, 글 쓴 사람의 시선과 삶이 더 멋지다는 걸 깨닫게 된다.


어떤 사람이길래 이리도 진지하게 튤립을 키워내나 호기심이 생겼다.

부단히 무엇인가 배우고 삶을 바꿔가려는 노력이 잔뜩 묻어있는 블로그...


여러 글 중 내가 사는 지역에서 열리는 강의 정보가 눈에 띈다.

난생처음 본 강사와 평소에 관심도 없었던 '책을 잘 읽는 방법'이란 주제였다.


보통 정규 기관 공식 홈페이지에서 신청하는 강의만  들었는데, 무명의 강사가 직접 열고, 보지도 못한 사람 통장에 비용을 입금한다.

장소는 경매학원? 이런  것도 있구나.. 지나쳤다.


하지만  며칠째  튤립을 키우는 사람의 삶을 엿보게 되고 추천한다는 이 강의를 들어보기로 결심했다.



책을 읽는 방법이 뭐가 특별한 게 있을까? 강의장에 오는 내내 반신반의했다.

의심이 무색하게  거기  스무 명 남짓한 사람들이 뿜어내는 열기에 나는  압도당했다.


별 볼 일 없이 잿빛 인간이 되어가는 아줌마 마음에 풀무질을 한 그 열정들..

내 속의 꺼진 줄 알았던 성장의 불씨가 되살아나고 있었다.


그 강의로 알게 된 '오픈 채팅방'에 들어간 나는

'아이고 내 딸 청아~어디 보자!'를 외치면서 눈을 번쩍 뜬 심봉사 같았다.

같은 시대를 살아가지만 내가 몰랐던 세상이 굴러가고 있음이 충격적 놀라움이었다.


오픈 채팅방이라는 하드웨어보다 더 놀라운 건 그 안에 담긴 사람들의 스토리..

자기를 이기기 위해 새벽을 깨우며 일어나고

세상을 보는 눈을 가지기 위해 책을 필사적으로 읽고 있었다.


더 나아진 삶을 위해 몸을 단련하고 지혜와 습관을 쌓고 있는 다양한 삶의 이야기는 완결형도 아닌 진행형이었지만 나에게 큰 울림을 주었다.




내 눈에 완결형으로 보이는 성공한 사람들의 삶은 울림은 있지만 정작 나를 변화시키지는 못했다.

이미 많은 걸 이룬 사람의 고군분투한 이야기는 너무 먼 나라 같아 보여서였을까?

성공한 삶도 내 등을 떠밀지 못했는데 아직 뚜렷한 결과도 없는 미미한 이야기들은 모여서 큰 파도가 되었다.


다들 별생각 없이 그저 비슷한 삶을 사는 줄  알았는데  이토록 진지한 자세라니...

덮어두고 애써 기억에서 지우려던  토요일 저녁 숙제 같은 내 삶을 다시 펴보게 되었다.


해야만 하는데 끝까지 미루던 일,

하지만 내가 할 수밖에 없는  의무 같은 것이었다.

나와 만나는 일 말이다.


'이번 생은 글렀어~지금이라도 행복할래~'

소확행이나 욜로로 삶을 소비하면서 나를 사랑한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알맹이는 모른 척한 것이었다.

그렇게 찰나의 즐거움을 접고  내게 남은 수십 년에 대한 고민이 시작되었다.


그저 흘러가게 두었던 삶을 붙잡고 싶었다.

방향키를 돌려보기로 결심하니 항해 준비를 해야 했다.

내가 직접 선장도, 조타수도, 선원도 돼야 하는 여정은 힘들었지만 짜릿했다.


다음날부터 새벽 5시를 열면서 아침을 맞이했다.

그때, 눈꺼풀이 불수의근(involuntary muscle, 不隨意筋)인 줄 처음 알았다. 내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수의근(voluntary muscle, 隨意筋)인 줄 알았는데 의지로 안 되는 거였다니..

아침을 이기고 시작한다는 말이 뼛속까지 묻히게 공감되었다.


힘겹게 눈 뜨며 맞이한 새벽인데 그냥 흘리기엔 시간이 아까웠다. 

그 시간들을 보내면서 마음 한구석에 있었는 줄도 몰랐던 꿈이 삐죽 솟아 나왔다.

작.. 가..



튤립이 구근초란 걸 처음 알았다. 사실, 관심도 없었다는 게 정확한 표현이다.

흡사 양파 모양을 하고 있는 튤립 구근은 그 안에 영양분을 가득 채우고 있다. 

그 영양분으로 겨울 땅속을 이겨내다가 봄이 오면 조금씩 싹을 띄운다.


차가운 땅속에 있을 때는 있는지조차 관심 없다.내 안에 꼭꼭 다져 묻어놓은 작가라는 꿈처럼.. 



활짝 핀 꽃만 쳐다보면 부러워했는데 내 구근안에 자력으로 겨울을 버틸 영양분을 채우는 과정이었다.

나는 꽃이 되기 위한 긴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봄을 맞이하면 절정으로 만개하는 튤립의 생장기를 떠올리면 나는 싹을 틔워볼려고 한다.


내 꿈이 피어오를 수 있도록..



Daniel Spase님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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