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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살이와 숨겨진 진실

볕집 속 쌀가마니

by 최순옥
프롤로그

어머니가 시집오시던 그날, 볕집 아래 숨겨진 쌀가마니와 계란 한두루마리가 있었다.

아버지 장가가는 날. 어머니 시집오던 날

그 쌀가마니 위로 햇살이 내려앉았다. 그 햇살은 따스했지만, 그 속에는 말하지 못한 고단함과 아픔이 묻어 있었다.

어린 나는 알지 못했지만, 그것은 어머니의 비밀이자 어머니가 평생 견뎌야 했던 삶의 일부였다.

오늘은 그 시절, 어머니의 시집살이와 숨겨진 진실을 함께 걸어보고자 한다.


본문

어머니는 어릴 적부터 배움에 대한 열망이 남달랐다.

공부하고 싶다는 마음이 누구보다 간절했기에, 서울에 올라가 공부를 하기도 했다.

그곳에서 새로운 세상과 만나는 듯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전쟁이 발발하며 모든 계획은 허무하게 무너졌다.

전쟁이라는 거대한 소용돌이 속에서 어머니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어린 동생들을 돌봐야 했고, 힘겨운 나날을 보내야 했다.

그 어린 나이에 무거운 책임을 짊어지고, 가족을 지켜야만 했던 어머니의 마음은 어땠을까.

그 고통과 절망 속에서도 어머니는 한 걸음 한 걸음 묵묵히 나아갔다.

어머니가 시집간 큰댁은 부유하지 않았다.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큰어머니는 다섯 자녀를 키우며 살림살이에 늘 바빴다.

고모도 한 분 있었고, 큰아버지는 일하러 밖에 나가시는 일이 많아 집에 자주 계시지 못했다.

그분이 집에 오실 때면 가족 모두가 반갑게 맞이했지만, 평소에는 큰어머니가 살림과 아이들을 도맡아 해야 했다.

큰아버지는 과묵하고 학벌도 좋았으며 배움도 많았지만, 전쟁의 여파로 집안 형편은 점점 어려워졌고 바쁜 일상 속에서 집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반면 아버지는 장난기가 많고 말수가 적었지만 듬직하고 다정한 청년이었다.

두 분의 성격과 환경은 달랐지만, 그 속에 묘한 조화가 피어났다.

어머니는 특히 큰어머니가 쌍둥이를 낳은 후부터 더 힘든 시기를 겪었다.

육아와 살림을 도맡아 하며 쉬지 않고 움직였다.

드넓은 들녘은 풍년을 기약했다

때로는 너무 배가 고파서 물로 끼니를 대신할 때도 있었고, 그럴 때마다 어머니는 눈물을 삼켜야 했다.

그 눈물에는 말할 수 없는 외로움과 절망이 묻어 있었지만, 어머니는 그 모든 것을 감내하며 견뎌냈다.

외할머니는 그런 딸을 늘 걱정하며, 볕집 밑에 쌀가마니 세 개를 몰래 숨겨 두었다.

그 쌀가마니는 어머니에게 큰 힘이 되어 주었다.

힘겨운 나날 속에서도 그 쌀가마니가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어머니는 조금이나마 위안을 얻었고, 그 마음을 붙들고 하루하루를 버텼다.

중매쟁이를 통해 아버지와 어머니가 연결된 이야기도 어머니 인생에서 중요한 부분이다.

아버지는 제대 후 농사일에 종사하며 소도 기르고 땅도 관리하는 부잣집 아들이었다.

말수가 적었지만 듬직하고 멋진 청년이었다.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에게 점차 마음이 끌렸고, 두 사람의 만남은 조금씩 깊어졌다.

임진강을 건너는 일이 자주 있었는데, 겨울이면 강물이 꽁꽁 얼어붙어 얼음 위를 조심스레 걸어야 했다.

어머니는 어린 동생들과 함께 위험을 무릅쓰고 강을 건넜고, 얼음이 깨질까 봐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 소리와 바람, 차가운 공기는 지금도 어머니 기억 속에 생생히 남아 있다.

어머니는 동생들을 업고, 강가에서 기저귀를 손으로 빨며 고된 살림살이를 꾸려 나갔다.

그 손은 거칠었지만 따뜻했고, 고된 노동에 지친 몸은 늘 피곤했지만 절대 포기하지 않았다.

밤이 되면 창문으로 새어 들어오는 달빛 아래, 내일을 다짐하는 어머니의 모습은 어린 내 마음에도 깊이 각인되었다.

아버지는 말이 많지 않았지만, 그 조용한 모습 속에는 묵직한 신뢰가 담겨 있었다.

아버지의 땅과 소, 그리고 겉모습보다도 그 눈빛과 조용한 배려가 어머니 마음을 움직였다.

서로 환경은 달랐지만, 두 사람은 천천히 마음을 나누며 한 가정을 이루기 시작했다.

그 시절 시골의 삶은 결코 쉽지 않았다.

사람들은 전쟁의 상처와 가난 속에서 하루하루를 견뎠고, 가족들은 서로를 보듬으며 살아갔다.

보물보다 귀한 외할머니의 사랑 황금계란

어머니와 아버지 역시 그런 평범한 한 가족이었다.

그 속에서 사랑은 조용히 피어났고, 그 사랑은 오늘날까지 우리 가족의 든든한 뿌리가 되었다.

또 한 가지 잊을 수 없는 기억이 있다.

아버지의 첫사랑 우정자 님이 어머니를 찾아왔던 일이었다.

어머니는 우정자 님을 집에 정성껏 맞아 밥도 지어주고 반찬도 직접 만들어 차려주었다.

그날 집 안에는 낯선 손님이었지만, 진심 어린 환대가 가득했다.

아버지를 잊지 못한 우정자 님을 향한 어머니의 배려였을까, 혹은 깊이 숨긴 복잡한 감정이었을까.

어머니는 아무 말 없이 그를 대했고, 아버지도 남몰래 난처해하셨다고 들었다.

그 사건은 우리 가족 안에 조용한 파문을 남겼지만, 어머니의 넓은 마음과 강인함을 다시 한번 느끼게 해 주었다.


에필로그

지금 돌이켜보면, 어머니의 시집살이 시절은 그분만의 싸움이었고 동시에 삶을 살아내는 힘의 연습이었다.

볕집 아래 숨겨진 쌀가마니,

허기진 배를 물로 때우던 긴 밤들,

소중한 쌀 한톨한톨

어린 동생들을 돌보며 묵묵히 살아낸 어머니의 따뜻한 손길,

그리고 아버지와의 만남이 어머니에게 준 작은 위안.

거기에 아버지의 첫사랑 우정자 님을 정성껏 맞이했던 어머니의 넓은 마음까지.

이제 나는 그 시간을 글로 남겨 본다.

시집살이의 고된 날들 속에도 웃음이 있었고,

그 고된 시간 속에서도 사람은 사람으로 살아낼 수 있었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다음 편에는 아버지의 첫사랑 ‘우정자’ 이야기와, 어머니가 그 존재를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그리고 그로 인해 생긴 감정의 파편들을 이야기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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