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집에서 쉼? 그리고 오늘 아버지를 만나는 날
프로로그 2025.11.30. 일요일
마음이 비어 있었다.
천천히 고향길을 걸었다.
바람이 얼굴을 스치고, 낙엽이 사각거린다.
오늘은 어머니 산소를 다녀온 날.
보고 싶고, 기대고 싶고, 손 잡고 싶은 마음이 함께 밀려온다.
고향집에서, 나는 오늘 이 글을 쉼 하며 쓴다.
스산한 아버지의 빈자리, 내 마음의 빈 가슴이 함께 서 있었다.
고향의 오일장
고향집 가는 길 적성면 마지리 오일장에 들렀다.
배 세 개, 단감 여덟 개, 귤 몇 개, 오천 원.
소주를 한 병을 들고 고향집으로 향했다.
손에 든 것마다 어머니와 나누고 싶은 마음을 담았다.
잠시 멈춰서, 시장 바람에 얼굴을 맡기고 숨을 고른다.
어머니가 계신 산소에서
어머니 산소 앞에 서자, 마음이 한순간 무거워졌다.
보고 싶어 소리치고 싶지만, 그저 앉아 있었다.
흙냄새, 바람에 흔들리는 풀잎, 먼 하늘까지 모두 어머니를 부르는 듯했다.
손에 든 소주를 올리고 속삭였다.
“어머니, 오늘 왔어요.”
옆에는 큰아버지와 큰어머니가 계셨다.
홀연히 떠나신 큰어머니, 지금은 편안하실까.
오빠에게도 잔을 올리고, 말없이 앉았다.
바람이 얼굴을 스치고, 발밑 낙엽이 사각거린다.
마음 한편에서, 어머니에게 기대고 손을 잡고 싶은 마음이 일렁인다.
눈물이 핑 돌지만, 조용히 마음속에 담는다.
말없이 손끝으로 그 온기를 느끼며, 오래 울고 싶은 마음이 자리한다.
마당 풍경 — 낙엽과 다래
고향집 마당, 나뒹구는 낙엽은 사각거리고,
화단 항아리 옆에는 홀연히 떨어진 다래가 남아 있다.
수확하지 못한 채 남겨진 다래는 그대로 땅에 눕는다.
낙엽과 다래, 각각 다른 소리와 자리를 지키며 스산한 시간을 전한다.
스산한 아버지의 빈자리가 떠오른다.
손이 조금 시리지만, 하루를 느끼며 정리한다.
그 모든 것이 어머니를 향한 사랑과 그리움의 흔적처럼 느껴진다.
아버지 자리
거실, 아버지가 늘 누우시던 자리.
온수 매트를 켜고 그대로 누웠다.
하지만 나는 오늘 아버지를 뵈러 가지 못했다.
하루의 무게를 잠시 내려놓으며, 그 빈자리를 마음으로 느낀다.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나를 연결하는 작은 조각들이 마음속을 채운다.
손끝으로 느껴지는 온기와 그리움에, 기대고 싶은 마음이 다시 올라온다.
내 마음은 스산하고, 빈 가슴 한편이 시리게 흔들린다.
어둑어둑해지면,
오늘 하루, 모든 마음과 눈물을 마음속에 안고, 고향집의 공기와 바람을 남긴 채.
노래 — 장혜진 <어느 늦은 밤>
오늘은 장혜진의 1994년 <어느 늦은 밤>이 흐른다.
오늘 밤 그대에게 말로 할 수 없어서
이런 내 마음 종이 위에 글로 쓴 걸 용서해
한참을 그대에게 겁이 날 만큼 미쳤었지
그런 내 모습 이제는 후회할지 몰라
하지만 그대여, 다른 건 다 잊어도
이것만은 기억했으면 좋겠어
내가 그대를 얼마큼 사랑하고 있는지를
사랑하는지를
외로이 텅 빈 방에 나만 홀로 남았을 때
그제야 나는 그대 없음을 알게 될지 몰라
하지만 그대여, 다른 건 다 잊어도
이것만은 기억했으면 좋겠어
내가 그대를 얼마큼 사랑하고 있는지를
사랑하는지를
이제는 안녕
내 마음에도 같은 울림이 스며든다.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 아버지의 빈자리, 내 마음의 텅 빈 공간 속에서
손을 뻗어 잡고 싶고, 기대고 싶은 마음이 한꺼번에 밀려온다
에필로그
돌아오는 길, 마음이 조금 비어 있다.
고향집 공기, 낙엽 냄새, 바람과 흩어지는 기억 속에서
오늘 하루를 조용히 내려놓는다.
그 자리에, 여전히 숨 쉬고 있는 사랑과 그리움이 느껴진다.
그리고 내 마음속 스산함과 빈 가슴 또한 조용히 머물러 있다.
작가의 말
이 글은 특별한 이야기가 아니다.
누구나 가슴 깊이 간직한 부모님과의 기억, 지나간 시간, 그리움이 있다.
때로는 기대고 싶고, 손을 잡고 싶은 마음까지 올라온다.
눈을 감고 그 자리에 서 있는 순간, 누구나 마음이 빈 듯 울컥하며
작고 소중한 순간들을 떠올릴 수 있기를 바란다.
예고편
목요일 써놓고 올리지 못한 글은 다음 편에서 전합니다.
오늘은 고향집에서 쉼 하며 쓴 글, 마음속 깊은 울림과 함께합니다.
다음 글에서는 아버지의 거실 자리와 화단, 작은 일상 속 숨겨진 이야기들을 따라가며
‘사랑과 기억’이 우리 일상 속에 스며드는 순간들을 전합니다.
감사의 말씀
따뜻한 마음과 위로를 보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지난 목요일 연재를 잠시 쉬어가며 마음을 정리했는데,
여러분의 다독임과 격려 덕분에 제 마음도 한결 편안해졌습니다.
오늘 26편 글을 쓰며, 그 마음을 담아 조용히 전합니다.
작가님들 모두의 하루가 조금이나마 따스하길 바랍니다.
아버지를 뵌 저녁 2025.12.2. 화요일
오늘 오후 늦은 출장을 마치고, 나는 다시 아버지를 뵈러 갔다.
은은한 온기로 가득했고, 아버지는 침대 위에서 천천히 몸을 움직이셨다.
수면잠옷을 보여드리자 아버지는 손끝으로 천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거… 비싼 거구나. 부드럽다.”
“얼마 같아요, 아버지?”
“오십만 원?”
“맞아요. 아버지, 나 상 타서… 상금으로 산 거예요.”
아버지는 잠옷 박스의 모델 사진을 보더니 장난스럽게 물으셨다.
“모델이 잘생겼어?”
“아버지가 더 잘생겼죠?”
그제야 기다렸다는 듯, 입꼬리가 스르르 올라갔다.
“그럼. 내가 잘생겼지.”
오랜만에 아버지 얼굴에 맑은 웃음이 번졌다.
나는 아버지 손톱을 다듬어드리고, 손을 주물러 드리고, 팔과 다리를 부드럽게 주물렀다. 한참이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엄마… 언제 오냐.” 아버지의 눈빛이 조용히 흔들렸다.
“어제 산소 다녀왔어요. 엄마도 뵙고 엄마 옆에 큰아버지, 큰어머니… 소주 한 잔 올려드렸어요.”
아버지는 잠시 가만히 계시더니 낮게 말했다.
“…보고 싶다.”
그러더니 갑자기 옛날처럼 장난기를 보이셨다.
“머리 좀 대봐라.”
내가 살짝 갖다 대자, “콩—” 소리가 났다.
“아버지, 아파요!” 하고 웃자, 아버지도 젊은 시절 장난하던 표정을 그대로 지어 보이셨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간호사님이 조용히 말했다.
“아버지는 좋으시겠어요… 저는 아버지가 55세 때 돌아가셨어요. 작가님 글 복사해 놓은 거 아버지가 잘 읽으세요. 저도 읽다가… 울었어요.”
그 말이 공기를 적셨다. 아버지는 고개를 숙이더니, 갑자기 울컥— 눈물을 쏟으셨다.
“네가 있어… 고맙다… 고맙다…”
말이 떨렸다. 나는 아버지를 끌어안았다. 둘 다 어깨가 들썩일 만큼 대성통곡을 했다.
아버지는 내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울지 마라… 너 울면 속상하다…”
잠시 후, 아버지는 메모지와 펜을 집어 들었다. 손이 떨리는데도, 또박또박 힘을 주어 글자를 적으셨다.
“아버지는 막내 최순옥가… 사랑해요.”
힘없는 글씨였지만 그 한 줄이 방 안의 온도를 완전히 바꿔 놓았다.
한 시간 반, 그렇게 함께하며 아버지께 담요를 덮어드리고, 새 달력을 꺼냈다. 아버지 생신 날짜를 크게 동그라미 치니, “네 생일도 써라.” 해서 ‘ 순옥 생일’ 도 크게 적어 넣었다.
나는 원숭이 춤을 추듯 손을 까딱하며 장난을 이어가고, 아버지는 하트 모양을 그려 보여주셨다. 둘 다 웃었다. 웃으며 헤어지는 순간, 이렇게 고마운 날이 또 있을까.
오늘의 눈물과 웃음, 그 따뜻함과 바스러지는 마음이 저녁 바람에 가만히 실려갔다.
아버지 꼭 따뜻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