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손안의 작은 책갈피

16. 내가 사랑한 모든_물건들 [책갈피]

by 정담

내가 지금 앉아 있는 책상 앞, 인생 네 컷과 엽서와 명함들 사이로 갖가지 스티커와 폴라로이드들이 삐죽 빼죽 나와있다.

그곳에 사연 없는 것들은 없지만, 그중에서도 딱 2개. 오늘은 책갈피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어릴 때부터 책은 늘 좋아했지만 딱히 수집욕이라거나 하는 욕심은 없었다. 딱히 미감을 지니지 못한 채 태어나 남들 다 좋다 하는 굿즈들도 눈으로 보는 거면 만족했고 북커버라든가 독서대라든가 하는 물건들도 없으면 그만~ 조금 예쁘긴 하네~ 정도의 감상에 그친 내가 사는 게 하나 있다면 바로 책갈피이다.


23살 전까지만 해도 책갈피는 말 그대로 내가 어디까지 책을 읽었는지 표시하기 위한 하나의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오히려 처음 책갈피를 선물 받았을 때는 당황을 할 정도였다. 이를테면 갑자기 티슈 하나를 선물 받은 것만 같은… 그러니까 내가 한 번도 제대로 된 가치를 부여한 적 없었던 물건이 탈을 바꿔 쓰고 나온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여기서 웃긴 건, 그렇게 당황하며 받았던 책갈피를 지금은 꽤나 아끼게 되었다는 거다. 손바닥만 한 나무 재질에 맨 위는 뚫려 술이 달려 있고, 그 아래로는 알 수 없는 한자가 세로로 쓰여 있는, 맨 마지막에는 우람한 존재감의 소가 그려진 이 책갈피는 내가 20살일 적 함께 아르바이트하던 분께 선물 받은 거였다.


당시 내 아르바이트 장소는 명동역 바로 근처, 아직 코로나가 생길 거라 예상조차도 하지 못하던 때의 명동은 그야말로 중국인들의 핫플 그 자체였다. 때문에 당시 아르바이트생 중에는 한국에서 학교 생활을 하던 찐 중국인들도 많았고, 나에게 선물해 준 분 또한 마찬가지였다.


며칠 간의 휴가를 얻어 중국에 다녀온 그분은, 이제는 인상만 흐릿하게 남아있을 뿐 이름도 기억나지 않지만, 중국에 다녀온 기념품으로 책갈피를 선물해 주었다. 내가 국문과인 것을 기억한다며. 예상조차 못한 물건임에도 그 마음에 감사하며 받았던 기억이 있다. 그때 그 앞에 쓰인 한자 뜻을 물어보지 않은 게 여태껏 후회될 줄은 전혀 몰랐지만.


이후 몇 개월이 지나 나도 그분도 아르바이트를 퇴사하고 이후 연락이 끊겼지만 나에게는 여전히 그 책갈피가 있었다. 여전히 뜻을 알지 못한 채로. 이후 교양 중국어를 듣기도 하고, 중문과에 다니는 친구를 사귀기도 했지만, 여전히. 굳이 알려고 든다면 요즘 세상에 모를 수 없겠다마는, 알고 싶은 마음이 들면서도 왜인지 굳이 알지 못한 채로 남겨두고 싶은 욕심도 든다. 지금은 추억으로 남아버린, 당시에는 너무나 현실이었지만 이제는 비일상이 되어 버린 그때의 어린 날이 그대로이길 바라는 걸까?


또 하나, 나에게 소중한 책갈피는 이 글을 쓰는 지금, 내 바로 눈앞에 있는 금속 재질로 만들어진 얼굴 없는 니케 조각상을 끝에 단 유럽에서 온 아이다. 23살, 나에게 책갈피가 중요해진 연도를 아는 이유이다.


난생처음으로 유럽 여행을 떠났던 때, 내 인생 2번째 해외였던 프랑스의 파리에 도착한 지 정확히 이틀 째 되던 날. 그날의 일정은 오전에는 퐁피두를, 오후에는 루브르 박물관을 가는 거였다.


루브르, 밈으로도 등장하는 그 공간은 지극히 친근하면서도 너무도 낯선 공간이었다. 피라미드 모양의 유리 공간을 지나 들어간 그곳은 다 둘러보지도 못할 만큼 넓었고 친구의 친절한 해설을 들으며 본 작품들은 아름다우면서도 익숙했다. 특히나 저, 계단 사이에 당당히 자리했던 니케의 조각상은 여러 책과 미디어에서 본모습 그대로였다. 오히려 너무 그대로라 실망할 만큼.


사실 루브르 박물관은 내 기대보다 좋지 못했다. 그 전날 오르세 미술관에 너무 만족을 한 탓이었을까? 내 눈에 익은 작품은 루브르 박물관이 훨씬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을 확 사로잡는 작품은 솔직히 말하자면 없었다. 긴 줄을 기다려 맞이한 모나리자 조차 “음, 작다”와 “음 똑같네” 정도의 감상을 남겼을 뿐이었다.


그래도 여기까지 온 거, 다 보고 가자!라는 마음으로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 보니 벌써 저녁 시간이 가까워져 왔었고 마지막으로 나가기 전 기념품샵에 들렀다. 친구들이 작품집을 사고 사진을 볼 동안 이것저것 구경하던 나의 눈에 띈 게 바로 책갈피였다.


살까? 에이, 아니야 그래도.


그 사이를 방황하던 중, 포스기에 가기 전 마지막으로 들었던, 나의 책갈피. 이 승리의 여신이 지금까지도 나에게 그 루브르의 순간을 떠올리게 해 줄 것을 그때의 내가 알았다면 아마 망설일 일은 없었을 테지만, 그 망설임이 있었기에 지금 더 많은 추억이 떠오르는 걸 테니까.


이때를 기점으로 나에게 책갈피는 소중해져 버렸다. 난 이제 책갈피를 모아야겠다, 생각하고 보니 많은 관광지에서 이미 상품으로 책갈피를 내놓고 있었다. 이후로도 여러 개를 사 모으고 있다. 볼 때마다 그 추억이 스쳐 지나가는 건 이 딱 2개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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