빚의 시대: 우리가 쓰는 돈의 정체
『부채, 첫 5,000년의 역사』를 통해 우리는 부채가 단순한 경제 개념을 넘어, 인간관계를 재정의하는 힘을 지녔음을 확인했다. 부채는 신뢰와 약속, 그리고 사회적 관계에서 출발한 개념이었다. 그러나 화폐경제와 결합하면서 부채는 단순한 채권과 채무의 계약으로 축소되었고, 인간관계 또한 거래 가능한 상품으로 변질되었다. 본래 인간의 삶 속에서 사회적 신뢰와 도덕적 약속으로 유지되던 관계들이 이제는 돈으로 계산 가능한 가치로 전락한 것이다. 시장의 확장은 이 같은 현상을 더욱 가속화했다. 시장경제가 발전하고 확장되면서 우리는 더 많은 재화와 서비스에 손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시장은 전통적으로 거래의 대상이 아니었던 영역으로도 침투하기 시작했다. 미국에서는 돈을 받고 수감 생활의 편의를 높이거나, 심지어 타인의 죄를 대신하여 형을 살기 위한 거래가 벌어지기도 했다. 이는 시장 논리가 본래 침범해서는 안 될 도덕적 영역까지 파고든 사례다.
이러한 현상은 마이클 샌델이 말한 도덕적 부패의 전형적 예시이다. 샌델은 시장이 도덕적 가치를 훼손하는 두 가지 주요한 방식으로 '공정성'과 '부패'를 제시한다. 공정성은 모든 사람이 동등한 조건에서 기회를 갖고 경쟁하는 것을 의미하며, 부패는 특정 가치가 본래의 의미를 상실하고 시장 거래로 인해 왜곡되거나 오염되는 것을 뜻한다. 예를 들어, 학교의 입학 자격을 돈으로 살 수 있게 되면 교육이라는 공공의 가치가 부패하게 된다. 시장에서의 교환이 단지 금전적 손익을 넘어 도덕적 손상을 야기하는 순간이다. 돈을 매개로 한 거래가 모든 인간 활동으로 확장되는 순간, 사회의 근본적 규범은 무너지기 시작한다. 이는 결국 돈을 지불할 능력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 사이의 간격을 더욱 벌어지게 만들어 불평등을 심화시킨다. 부채의 역사가 보여주듯이, 원래 공동체 내에서 서로를 돕고 의지하던 사회적 관계는 경제적 이해관계를 중심으로 재편되었고, 그 결과 인간 존엄과 도덕적 책임감은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시장이 모든 것을 거래 대상으로 삼는 시대에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은 명확하다. 돈으로 거래될 수 있는 것과 거래되어서는 안 되는 것은 무엇인가? 효율성이라는 공리주의적 기준으로 모든 가치를 가격논리로 판단하는 게 과연 옳은 것일까? 지금부터 우리 삶에 깊숙이 침투한 시장논리가 도덕적 규범을 어떻게 재화로 만들었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시장이 지닌 매력 중 하나는 스스로 만족하는 선택에
판단을 내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본문 中
새치기
샌델은 시장이 도덕을 침식시키는 방식 중 하나로 ‘공정성의 훼손’을 꼽는다. 공정성은 단지 형식적인 규칙 준수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모두가 동등한 조건에서 출발해 경쟁하고, 기회를 얻을 수 있어야 한다는 사회적 신뢰의 기반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일상에서 공정성이 무너지는 수많은 사례를 마주한다. 돈을 더 지불한 사람이 줄을 서지 않고 먼저 입장할 수 있는 놀이공원 우선권, 비즈니스석 탑승객이 보안 검색과 출입국 심사에서 줄을 건너뛰는 모습은 '돈으로 새치기'하는 행위의 전형이다. 문제는 단지 돈이 편의를 살 수 있다는 사실에 있지 않다. 그것이 반복될 때, 우리 사회의 도덕적 감각은 무뎌지고 공정함에 대한 기대는 사라진다. 누군가는 시간과 인내로 감당하는 고통을, 다른 누군가는 돈으로 덜어낼 수 있다면, 우리는 여전히 ‘같은 시민’으로 평가받을 수 있을까? 이런 상황이 반복될수록, 사회적 규범은 약화되고 계층 간의 신뢰는 무너진다. 누군가의 시간은 거래 가능하고, 다른 누군가의 권리는 돈으로 잠식된다.
샌델은 또 다른 개념인 ‘부패’로 이러한 현상을 설명한다. 부패란 단순히 금품수수나 비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가치가 그 본래의 맥락을 잃고 타락하는 과정을 뜻한다. 예컨대, 병원 응급실 대기 순서나 장기 기증 우선권 같은 문제에 돈이 개입되면, 본래 생명과 존엄이라는 가치로 작동하던 질서가 상업적 논리로 재편된다. ‘기다림’과 ‘필요’가 아닌 ‘지불 능력’이 기준이 되는 순간, 그 제도는 부패한다. 새치기는 단순한 줄 서기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사회가 무엇을 가치 있게 여기는지, 어떤 질서를 도덕적으로 정당화하는지를 드러내는 거울이다. 돈으로 줄을 건너뛸 수 있다면, 줄을 서는 행위 자체가 무의미해진다. 과거에는 거래되지 않던 가치들이 점점 더 시장에 노출되고 있다. 그리고 그곳에는 지불능력에 따라 순서를 사고팔 수 있는 ‘새치기’가 있다.
인센티브
인센티브는 사람의 행동을 바꾸는 매우 강력한 도구다. 시장은 이를 잘 알고 있다. 돈이라는 외부 유인을 통해 사람들의 선택을 유도하고, 기대하는 방향으로 행동을 조정한다. 이는 경제학의 오래된 전제이기도 하다. 벌금은 잘못된 행동을 억제하고, 보상은 목표 달성을 자극한다. 이처럼 인센티브는 작동한다. 문제는 그것이 작동하지 않는다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너무 잘 작동하기 때문에, 우리가 무엇을 희생하고 있는지를 성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데 있다. 샌델은 돈이 개입되는 순간, 사람들은 행동의 이유를 바꾸게 된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학교에서 독서를 한 학생들에게 돈을 주는 행위를 통해 문해력과 학업성취도를 향상하고자 하는 제도는 아이들을 독서의 기쁨이나 사고의 확장, 혹은 학습의 즐거움이 아니라 ‘돈을 받기 위해’ 책을 읽게 만들 수 있다. 이 제도는 학업의 향상이라는 목적을 효과적으로 달성시킬지 모르나, 그 과정에서 독서라는 행위가 가진 내적 의미는 사라진다. 금전적 보상이 ‘동기’를 대체하고, 규범은 ‘가격’으로 환산된다.
사실 독서에 대해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것은 어쩌면 도덕적으로 비난받을 일이 아니며 효율적인 교육정책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공공영역에서 인센티브가 동기를 대체하기 시작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헌혈을 하면 상품권을 주거나, 시민의식 함양을 위해 투표에 보상을 걸거나, 범죄 예방을 위해 신고 포상금을 확대하는 정책은 단기적으로 효과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습관화될 경우, 사람들은 더 이상 ‘공익’이나 ‘의무’라는 감정에서 행동하지 않게 된다. 이때 인센티브는 사회적 규범을 약화시키는 구조가 되고 만다. 도덕적 판단은 점차 시장적 계산으로 치환된다. 시장 논리의 문제는, 그것이 무엇이든 가격을 붙이면 행동이 바뀐다는 점이 아니라, 가격이 붙는 순간 어떤 것들은 이전과 전혀 다른 것이 되어버린다는 점이다. 아이가 부모에게 감사 인사를 할 때, 그 인사가 건당 1만 원의 '노동'으로 대체된다면, 그건 더 이상 감사의 표현이 아니다. ‘돈으로 대체 가능한 가치’는 때로 ‘가치를 없애는 힘’이 되기도 한다.
우리는 시장이 인센티브를 통해 사람들의 행동을 바꾸는 데 익숙하다. 하지만 그에 따른 부작용, 특히 도덕적 규범과 공동체 의식의 손실을 직시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점점 더 시장화된 인간으로, 시장화된 사회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시장은 어떻게 도덕을 밀어내는가
시장 논리는 그 자체로 강력한 세계관이다. 인간은 이성적으로 이익을 추구하는 존재이며, 모든 선택은 손익 계산의 결과라는 가정. 이 단순하면서도 효율적인 구조는 사회의 많은 영역에 스며들었다. 그러나 이 논리가 도덕을 밀어내는 순간, 사회는 단순한 거래의 집합으로 전락하게 된다. 신뢰, 책임, 연대와 같은 도덕적 감정은 거래비용으로 환산되고, 윤리적 판단은 '시장 실패'나 '비효율'로 치부된다.
이런 흐름은 부채의 역사와도 깊이 맞닿아 있다. 원래 부채는 공동체 내부의 신뢰와 약속을 기반으로 작동했다. 사정이 어려운 이웃에게 자원을 빌려주는 행위는 도덕적 공동체를 구성하는 핵심이었다. 하지만 화폐가 도입되고 시장이 확대되면서, 부채는 계약으로 바뀌었고, 신뢰는 담보로 대체되었다. 인간은 이제 서로를 채권자와 채무자로 인식하게 되었다. 관계는 거래로, 연대는 가격으로, 도덕은 이자율로 환산된 것이다. 현대의 금융 시스템은 이를 더욱 가속화한다. 신용 점수는 사람의 성실성과 도덕적 평판을 수치화하고, 보험료는 생애 위험을 숫자로 환산하며, 사람의 미래를 담보로 한 대출은 개인의 삶을 시장 안에서 평가한다. 사회적 책임은 자선이 아니라 세제 혜택의 문제로, 타인에 대한 배려는 투자 수익률의 문제로 재정의된다. 이처럼 시장은 기존의 도덕적 언어를 끌어들여, 그것을 자신의 논리로 흡수하고 변형시킨다.
샌델은 '우리가 어떤 사회를 원하는지 스스로 묻지 않으면, 시장은 그 질문을 대신할 것'이라 경고한다. 도덕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를 구성하는 기본 규범이다. 그러나 시장은 그 규범조차 가격으로 대체하려 든다. 사회적 가치를 계산 가능한 경제적 수단으로 바꾸는 순간, 도덕은 설 자리를 잃는다. 시장에 침식된 도덕은 다시 회복되기 어렵다. 왜냐하면 손익을 기준으로 사고하는 습관은, 규범을 지킬 때조차 '그게 나한테 이익이 되기 때문'이라는 계산을 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도덕은 거래의 대안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시장 너머에서 서로를 바라볼 수 있는 유일한 틀이다.
삶과 죽음의 시장
시장 논리가 도덕을 침식하는 가장 극단적인 사례는 삶과 죽음, 즉 인간 존재 자체가 거래 대상이 되는 순간이다. 생명보험은 애초에 유족의 생계를 보호하기 위한 장치였다. 그러나 금융공학이 이 영역을 건드리면서, 죽음은 더 이상 사적인 고통이 아닌 수익의 기회가 되었다. 사람의 생명이 채권으로 유동화되고, 타인의 죽음을 기다리는 것이 투자 전략이 되는 세계가 도래한 것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말기환금(viatical settlements)이다. 이는 중병에 걸려 사망이 임박한 환자가 자신의 생명보험을 제3자에게 할인된 가격으로 파는 구조다. 환자는 치료비나 생활비를 마련하고, 구매자는 환자가 사망하면 보험금을 받는다. 이 구조는 환자에게 필요한 자금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효율적인 제도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거래의 본질은 한 사람의 죽음을 다른 사람의 수익으로 만드는 계약이다. 더 빨리 죽을수록 투자자는 더 큰 수익을 얻는다.
여기서 파생된 것이 사망 채권(death bonds)이다. 여러 말기환자의 생명보험을 묶어 금융상품으로 만든 구조로, 수익률은 사망 시점에 따라 결정된다. 채권을 보유한 투자자는 기초자산이 ‘빨리 사망’할수록 이득을 본다. 이것은 인간의 죽음이 투자 수익률의 변수가 된다는 점에서 윤리적 한계를 정면으로 위반한다. 사망은 이제 예측 가능한 리스크가 아니라 수익의 근거가 되었다.
또 다른 형태는 제3자 소유 생명보험(STOLI, Stranger-Owned Life Insurance)이다. 보험 가입자와 무관한 제3자가 생명보험을 개설하고 보험금을 수령하는 구조다. 이는 타인의 삶을 도박의 대상으로 삼는 구조이며, 실제 미국에서는 고령층을 대상으로 한 STOLI가 논란이 되어 법적 제재가 가해지기도 했다. 생명보험이 ‘보호’가 아닌 ‘투자’로 전환되는 이 구조는, 금융 자본주의가 생명을 얼마나 철저히 대상화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 사례다.
한국에서도 유사한 논의가 있다. 일부 고령층이 보험설계사와 공모해 생명보험을 개설한 뒤 수익을 약속받는 구조는 윤리적 회색지대를 만든다. 형식적으로는 합법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죽음을 수익의 조건으로 설정하는 구조다. 이익을 위해 타인의 죽음을 ‘기대’하게 되는 관계는 더 이상 윤리의 영역이 아니다. 죽음을 거래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은, 인간의 존엄성이 무너졌다는 뜻이다. 인간은 자신이 언제 죽을지 예측할 수 없지만, 그 죽음이 수익의 근거가 되는 순간 우리는 죽음조차도 통제의 대상이자 상품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죽음을 기다리는 자와 죽음을 기다리게 되는 자 사이에 형성된 이 비대칭적 관계는, 시장이 인간 존재의 본질을 얼마나 왜곡할 수 있는지를 드러낸다.
명명권
이름은 단지 구분의 수단이 아니다. 이름에는 정체성과 의미, 기억이 담긴다. 그래서 우리는 공공기관, 학교, 병원, 도서관, 경기장 같은 공간의 명칭에 사회적 가치를 부여한다. 그러나 시장은 이조차도 거래의 대상으로 만든다. 공공시설의 이름을 민간 기업이 사들이고, 기업의 로고가 도시 경관과 공공 공간에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풍경은 이제 낯설지 않다. 명명권(naming rights)은 원래 스포츠 마케팅의 일환으로 시작됐다. 미국에서는 이 흐름이 매우 뚜렷하다. 뉴욕 브루클린에 위치한 대형 공연장 ‘바클레이스 센터(Barclays Center)’는 영국계 은행 바클레이스가 20년간 2억 달러를 지불해 이름을 붙였다. 휴스턴의 야구장 ‘미닛메이드 파크(Minute Maid Park)’는 원래 ‘애스트로돔’이라 불렸지만, 음료 브랜드가 명명권을 사들이며 새로운 이름으로 대체됐다. 전통적 지역 명칭과 공동체 정체성을 담고 있던 공간이 이제 기업의 브랜드로 대표된다.
이러한 흐름은 점차 공공성과 관련된 다른 영역으로 확대되었다. 대학의 도서관, 병원의 병동, 심지어 연구소나 학교 건물의 이름까지도 특정 기업이나 개인의 명의로 지정되기 시작했다. 명칭은 브랜드가 되고, 기억은 광고가 된다. 문제는 이름이 거래되는 순간, 그것이 대표하는 의미 역시 변화한다는 데 있다. ‘시립 도서관’이 ‘○○기업 정보센터’로 바뀌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모두의 공간이 아니다. 공동체의 자산이 시장의 소유로 편입된다. 공공의 영역이 점차 민영화되고, 사회는 점점 더 사적 이익에 의해 정의된다.
샌델은 공공성이 사라지는 구조를 ‘은밀한 부패’라고 지적한다. 돈이 이름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이름을 통해 사회적 기억과 상징이 바뀌는 것이다. 그리고 그 변화는 거의 저항 없이 받아들여진다. 우리 아이들은 더 이상 ‘공공의 이름’을 배우지 못한다. 그 대신 기업의 로고와 제품명으로 도배된 공간에서 자란다. 물론 명명권은 재정난을 겪는 공공기관에 필요한 수단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반복될수록, 우리는 점점 더 어떤 것이 ‘사적 소유’인지, 어떤 것이 ‘공공의 가치’인지 구분하지 못하게 된다. 이름이 돈의 소유가 될 때, 공간의 정체성도 함께 팔리는 셈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돈이 단순한 교환의 수단이 아니라, 우리 삶의 질서 그 자체가 되어버린 시대를 들여다보았다. 인플레이션은 조용한 약탈이며, 정부는 화폐의 가치를 은밀히 조정하고, 자산은 새로운 불평등을 만들어냈다. 일부는 부를 축적하고, 다수는 더 깊은 부채의 수렁에 빠져든다. 돈은 우리의 감정, 행동, 심리마저 움직이는 힘이 되었고, 부채는 인간관계를 신뢰에서 계산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는 시장이 도덕을 밀어내고, 삶과 죽음, 이름과 명예마저도 가격을 매겨 거래하는 세계에 도달했다. 시장은 모든 것을 효율과 선택의 문제로 재편하며, 도덕은 점점 뒷전으로 밀려난다. 그러나 인간의 존엄과 공동체의 신뢰, 사회적 규범은 그렇게 쉽게 환산되거나 대체될 수 없다.
‘빚의 시대’란 단순히 채무가 늘어난 시대가 아니라, 시장의 논리가 인간 삶의 모든 영역에 침투해 도덕적 기준마저 시장 가격으로 바꾸어버린 시대다. 이 연재의 목적은 바로 그 정체를 밝히는 데 있었다. 우리는 다시 물어야 한다. 무엇을 거래할 수 있고, 무엇은 거래해서는 안 되는가? 돈으로 설명할 수 없는 가치를 어떻게 회복할 수 있을까? 경제적 효율성이 인간사회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을까? 물론 경제적 접근이 인간 사회를 풍요롭게 만들기도 하지만, 때로는 채권·채무 관계가 아닌 도덕적 규범의 시선으로 사회를 바라볼 필요가 있다.
현대 정치는 도적적 논쟁이 지나치게 많아서가 아니라 지나치게 적어서 문제다
본문 中
참고도서 :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지은이 : 마이클 샌델, 출판: 와이즈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