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 없는 경제, 부채로 연결된 사람들
월가를 점령하라(Occupy Wall Street)
2011년 9월 17일, 세계 금융의 심장부 월스트리트에서는 상위 1%에게 집중된 경제적 불평등을 규탄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무엇이 이토록 많은 사람들을 거리로 이끌었을까? 2008년 9월, 리먼 브라더스의 파산으로 시작된 글로벌 금융위기는 교과서에서는 각국 정부의 신속한 구제금융과 중앙은행의 양적완화로 정리된다. 그러나 이 구제금융이 누구를 위한 것이었는지는 다시 물어야 한다. 실제로는 파산 위기에 처했던 AIG 등 대형 금융기관들만이 구제의 혜택을 받았고, 가장 절실히 도움이 필요했던 시민들과 중산층은 위기의 부담을 더 크게 짊어져야 했다.
이 운동의 중심에서 주목을 받은 인물이 데이비드 그레이버였다. 미국의 대표적인 인류학자이자 아나키스트인 그는, 현대 금융 시스템이 양산한 부채 문제를 날카롭게 비판하며 이 운동에 참여했다. 그레이버는 금융위기에서의 손실은 사회 전체가 떠안고, 반면 그 혜택은 소수 금융기관이 독점하는 왜곡된 구조를 지적했다. 그리고 그는 '돈이 있기 전에 부채가 먼저 존재했다'라고 주장했다. 이 도발적인 발언은 우리가 너무나 당연하게 여겨온 경제의 역사를 완전히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게 만든다. 물론 그의 주장이 모든 역사적 진실을 담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부채'라는 개념을 더 깊이 이해하도록 자극하는 통찰임은 분명하다.
돈이 아닌 채무
'빌린 돈을 갚지 않는 것은 신뢰를 저버리는 행위이다.' 이 말은 탈무드에 나오는 유명한 격언이다. 우리는 돈이 오가는 상황에서 이러한 윤리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그러나 채무는 반드시 화폐의 형태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전쟁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과도하게 부과된 세금, 혹은 강제적인 노동력 착취는 직접적인 금전 차용이 아님에도 사람들의 삶과 자유를 억압하는 부채였다. 돈으로 빌리지 않은 채무는 명시적인 원금이나 이자가 없지만, 그 보이지 않는 짐은 때때로 더 무겁게 개인에게 드리워졌다.
역사적으로 보더라도 화폐가 등장하기 훨씬 이전부터 채무의 흔적은 존재했다. 고대 수메르의 점토판에는 이미 부채 거래와 관련된 기록이 등장한다. 원시 공동체는 빚과 채무를 통해 서로 얽히며 사회적 질서를 유지했다. 중세의 봉건사회에서는 영주가 농노에게 부과한 의무적 노동과 공납이 일종의 부채 역할을 했다. 그것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채무였다. 결국, 돈을 빌리고 이자를 받는 금융적 행위는 부채의 한 형태에 불과하다. 진정한 의미의 부채는 사회적 위계질서를 형성하고 권력관계를 규정짓는 정치적 수단이었으며, 때로는 국가 권력의 기반이 되기도 했다. 경제적 의미를 넘어선 '채무'는 인간 사회의 권력 구조와 위계를 이해하는 데 핵심적인 단서다.
동등한 거래라는 신화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에서는 시장을 균형 상태로 이끄는 것이 '보이지 않는 손'이라고 설명한다. 오늘날 경제학에서는 이 개념을 가격 메커니즘으로 해석한다. 그는 인류 최초의 거래 형태를 물물교환이라고 가정하고, 교환을 편리하게 만들기 위해 자연스럽게 화폐가 발명되었다고 서술한다. 이 논리에서 화폐가 가진 가장 큰 기능은 가치를 명확히 표현하는 것이었다. 숫자로 표현된 가치는 공권력의 집행이나 상업 거래에서 객관성을 보장하는 척도로 사용됐다. 하지만 우리가 앞서 살펴봤듯이, 역사적으로 화폐의 형태가 반드시 금속이나 규격화된 물질로 한정되지는 않았다. 최초의 문자가 기록된 수메르의 점토판을 보면, 기록된 대부분은 거래 내역과 세금 장부 같은 회계 문서였으며, 최초의 회계 단위는 보리나 은같은 일상적인 재화였다. 가축이나 곡물 역시 때로는 가치 척도로 사용됐다는 점을 생각하면, 규격화된 화폐가 없던 고대 사회에서도 나름의 기준에 따라 충분히 거래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그레이버는 국부론에서 사용된 구두 제작자와 빵 굽는 사람의 물물교환 예시에 대해 근본적인 의문을 던진다. 만약 실제로 물물교환이 그렇게 불편하고 비효율적이었다면, 초기 시장이 어떻게 안정적으로 형성되고 유지될 수 있었을까? 그레이버는 물물교환을 경제의 시초로 보는 전통 경제학의 설명이 근본적으로 잘못된 신화에 가깝다고 주장한다. 실제 고대 사회에서는 ‘신용’이라는 보이지 않는 관계망을 통해 거래가 충분히 가능했다. 지금 당장 가진 것이 없더라도 외상으로 물건을 받고, 미래의 어느 시점에 상대방이 필요로 하는 다른 재화로 그 외상을 갚는 식이다. 표면적으로는 시차를 둔 물물교환처럼 보이지만, 본질적으로 거래의 매개체는 명시되지 않은 상호 신뢰와 신용이었으며, 결국 이것이 나중에 화폐라는 표준화된 도구로 전환된 것이었다.
그렇다면 화폐는 왜 등장했을까? 화폐가 발명된 배경에는 단순히 거래의 편의성 때문만이 아니라, 개인이 거래 과정에서 손해 보지 않기 위한 본능적 자기 보호나, 빚을 지는 것 자체에 대한 인간의 본질적 두려움이 자리 잡고 있다고 그는 설명한다. 부채에 대한 이런 해석은 니체의 철학이나 성경, 베다 경전 등 철학적·종교적 전통에 근거하기 때문에 명확한 인류학적 증거는 부족하지만, 적어도 화폐를 통해 거래가 객관적 척도로 가능해졌다는 점만큼은 분명하다.
국가와 시장과의 관계
우리는 흔히 국가와 시장을 서로 독립된 영역으로 간주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국가의 기원을 분업과 협력에서 찾았고, 애덤 스미스 역시 국가의 역할을 시장에 대한 최소한의 개입 수준에서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레이버는 이런 시각이 역사적 현실과는 크게 동떨어져 있다고 지적한다. 역사적으로 국가와 시장은 단 한 번도 완전히 독립적인 영역으로 존재하지 않았으며, 국가는 오히려 시장을 적극적으로 만들고 활용한 주체였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고대 제국에서의 군대와 시장의 관계다. 메소포타미아나 로마제국을 비롯한 고대 국가들은 병사들에게 급여를 화폐 형태로 지급했고, 병사들은 이 화폐로 군대 주둔지 주변의 시장에서 생필품을 구매해야 했다. 국가는 병사에게 지급한 화폐를 세금으로 다시 회수함으로써, 시민들로 하여금 강제로라도 시장에서 거래하도록 유도했다. 즉, 시장은 결코 자연발생적으로 탄생한 자율적인 공간이 아니라 국가의 필요에 의해 인위적으로 설계된 제도적 장치였다는 것이다.
그레이버는 더욱 나아가 국가와 시장의 관계가 경제적 차원을 넘어 정치적 권력관계를 반영한다고 강조한다. 국가가 없었다면 시장이라는 공간 자체가 형성되기 어려웠다는 점은 고대 문헌에서도 잘 드러난다. 실제로 시장은 군대 인근과 세금 징수소 같은 국가적 행정 중심지 주변에서 발전했고, 이는 시장이 국가의 세금 시스템 및 군사체계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음을 시사한다. 결국 시장은 국가의 세금 징수와 군사력 유지를 위해 탄생한 시스템이었으며, 국가와 시장은 서로 촉진하고 필요로 하는 상호의존적 관계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그레이버의 주장은 전통 경제학이 제시하는 국가와 시장 간의 이분법적 구도에 대한 강력한 반론이 된다. 국가는 결코 시장 외부에서 간섭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 시장의 내부에서 적극적으로 경제 활동을 유도하고 관리했던 역사가 존재한다. 국가와 시장의 탄생과 발전은 완전히 독립된 사건이 아니라 상호의존적인 과정이었으며, 결국 국가가 만들어낸 화폐와 세금 시스템이 시장의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존재를 가능하게 했다는 것이다.
호혜성의 한계와 인간경제의 본질
물건을 주고받는 행위는 단순한 교환 이상이며,
주는 자와 받는 자 모두에게 상호적 의무감을 부과한다
마르셀 모스(1872~1950)
선물경제는 본질적으로 호혜성(Reciprocity)이라는 개념을 기초로 작동한다. 호혜성은 쉽게 말해, ‘무엇인가를 받으면 그에 상응하는 무언가를 돌려줘야 한다’는 간단한 원칙을 뜻한다. 선물은 결코 무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받은 사람은 이를 언젠가 반드시 갚아야 할 의무감을 느끼는데 이를 통해 사회가 결속되며 유지된다고 본다. 그러나 그레이버는 호혜성 개념에 대한 지나친 의존이 오히려 인간 경제의 본질을 간과하게 만든다고 비판한다. 인간 사회는 결코 단순히 받은 만큼 돌려주는 경제적 균형을 유지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선물경제에서 중요한 것은 단순한 가치의 교환이 아니라, 관계를 만들고 유지하며 그 속에서 사람 간의 신뢰와 위계를 형성하는 것이다.
선물경제는 호혜성이라는 경제적 균형을 넘어 더 복잡한 사회적, 도덕적 메커니즘으로 발전한다. 선물을 받은 사람은 그것을 갚아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끼며, 이를 통해 상대방과의 관계가 지속된다. 그러나 만약 어떤 이유에서든 그 선물이 되돌아오지 않으면, 인간관계는 순식간에 악화되거나 단절될 수 있다. 이는 단순히 물질적 손실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망의 훼손이며, 도덕적 책임을 회피한 행위로 간주된다. 인간 경제의 본질은 바로 여기에 있다. 선물은 사람들 간의 도덕적 책임과 의무를 부과하며, 이는 곧 신뢰를 구축하는 사회적 장치가 된다. 하지만 선물경제가 단절되는 순간, 사람들은 더 이상 도덕적 책임의 영역에 머무르지 않고, 상대를 '우리'가 아니라 '남'으로 취급하게 된다. 즉, 선물을 주고받는 행위는 경제적 가치보다 더 높은 차원의 사회적 유대감을 형성하며, 이것이 끊어지면 개인들은 타자로 전락하여 도덕적 책임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즉, 선물경제는 경제적 손익이 아니라 관계의 지속성과 명예의 유지라는 인간 경제의 핵심 원리를 드러낸다. 인간은 결코 손익만을 따지는 합리적 경제주체가 아니며, 경제적 행위는 언제나 사회적 관계의 연장이다. 그레이버가 강조하는 것은 호혜성의 단순한 경제 논리 너머에 존재하는 사회적 도덕과 정치적 위계라는 인간 경제의 본질이다.
인간을 돈으로 환산할 때: 부채, 통제, 폭력의 등장
화폐가 발명되기 이전에도 사회 구성원끼리 합의하여 서로 주고받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사회적 통화 역할을 수행했다. 사회적 통화란 선물경제 내에서 상대방으로 하여금 도덕적 의무감을 느끼게 하는 그 무엇인가였다. 아프리카의 렐레족과 티브족에 대한 인류학적 연구는 이를 잘 보여준다. 이들 사회에서는 ‘후견인과 피후견인’ 관계를 통해 사회적 부채가 형성됐다. 후견인은 피후견인에게 경제적 자원을 제공하고, 피후견인은 후견인에게 존경과 복종을 바치는 관계였다. 하지만 이 관계에서 인간은 결코 경제적 재화와 동일한 가치로 간주되지 않았다. 피후견인은 경제적 이익을 가져다주는 존재가 아니라 후견인의 사회적 지위를 높여주는 역할을 수행했다. 따라서 이러한 사회적 부채 관계는 인간을 상품화하거나 경제적 등가물로 전락시키지 않는 엄격한 윤리적 한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유럽식 시장경제가 전 세계로 확산되면서 이러한 윤리적 한계는 급격히 무너졌다. 유럽에서 부채는 더 이상 도덕적 관계를 지속시키는 사회적 도구가 아니라, 엄격한 경제적 계산과 이윤 추구의 대상으로 변질되었다. 인간은 돈과 완벽히 환산 가능한 경제적 단위로 평가받기 시작했고, 채무를 갚지 못한 사람들은 채권자의 권리에 의해 자유를 박탈당하는 상황에 처했다. 이 과정에서 등장한 것이 바로 노예제도였다. 노예제도는 인간을 경제적 채무의 담보물로 간주하는 극단적인 형태로, 인간의 몸과 노동력을 재화와 동등한 수준으로 취급하는 관념이 뿌리내리면서 가능해졌다. 그레이버는 이러한 변화가 단순한 경제적 논리의 변화가 아니라 사회적 가치관과 윤리의 근본적인 전환이라고 주장한다. 부채가 사회적 관계를 지속시키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폭력과 억압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변질된 것이다. 돈이라는 명확한 등가물은 인간을 포함한 모든 가치를 동일선상에 놓을 수 있는 도구였고, 그 결과 부채는 인간을 지배하는 가장 강력한 사회적 장치로 진화했다. 부채를 갚지 못한 사람들은 더 이상 명예를 잃는 정도가 아니라, 자유를 박탈당하거나 심지어 생명의 위협을 받기도 했다.
노예제도의 등장은 부채가 더 이상 도덕적 책임과 명예를 기반으로 한 사회적 관계가 아니라, 냉정한 경제적 계산에 따른 폭력적 구조로 발전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채권자는 채무자의 생명과 자유를 완전히 통제할 수 있는 위치에 놓였고, 이로 인해 사회 전체가 점점 폭력적으로 변하게 되었다. 부채가 인간 사회를 결속하는 사회적 통화에서 벗어나, 인간을 돈으로 평가하는 순간, 부채는 인간을 억압하고 폭력적으로 지배하는 도구로 변했다. 부채가 폭력과 억압의 수단으로 작동하는 순간, 우리는 다시 근본적인 질문과 마주한다. 부채는 반드시 갚아야 하는 절대적인 의무인가, 아니면 다른 질서를 상상할 수 있을까? 다음 장에서는 이 질문을 기점으로 부채라는 렌즈를 통해 인류의 역사를 다시 바라보고, 우리가 당연하게 여겨온 경제사의 구조를 인류학적 관점으로 재검토해보고자 한다.
참고도서 : 부채, 첫 5,000년의 역사, 지은이 : 데이비드 그레이버, 출판: 부글북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