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속화폐와 신용화폐의 순환의 역사
부채의 시작: 인간의 자유가 담보물이 되었던 시대
고대 사회에서 부채는 단순한 경제적 채무가 아니라 인간의 자유와 명예를 규정하는 핵심적인 질서였다. 가장 오래된 부채 기록 중 하나인 기원전 2400년경 수메르 점토판에 따르면, 채무를 갚지 못한 가장이 아내와 자식을 담보로 내놓았다. 이는 고대 사회에서 인간의 신체와 가족이 부채 때문에 직접 거래 가능한 담보물이었음을 명확히 드러낸다.
고대 그리스에서도 부채는 시민의 명예와 자유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기원전 6세기 아테네에서는 빚을 갚지 못한 시민들이 노예로 전락하는 일이 흔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당대 철학자들은 돈과 인간의 관계를 비판적으로 바라봤다. 플라톤(기원전 428 또는 427)은 『국가』에서 부의 추구를 정신의 타락으로 규정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현실은 철학과 달랐다. 아테네 시민들은 돈을 통해 정치적 영향력을 평가받았고, 부채는 사회적 위계와 인간의 존엄성을 측정하는 기준이 되었다. 고대국가는 인간의 자유라는 가치에 가격표를 붙이고, 이를 부채라는 형태로 제도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로마에 이르러 이러한 경향은 더욱 제도화된다. 기원전 326년, 로마는 채무자가 자신의 부채를 갚기 위해 채권자에게 인신 구속을 당하고 노동으로 그 채무를 갚는 ‘넥숨(nexum)’이라는 제도를 공식적으로 도입했다. 빚을 갚지 못한 자유민은 채권자의 소유로 전환되었다. 당시 로마 사회는 물질 중심의 사회로 변화하고 있었다. 특히 잦은 전쟁과 불안정한 정치 상황에서는 신용보다 즉각적이고 명확한 금속 화폐가 거래의 기준이 되었다. 신뢰와 관계를 기반으로 한 전통적 선물경제는 빠른 속도의 폭력적 환경에서 작동하기 어려웠다. 결국 로마 사회에서 인간은 관계를 맺는 존재가 아니라 거래 가능한 상품으로서 가격표를 부착받게 되었다.
부채의 주기적 탕감과 사회 질서
고대 사회에서 부채는 인간의 명예와 자유를 억압하는 도구였지만, 동시에 국가가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정치적 장치이기도 했다. 부채가 누적되면 사회적 갈등과 붕괴가 발생할 수 있었기 때문에, 고대 왕들은 주기적으로 부채를 탕감했다. 이는 단순히 왕의 자비가 아니라 공동체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전략이었는데, 부채가 쌓여 채무노예가 늘어남에 따라 발생할 수 있는 사회문제를 사전에 방지하기 위한 목적이 있었다.
기원전 2350년경 메소포타미아 라가시 왕국의 우루이님기나 왕은 역사상 최초의 부채 탕감령을 선포했다. 그는 모든 채무를 탕감하고, 채무로 인해 노예가 된 이들의 자유를 회복시켰다. 이는 왕이 공동체의 자유와 질서를 회복하는 존재로 자리 잡기 위한 정치적 행위였다. 유사한 사례는 이집트에서도 발견된다. 기원전 720~715년경 이집트의 파라오 바켄레네프는 빚으로 인해 토지와 자유를 잃은 농민들에게 부채 탕감령을 내려 사회적 혼란을 예방했다. 바켄레네프의 탕감령 역시 자비보다는 공동체 유지와 왕권의 지지 기반을 확보하는 정치적 전략이었다.
물론, 고대사회에서도 주화가 존재했다. 그러나 당시의 주화는 거래를 위한 지불수단이 아니라 회계적 기록의 도구로 주로 사용되었다. 메소포타미아의 점토판에는 은이나 곡물 등으로 표시된 신용 거래가 훨씬 더 빈번히 기록되었다. 고대 사회의 경제는 상품경제와 선물경제의 원리가 혼재된 독특한 경제 구조였다. 특정 시장에서는 금속 주화를 통해 거래했지만, 대부분의 일상적인 거래는 여전히 관계와 신뢰를 기반으로 한 외상과 신용으로 이루어졌다.
결국 고대 사회의 부채 탕감은 사회적 파국을 막기 위한 필수적인 정치적 전략이었다. 주기적 부채 탕감을 통해 왕은 공동체의 신뢰를 회복하고, 부채가 사회를 해체하는 도구가 아닌 질서를 유지하는 수단으로 작용하도록 조정했다. 부채는 그렇게 고대사회의 억압과 질서를 동시에 지탱하는 구조적 메커니즘이 되었다.
축의시대: 종교와 철학의 탄생 그리고 국가와 주화의 연결고리
독일 철학자 칼 야스퍼스(Karl Jaspers)는 기원전 800년에서 기원전 200년 사이를 ‘축의 시대(Axial Age)’라 명명했다. 그는 이 시기를 인류 정신사에서 가장 중요한 변곡점으로 평가했다. 실제로 이 시기, 인도와 중국, 중동과 그리스에서는 거의 동시에 종교와 철학이 탄생했다. 하지만 이 사상적 전환의 이면에는 국가가 확대된 전쟁을 치르며 경제적 통제를 강화하고, 부채를 제도화하는 현실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인도의 불교는 고통의 근본 원인으로 집착을 지목했다. 이 집착은 물질적 탐욕, 즉 부채를 비롯한 인간 사회의 모든 욕망과 연결되었다. 따라서 불교는 빚의 고리로부터 벗어나는 길을 해탈의 과정으로 제시했다. 반면 중국의 유교는 빚을 인간관계의 본질로 이해했다. 효(孝)와 충(忠)은 갚아야 할 윤리적 의무였으며, 사회 질서는 이런 부채 관계를 통해 유지되었다.
중동에서는 유대교와 기독교가 등장하며 신과 인간 사이의 부채를 중심에 두었다. 인간은 죄로 신에게 빚을 지고 있으며, 이를 탕감하고 구원을 얻는 것이 삶의 핵심이었다. 그리스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가 경제 행위의 도덕적 경계를 강조했다. 그는 이자 수취를 부정적으로 보았으며, 자연적 필요를 넘는 재산 축적은 사회 정의를 해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현실은 이상과 정반대의 길로 향했다. 축의 시대는 폭력과 전쟁의 시대였다. 국가들은 전쟁을 위한 비용을 주화 발행으로 조달했고, 이는 다시 세금과 부채의 강제 징수로 이어졌다. 국가-주화-부채는 노예제라는 잔혹한 연결고리를 형성했다. 빚을 갚지 못한 사람들은 자유를 잃었고, 노예 신분으로 전락했다. 결국 축의 시대의 숭고한 종교와 철학적 이상은 현실의 폭력과 부채 제도화라는 모순 속에서 흔들렸고, 거대 제국들은 붕괴의 길을 걸었다. 이후 인류는 다시 소규모 공동체로 재편되며 새로운 사회 질서를 모색하게 되었다.
중세시대: 부채와 이자의 도덕적 관계
너희가 너희 가운데서 가난하게 사는 나의 백성에게 돈을 꾸어 주었으면, 너희는 그에게 빚쟁이처럼 재촉해서도 안 되고, 이자를 받아도 안 된다
출애굽기 22장 25절
축의 시대 이후, 세계는 거대 국가 대신 작은 공동체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중세는 주화 경제가 약화되고, 대신 신뢰를 기반으로 한 신용경제가 발전한 시기였다. 주화에서 신용으로 경제시스템이 옮겨가며, 중세인들은 금융을 추상적으로 사고할 수 있게 되었는데, 그레이버는 중세를 '금융의 추상성이 확장됐으나, 이자에 대한 도덕적 긴장이 극도로 고조된 시대'라고 규정한다.
이슬람 세계는 신용경제를 적극적으로 구축했다. 이슬람 상법(Shariah)은 상업 활동을 장려하면서도, 이자를 엄격히 금지했다. 이자는 인간관계를 부패시키는 죄로 여겨졌으며, 상업 활동 역시 공동체의 도덕적 가치를 따라야 했다. 환어음을 사용한 신용 거래는 상업을 촉진했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신뢰와 공동체 윤리를 기반으로 이루어져야 했다.
중국 명나라 역시 초기에 보초(寶鈔)라는 국가 신용화폐를 통해 금융의 추상화를 실험했다. 하지만 정부의 과잉 발행으로 인해 이 신용화폐는 신뢰를 잃었고, 결국 명나라는 은 중심의 실물 경제로 돌아갔다. 은은 단기적으로 상업을 번창시켰지만, 사회를 경직시키고 공동체적 신뢰를 붕괴시키는 부작용을 낳았다. 은을 소유한 소수가 경제적 권력을 독점했고, 이는 부채 구조의 악화를 초래했다.
유럽은 중세에 가장 늦게 진입한 지역이었다. 중세 초기 유럽의 경제는 주화가 아닌 신용과 선물경제에 의존했다. 수도원과 교회는 금속 자산을 축적하면서도, 공동체적 신뢰 유지자로 기능했다. 하지만 교회는 이자 수취를 죄악으로 규정했고, 부채는 개인의 영혼과 구원을 위협하는 요소로 간주되었다. 경제적 신용은 확장됐지만, 이자와 부채에 대한 도덕적 인식은 더욱 엄격히 유지되었다.
결국 중세는 금융적 추상화와 신용 경제의 확장에도 불구하고, 이자와 부채를 죄악으로 여기는 윤리적 긴장을 유지한 시대였다. 이슬람, 중국, 유럽 모두 부채가 가진 위험성을 인지했고, 이를 도덕적·종교적 규범 안에서 엄격히 관리했다. 중세는 화폐 경제가 아니라, 신뢰와 윤리적 규범이 공존하는 긴장 속에서 부채의 도덕적 의미를 철저히 고민한 시대였다.
근대사회: 끝없는 부채의 늪과 제국주의
근대사회의 시작은 '은의 시대'였다. 16세기 유럽은 아메리카로부터 약탈한 은을 바탕으로 세계경제를 장악했다. 은은 동아시아와의 교역을 통해 유럽과 세계를 연결했고, 진정한 의미에서 인류 최초의 '글로벌 경제'가 형성되었다. 그러나 유럽의 은 약탈과 교역의 배경은 철저히 폭력적이고 약탈적인 것이었다. 유럽은 아메리카 원주민을 착취하고, 아프리카에서 노예를 공급받아 부를 축적했으며, 은과 금은 이 과정에서 형성된 끝없는 부채 구조의 기초가 되었다.
근대 초기, 특히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와 같은 ‘법인(주식회사)’ 형태의 경제 조직은 이 약탈적 부채 구조를 더욱 심화시켰다. 법인은 개인의 도덕적 책임과 별개로 부채를 무한히 축적할 수 있는 제도적 틀이었다. 여기에 중세의 윤리적 제약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이자 수취는 더 이상 단순한 위험 보상이 아니라 경제 활동의 목적 그 자체가 되었다. 데이비드 그레이버가 지적한 것처럼, 중세의 이자는 상업 활동의 위험을 보상하는 정도였지만, 근대에 들어서면서 이자는 윤리적 정당성을 상실하고 단순한 이익추구의 수단으로 변질되었다.
이 과정에서 자본주의는 끊임없이 팽창하고 성장해야 하는 구조를 가지게 되었다. 자본주의 경제의 동력은 빚과 이자를 중심으로 한 부채 구조였으며, 부채가 확대될수록 이를 상환하기 위해 더욱 공격적인 식민지 확장과 군사적 약탈이 요구되었다. 자본주의의 본질은 이제 무한한 부채와 무한한 성장이 되었다. 근대 자본주의는 단순히 시장경제가 아니라, 폭력적이고 군사적인 제국주의와 불가분의 관계로 얽혀 있었다. 이러한 구조는 19세기 유럽 열강의 제국주의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자본주의 경제의 확장과 식민지 약탈은 서로를 촉진하며, 끝없는 부채의 늪을 형성했다. 그레이버가 강조하듯, 이 시기의 자본주의는 근본적으로 부채를 무기로 한 제국주의적 착취의 형태로 발전했다.
1971년 이후: 채권자 중심의 신용사회
1971년 닉슨 대통령의 달러의 금태환 종료 선언 이후 달러는 오로지 미국 연방준비제도의 신용, 정확히는 미국 국채에 대한 국제적 신뢰에 기반한 순수한 '신용화폐'로 전환되었다. 이제 세계 경제는 금이나 은 같은 실물 화폐가 아니라, 국가 권력과 정치적·군사적 힘으로 유지되는 신용에 의존하게 되었다. 앞서 살펴보았듯 신용화폐 체제 자체는 인류 역사상 처음은 아니었다. 고대사회에서는 이미 신용을 바탕으로 한 거래가 주를 이뤘으며, 중세시대에서는 이슬람 상업 체계에서 사용된 환어음과 중국 명나라에서 국가신용을 바탕으로 한 보초가 사용되었다. 그러나 현대 신용사회가 과거와 다른 점은 과거의 신용체계는 대체로 채무자의 권리를 보호하고, 공동체의 신뢰와 상호 부조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반면, 현대의 신용사회는 명백히 채권자의 권리를 보호하고 우선시하는 구조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채권자 중심의 금융체제는 구조적으로 불안정성을 내포하고 있다. 금융위기와 경기 불황이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근래의 경제사는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역사적인 사례로 볼 수 있다. 경제 위기가 닥칠 때마다 채권자를 보호하기 위해 국가와 중앙은행은 신용 공급을 확대했고, 이는 무한한 부채의 확장으로 이어졌다. 신용을 통해 부채를 끊임없이 재생산하는 경제는 구조적으로 위기를 내포하고 있었으며, 1970년대 오일쇼크,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등 반복적인 위기가 바로 이 체제의 결과였다.
또 하나의 중요한 변화는 신용사회의 유지 방식이었다. 역사적으로 군사력은 실물 주화와 연결되어 있었지만, 현대사회에서는 신용화폐가 군사력과 결합하여 전 지구적으로 유지되었다. 그레이버는 미국 달러의 지배적 위치는 단순한 경제력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압도적인 군사적 패권에 의존하고 있다고 서술하며, 현대 신용사회를 '군사력으로 뒷받침된 신용화폐 제국주의'라고 명명한다. 신용사회는 군사력과 정치적 패권을 통해 세계를 금융적으로 지배하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1971년 이후의 현대사회는 채무자를 보호하는 전통적인 신용의 개념에서 완전히 벗어나, 채권자 중심의 신용사회로 변모했다. 과거 공동체 내 상호 신뢰에 의존했던 신용은 이제 군사력과 지정학적 패권을 통해 강제되는 구조가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자본주의 역사에서 가장 근본적인 전환이며, 현대 사회가 반복적 금융위기와 부채 문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근본 원인이다.
그레이버는 『부채 첫 5,000년의 역사』마지막에 진정으로 사회가 빚진 것은 우리의 삶이라고 서술했다. 고대사회부터 이어진 돈에 대한 철학적 성찰은 오늘날 우리한테도 중요한 질문으로 다가온다. 마지막 장에서는 돈보다 더 소중한 가치가 무엇인지 성찰하고자 한다.
참고도서 : 부채, 첫 5,000년의 역사, 지은이 : 데이비드 그레이버, 출판: 부글북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