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최고의 옥스포드대학 출판부에서 직원으로서, 내가 그렇게 좋아하던 해리포터와 연관지은 발표자료로 발표한다. 베트남, 태국, 타이완, 한국 영어 강사 수백 명 대상으로 1시간 넘게 발표하니 행복해서 영국까지 날아가야 할 판이었다.
옥스포드대학 출판부 공홈 메인화면에 내가!
그런데 머릿속엔 자꾸 다른 생각만 하고 다른 데 갈 생각만 했다. 나는 만족을 모르는 불행한 사람인가 자괴감도 들었다. 그 순간 꽉 찬 지하철에서 산소가 부족하다고 느꼈고 눈앞이 깜깜해지며 주르륵 주저앉으려던 찰나, 문이 열리고 바로 보이는 의자에 달려가 드러누웠다. 부족한 건 산소가 아니라 이직할 용기였다. 이 편한, 적응이 된 회사를 박차고 나와 경력을 모두 뒤로하고 새로운 시작을 할 용기.
한 10개월 간 아주 다양한 채용 시장의 문을 두들겼고, 더 이상 해외에 본사를 두고 그들이 하달하는 일만 하는 게 아니라, 한국 기업의 본사에서 일해보고 싶어졌다. 딱 맞는 국내 대기업 자리가 올라와서 지원하였고, 최종 합격을 하게 되었다. (후에 들었는데 대충 300-400대 1로 붙었다고 한다. 내 나이는 30대 초반, 여자 문과, 학사인데! 그동안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아'서 시간 낭비를 한 줄 알았는데 그 경험이 조금 빛을 발한 것 같다.)
이전 직장의 경험 없이 처음부터 여길 왔다면 불만이 더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안다. 어딜 가나 괴로움은 있고 적어도 여기서의 괴로움은 내가 갈증 하던 괴로움이란 것을. 사실은 갖고 싶었던 괴로움이란 것을. 일이 많아 힘들지만 지나고 나면 매일 배우는 게 생기는 내 자리가 좋다. 심장이 쫄리는 순간이 와도 끝엔 달콤한 때가 온다는 것을 안다 (인간관계나 업무과다로 극심한 압박을 받을 땐 자꾸 잊기도 하지만). 어쨌든, 회사생활에서 미래가 보이는지 여부가 나에겐 가장 중요하고, 여기선 나의 앞날이 여러 가지로 그려지니,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은' 나에게는 아직까진 안성맞춤이다.
➡️ 해보고 싶은 직업이 많다면 일단 지원을 해보는 게 좋은 것 같다. 지원했다고 전화해서 욕을 하진 않는다. 지원에는 돈도 안 든다. 안 맞으면 안 뽑겠지. 일단 써보면서 그 회사 홈페이지라도 한 번 들어가 봐야 내가 그 회사랑 맞는지 아닌지 알게 되는 것 같다. (사실 회사생활에선 이게 제일 중요하다. 회사랑 나랑 핏이 맞는지)
5. 기타
지금까지 1~4번에 적은 건 내가 이렇다 할 만큼 경험해 본 것들이다. 이 밖에도 면접만 봤거나 깊게 고민을 했거나, 문턱만 두드려 본 것들도 참 많다: 영어유치원 원장, 인강 강사, 배우, 피아니스트, MICE업, 외무영사직 공무원, 몇몇 공기업, 사기업, 협회, 승무원 등. 고민을 오래 했다고 정답은 아니지만, 누구보다 충분한 고민을 했으니 나의 길에 대한 약간의 자부심은 있다. 흔들려도 되돌아오는 방법을 아는 단단한 마음이 있다.
6. 결론: 회사를 다니되 N잡러가 될 테다.
N잡러라고 이것저것 찍먹 하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 일단 회사를 계속 오래 다닐 것이다. 회사에서 배우는 게 참 많다. 다른 데서 못 배우는 것들이다. (예: 업무 자체 이외에도 보고서 작성, 리서치 능력, 사회생활 스킬, 커뮤니케이션, 멘탈 강화, 돈 주고도 못 사는 소중한 인간관계).
N잡러로 유명한 서메리 작가의 <이상하고 아름다운 나의 N잡 일지>를 두 번 읽었다. 가장 마음에 드는 부분을 발췌해보며 세번째 글을 마무리한다.
"...이처럼 오늘날에는 성공의 경험이 하나의 우물을 또 다른 우물로 이끄는 마중물 역할을 한다. 사업가든, 직장인이든, 전문직이든, 자신의 필드에서 톱클래스에 오른 이들은 숨을 쉬듯 자연스럽게 N잡의 길로 들어선다. 그들은 책을 출간하고 다양한 매체에 출연하고 연단에 선다. 유튜브나 SNS로 지식과 생각을 공유하고, 콘텐츠 반응이 괜찮으면 영향력과 함께 ‘인플루언서’라는 새로운 직업을 덤으로 얻는다."
하나의 우물을 판다. 그렇다. 동시에 여러 개의 우물을 팔 필요는 없다.
하고 싶은 게 이렇게 많아 고민인 내가 내린 결론은 '궤도'다.
하나의 우물이 '궤도'에 오르면 그다음 우물로 넘어가는 것이다. '궤도'에 한 번 올라갔다는 것은, 내 삶의 루틴이 되었고, 루틴이 되면 큰 생각 없이 실행에 옮길 수 있다. 내가 좋아하는 '우물'이라면, 오랜 시간을 들이지 않고 궤도에 올라가서 작동하고 있는 우물을 돌려주기만 하면 된다.
"...한번 물꼬가 트이자, 각 우물에서 나온 파이프라인은 예상을 뛰어넘는 속도로 계산하지 못했던 곳까지 뻗어 나갔다. 번역이나 일러스트처럼 기존에 하던 일들이 탄력을 받은 것은 물론이고, 오디오북 성우나 온라인 클래스 강사, 각종 독서 관련 행사의 심사위원까지 내 인생에 찾아오리라고 생각도 못 했던 기회가 생겨났다. 나는 보물 상자를 하나씩 열어가는 게임 캐릭터처럼 새로운 일상에 정신없이 적응해갔다. 어느 하나 신기하지 않은 것이 없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뜻밖이었던 순간을 고르라면 ‘N잡러’라는 호칭을 처음 들었던 때를 꼽고 싶다"
내 인생 모토, '나는 어디로든 갈 수 있다'를 말할 수 있는 사람. 어디로든 갈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 인생 목표인 내게, N잡러는 인생에 찾아오리라고 생각도 못 했던 기회를 가져다준다는 이 말이 가장 크게 마음에 들었다. 등대 같은 말로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