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중독자의 고백

털어놓지 못할 비밀은 없다.

by 아테나

머릿속을 점령하고 있던 자기혐오를 이제 겨우 조금 달랬다고 생각했는데, 변호사와 첫 미팅을 하고 살고 싶은 의지가 다시 사라졌다. 경찰 측에서 보내온 리포트 속의 취한 나를 보았고, 비상시 사무실 야영을 위해 상비하고 있었던 에어매트리스가 심각한 알코올중독자의 행태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어찌어찌 미팅을 끝내고 일터로 복귀해 여느 때처럼 근무하고 집에 돌아와 잠을 청했지만, 미팅 도중 느꼈던 수치심을 지울 수 없었다. 변호사가 준 숙제 또한 큰 짐이 되어 날 짓눌렀다. 가까운 지인들에게 털어놓고 (나라는 사람이) 반드시 개과천선할 사람이라는 일종의 탄원서를 받아오라는 숙제였다.


사고 이후 한 달 동안 친구 한 명을 제외하고 그 누구와도 연락하지 않았다. 몇 달 전 잡아둔 친구들과의 약속도 못 나간다고 둘러댔고 SNS에서도 자취를 감췄다. 친구들과의 단톡방 알림을 끄고, 메시지를 읽지도, 답을 하지도 않았다. 아무렇지 않은 척 그들과 대화할 자신이 없어서. 내가 술을 미친 듯이 좋아한다는 걸 (그게 바로 알코올의존증이다) 모르는 친구가 없는데도 그랬다.


중독자의 주변인이 대부분 그러하듯 내 친구들도 돌아가며 한 번쯤 취한 내 뒤치다꺼리를 했다. 신나서 큰 소리로 떠드는 나를 진정시키거나, 인사불성인 나를 숙소에 데려다주거나, 심하게는 응급실에 있는 나를 데리고 오거나. 걱정스러운 눈빛을 받긴 했지만 (그리고 이불킥을 획득했지만) 대놓고 뭐라고 한 적은 없었다. 아마 난 자고 일어나니 멀쩡하다며 너스레를 떨었을 테고, 일터에서도 가정에서도 도무지 도망갈 곳이 없는 나를 내 착한 친구들은 이해했을 테니까. 하지만 몰랐을 리 없다. 이런 건 제삼자에게는 더 잘 보이는 법이니까.



그들이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인데도 막상 내 입으로 말해야 한다 생각하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차라리 생판 남이라면 고백하기 쉬웠을 텐데. 최소 15년을 서로의 결혼과 출산, 취업과 퇴직 또는 실직의 역사를 공유해 온 온 친구들인데도 이렇게까지 벌거벗은 나를 보여주는 건 너무나도 두려운 일이었다. 아침부터 눈물이 나올 만큼. 그러다 용기를 냈다. 아니다. 솔직히 말하면 내 수치심과 싸우는 걸 포기했다. 내가 이 정도로 엉망인데 감춰서 뭐 하나. 힘들어도 해야 하는 일이면 차라리 빨리 하자.


한 달 만에 단톡방에 메시지를 올렸다. 모두에게 할 이야기가 있으니 시간을 잡자고 부탁했다. 여섯 명이 갑자기 모이는 건 사실상 어려운 일이라 랜선 모임을 가졌다. 한 달 전 내가 어떤 짓을 저질렀는지, 그 후 어떤 고통을 받고 있는지,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과 회복을 위해 현재 하고 있는 일들을 하나씩 말했다.


지난 한 달간 나는 나에게 온갖 욕설을 퍼부어 왔는데 친구들은 같이 울어주었고 나의 단주를 지지해 주었고 도와줄 방법이 있냐고 되물었다.


사실은 알고 있었다. 친구들이 나를 사랑으로 감싸줄 것을. 내 고통을 함께 해 줄 것을. 그들이 나에게 돌팔매질하지 않을 걸 알면서도 쉽게 용기를 내지 못했던 건, 그들의 애정과 용서를 받을 자격이 없다는 생각 때문이기도 했다. 이렇게까지 후진 내가 너희들의 사랑과 지지를 받아도 되는 걸까? 나한테 그런 자격이 있나?



We accept love we think we deserve.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한 친구가 말했다. 스스로가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면 주변에서 주는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조차 힘들 수 있다고. 그래도 우리는 변함없이 네 편이고 널 많이 사랑하고 반드시 이겨낼 것을 믿는다고.


또 다른 친구는 (대문자 T답게) "자, 경우의 수를 생각해 보자. 최악의 경우,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 일을 좀 쉬어야 한다는 거? 괜찮아. 너 늘 쉬고 싶어 했잖아. 네가 쉰다고 널 자를 상사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원했던 장기 휴가를 드디어 가질 수 있겠다. 괜찮아. 그렇게까지 나쁘지 않아." 함께 울다 웃었다. 그간 놓친 친구들의 근황이야기도 듣고 소소한 일상 이야기도 하고, 각자의 정신 건강에 대해 함께 고민했다. (누가 봤다면 얼마나 이상한 광경일까. 화상모임을 하면서 울고 웃는 여자들이라니.)


홀로 괴로움에 잠식되기는 얼마나 쉬운가.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할 것 같은 나의 치부도 막상 털어놓으면 별일이 아니다. 고통을 털어놓고 함께 고민하는 것이 얼마나 큰 힘이 되는 일인지. 내가 갱생할 수 있다고 믿어주는 이들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그래서 다짐한다. 언젠가 너희 중 누구에게라도 힘든 일이 일어나면 그땐 내가 넘어진 널 일으켜 세워주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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